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교차하는 마음과 2일차(1)
조용히 들어가려고 했던 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서 못 들은 척하기는 어렵겠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놓았다.
두 사람은 나와 점점 가까워졌고, 어느새 우리 반 애들이 묵는 객실 앞까지 도달했다.
“먼저 들어갈게.”
객실 문고리를 손에 쥔 채 도연이를 향해 말하는 윤희. 입술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윤희의 저런 모습은 보기 좋았다.
이제 도연이에게는 충분히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니까.
“영재 너도 잘 자.”
윤희의 인사가 훅 들어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희에게서 ‘잘 자’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응 그래. 잘 자.”
웃는 얼굴로 응대했다.
윤희가 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복도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도연이뿐.
“잠이 안 오나 봐?”
“좀,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문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러자 도연이의 눈길 역시 문으로 향했다.
때마침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굉음.
우리들의 관심이 쏠리는 순간만을 기다린 것 같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도연이가 휘둥그레 눈을 뜬 채 검지로 문을 가리켰다.
“바, 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
말까지 더듬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이런 반응인데 안에 들어가면 오죽할까.
담임선생님의 명예는 지켜 주는 게 맞겠지만, 솔직히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우리 담임선생님, 코 고는 소리.”
“진짜로?”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나.
도연이의 벌어진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자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나와 있는 거야.”
“어떡해…….”
진짜로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이참에 우리 방 들어와서 잘래? 나라면 저 소리 들으면서 못 잘 것 같거든.”
생각지도 못한 권유.
이대로 도연이의 말에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붕붕 내저었다.
“아냐 괜찮아. 만약 선생님한테 걸리면 나 뼈도 못 추릴 거야.”
“아. 그렇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도연이.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진짜로 잠 올 때까지. 그때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놀러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이니.”
“내 팔자가 그런가 봐.”
에휴. 나는 한숨을 내보냈다.
생각해 보니 제일고에 와서 여태 고생길만 걸었다. 진짜로 고생할 팔자인 건가.
“힘내.”
도연이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직후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했다.
“어우. 난 이제 못 버티겠어. 먼저 들어갈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나서 도연이가 돌아섰다.
“잘 자.”
“그래. 내일 무사히 만나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지옥도에 들어가는 사람 같잖아.”
도연이는 슬쩍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객실로 돌아갔다.
나는 문간에 기대어 섰다. 버스 소리 같은 굉음이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지옥도 맞구나.
그나저나 윤희와 도연이는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다들 잠든 시간에 나눌 만큼 비밀스러운 얘기인 것은 확실한데, 추론할 만한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하지만 구태여 알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둘만의 비밀이고 프라이버시니까.
방금 본 광경은 그냥 머릿속에서 털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하품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잠이 온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나서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하