〈 54화 〉54화-교차하는 마음과 2일차(3)
담임선생님의 허가로 방을 옮기게 된 나는 가방을 멘 채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윤희, 규원이, 도연이 등을 비롯하여 총 10명이 있었다.
“가방은 저기에 두면 돼.”
연수가 가리킨 곳에는 가방과 캐리어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애들의 동정을 살폈다.
다른 애들은 트럼프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고, 윤희는 이어폰을 낀 채 시집을 읽고 있었다.
이 정도로까지 시를 좋아할 줄이야…….
아니면 여전히 겉돌고 있는 걸까.
“영재야아.”
규원이가 불렀다.
“같이 훌라하자!”
“훌, 라?”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게임이라고는 원카드와 도둑잡기 정도인데…….
“모르면 이 몸이 직접 가르쳐 주도록 하지!”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규원이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의기양양한 태도가 괜스레 맘에 들지 않았다. 왠지 믿음이 안 가기도 하고.
“차라리 도연이한테 물어볼래.”
게임 룰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게 제격이다.
“왜에! 나 진짜로 잘하는데.”
곧장 따지고 드는 규원이.
“세상사 다 그런 게 있단다.”
“허얼. 애늙은이.”
“이제야 알았냐?”
장난스런 어조로 반문하자 규원이가 볼을 부풀렸다.
저러고 있으니 좀 귀엽긴 하네.
“흥! 몰라. 안 끼워줄 거야.”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규원이.
“영재야. 지금 바로 배울래?”
삐친 사람을 내버려둔 채 연수가 태연하게 권유했다.
“아냐. 좀 있다가.”
나는 손을 내젓고 윤희에게 다가갔다. 옆 자리에 앉자 윤희가 한쪽 이어폰을 뺐다.
“아. 혼자 있길래.”
“걱정되어서?”
“음……. 조금?”
“네가 오기 전까지는 같이 하고 있었어. 잠깐 쉬고 싶어서 나온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괜한 오지랖이었나 보네.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지도록 노력할 거야.”
윤희가 결심을 다졌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되새김질을 하는 것 같았다.
“윤희야. 언제 올 거야?”
윤희는 말을 건 연수에게 좀 더 있다가 합류하겠다고 밝혔다.
“그나저나 너네 둘은 여기서도 붙어 지내는구나?”
“뭘. 같은 부니까.”
나는 진영이를 향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진짜루우?”
“응.”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스터디부의 부장으로서 윤희에게 참견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같이 놀아. 나는 좀 더 있다가 낄 예정이니까.”
그러면서 윤희가 이어폰을 꼈다. 시집에 몰입하고 싶다는 신호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윤희가 다른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는 나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카드게임을 하는 무리에 다가가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카드를 뽑자마자 차례를 넘겼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앞에 카드를 서너 장씩 깔기도 했다.
……이렇게만 봐선 잘 모르겠구만.
그때 누군가가 목청껏 외쳤다.
“훌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규원이. 손에 카드 패가 한 장도 없었다.
“이걸로 4연승!”
규원이가 어깨를 폈다.
“와, 규원이 진짜 잘한다.”
“진짜 못 이기겠어.”
주변 애들의 반응을 보니 진짜로 잘하는 모양이다. 아까는 그냥 허세라고 생각했는데.
“봤지?”
규원이가 나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나게 신뢰가 가는데.”
“흐흥.”
기분이 좋은지 콧소리를 냈다.
“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친절히 알려줄 수도 있다구?”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정정해야겠다. 게임 룰은 잘하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게 가장 최고라고 말이다.
“그럼 가르쳐 줘.”
“진작에 그렇게 나왔어야지!”
우리는 잠시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규원이는 다른 트럼프 카드를 가져와서 룰을 알려주었다. 의외로 설명을 잘해줘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좀 의외인 걸?
“덕분에 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아! 그럼 이제 실전으로 넘어가자구.”
그리하여 나는 우리는 애들 사이에 끼어서 앉게 되었다.
하지만 이론만 갓 배운 하룻강아지에게 승부의 세계는 무척이나 냉혹했다.
“역시 초짜는 어쩔 수 없구나.”
“아직 타이밍을 못 잡네.”
연달아 꼴찌 하는 나를 두고 애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나도 이기고 싶다고…….”
“하다 보면 늘 거야.”
중얼거리는 나에게 미소로 응대하는 도연이.
다들 날 놀리느라 바쁜 와중에 들려오는 유일한 위로는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껴도 돼?”
모두들 좋다고 하자 윤희는 규원이와 지혜 사이에 끼어 앉았다.
게임이 재개되자 모두들 최선을 다해서 게임에 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등이 나왔는데 바로 윤희였다.
규원이의 연승 행진에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다.
“말도 안 돼!”
승자의 여유를 한껏 부리던 규원이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놀라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어디서 저 정도의 실력을 쌓아온 건지.
윤희는 가볍게 웃는 것으로 우승한 기분을 표출했다.
이후로도 우리는 계속 훌라를 했다.
윤희와 규원이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우승 다툼을 벌였고, 간간이 도연이나 다른 애들도 이겼다.
오직 나만이 유일하게 0승 기록하고 말았다.
……카드 게임에는 더럽게 소질이 없는 모양이군.
카드를 정리한 뒤 애들이 세면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영재야. 너 혹시 씻었어?”
곁으로 다가온 도연이가 물었다.
“응. 옆방에 있을 때 씻었어.”
“벌써어?”
애들이 목소릴 냈다.
“에이 뭐야. 씻을 때 훔쳐 보, 읍읍.”
규원이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는 애들.
“뭐, 뭐?”
방금 뭔가 매우 위험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
“아유 참. 얘가 갑자기 뭔 소리람.”
연수가 아하하, 어색하게 웃자 다들 따라 웃었다.
……나, 오늘 괜찮은 거 맞지?
“아무튼. 우린 이제 씻을 거니까 저얼대로, 엿보면 안 돼. 알았지?”
음흉한 미소를 띠는 연수. 나머지 애들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봐! 안 볼 거야!”
얘들이 날 뭘로 보고. 나는 얼른 고개를 홱 돌렸다.
* * * *
취침 시간이 되자 다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나는 남자다 보니 맨 구석 자리로 몰리게 되었다.
“떠들지 말고 자. 영재 넌 사고 치지 말고.”
우리들의 방으로 들어온 담임선생님이 한 번 더 주의를 준 뒤 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 안.
뒤통수를 감싼 베개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드디어 꿀잠을 잘 수 있다!
다들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기에 아주 딱 좋은 환경.
나는 맘 편히 눈꺼풀을 닫았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영재애. 한영재애.”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들어대는 통에 단잠에서 깨고 말았다.
“왜에…….”
하품을 하면서 규원이를 쳐다봤다.
“우리 지금 진실 게임할 건데 같이 하자.”
시선을 들고 규원이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둥글게 모여서 앉아있었다. 가운데에는 스마트폰으로 손전등까지 켜놓고.
“영재 넌 특별히 필참이야. 거부권은 없어.”
규원이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내 인권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솔직히 이 정도면 인권위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닌가?
“원래 이런 건 남녀가 같이 해야 재밌는 거라구.”
규원이가 하도 팔을 잡아끄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 영재, 어서 와. 진실 게임은 처음이지?”
“아니, 처음은 아닌데…….”
모 가수를 떠올리게 하는 지연이의 발언을 들으면서 애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노노. 거기 내 자리고. 네 자린 따로 있어.”
규원이의 검지손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원 안이었다.
“아니 왜 하필 저기야? 내가 무슨 제물도 아니고.”
대꾸하자 모두들 도리질을 했다. 심지어 윤희마저도.
“이 모든 건 게임의 재미를 위한 것.”
“영재 설마,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린다거나?”
“여기까지 와놓고 분위기 망치는 건 아니겠지?”
와, 대놓고 부담 팍팍 주네…….
하지만 쪽수에서 밀렸기에 원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도연이가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룰은 간단해. 손가락 접어 게임에서 꼴찌한 사람에게 한 판 당 한 명씩 질문을 던질 수 있어. 그리고 꼴찌한 사람은, 무조건 진실만을 대답해야 하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느낌이 영 좋지 않은데…….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들의 시선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럼 시작.”
도연이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모두들 오른손을 펼쳤다. 첫 번째 타자는 도연이.
“안경 쓴 사람 접어.”
일단 무난한 출발.
나를 비롯한 한두 명이 손가락을 접었다.
“머리 짧은 사람 접어.”
다음 차례인 애가 말했다.
단발머리인 규원이와 내가 대상이었다.
살아남은 손가락은 세 개.
“피부 까만 사람 접어.”
이번에는 나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잠깐만?
다들 나만 노리는 듯한 이 기분은 대체…….
“저기, 얘들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막 한 사람만 콕 집어놓고 저격하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물론. 절대로 아니지.”
다들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도 있고.
내게 남은 손가락은 두 개.
다음 차례는 연수였다.
“스터디부 다 접어.”
“잠깐만! 아까 저격 안 한다고 했잖아.”
“난 아무 대답도 안 했었는데에. 긍정도 부정도 안 했는데에.”
연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딴청을 피웠다. 시치미 떼기가 그야말로 세계선수급이다.
이게 바로 남자 혼자인 것의 설움인가.
도연이가 박수를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게임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냐. 다음 차례는…….”
“나, 나!”
규원이가 열렬하게 손을 흔들면서 자기 어필을 했다.
왜 하필이면 저 녀석이…….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손가락 하나를 응시했다. 너마저 접히면, 나는 끝이다.
고개를 들었다.
규원이가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스마트폰 손전등이 아래에서 비추니까 그 미소가 사악해 보였다.
한동안 뜸을 들이던 규원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한 씨 접어.”
“이, 이건 사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항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편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재야. 결과에는 승복해야지.”
“맞아. 지금 그러는 거 추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윤희에게 간절한 눈길을 던졌다. 윤희는 시선을 슬쩍 피해버렸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한 명만 노리는 게 어디 있어…….”
“후후, 원래 이런 게임은 타겟팅을 해둬야 더 재밌는 법이라구.”
팔짱을 낀 채 말하는 규원이.
이젠 부정도 안 하네…….
진퇴양난의 상황.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쪽수 앞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래, 누군가가 말했다. 피할 수 없을 때는 차라리 즐기라고.
“……그래. 질문해 봐.”
나는 결심을 다졌다. 질문에 무조건 진실만으로 답하지는 않겠다는, 아주 작은 반항심을 챙겨두고서.
규원이가 턱을 들어 올린 채 고민에 잠겼다.
“이 중에서 누가 제일 못생긴 것 같애?”
“오오오오.”
애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물론 바로 옆이 선생님들 방이니까 눈치껏 소리를 억눌렀지만.
대개 이런 질문은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것.
없다고 하면 거짓말을 한다고 주변에서 야유를 날리고, 반대로 누군가를 지목하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규원이가 그 질문을 했으니까.
“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규원이를 지목했다.
“고민하는 척도 안 하고 그러기야? 나한테 쌓인 거라도 있어?”
“아니이. 전혀.”
장난스럽게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묻지 말았어야지.
이어서 다음 판이 시작되었다.
애들의 타깃은 이번에도 나였다.
“스터디부 안에서 누가 가장 소중해?”
윤희의 질문이었다.
이것도 대답을 잘해야 하는 질문이다.
괜히 특정한 누가 더 소중하다는 식으로 대답하면 애들이 분명히 오해할 테니까.
잠깐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난 모두 다 소중하게 생각해.”
“빠져나가기 금지!”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맞아. 진실 게임에서 두루뭉술한 대답은 안 돼.”
규원이도 거들었다. 살짝 앙심을 품은 모양이다.
“난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철판을 깔고 태연자약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무효를 연호하는 애들.
그때 윤희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난 저 대답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됐어.”
“당사자가 괜찮다잖아. 응?”
나는 얼른 윤희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다. 다들 벙찐 표정.
“어, 음……. 그렇다면 뭐.”
도연이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기세를 물렸다.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다음 판이 이어졌다.
나는 뭘 하든 어차피 꼴찌 확정. 그렇게 여기자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무슨 질문이 날아오든 나는 다 받아쳐 낼 자신도 있고.
이번에는 도연이가 질문할 차례였다.
“영재야.”
나는 도연이를 바라보았다.
도연이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모두들 숨을 죽여 도연이의 입술만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도연이가 입술을 벌렸다.
“날 어떻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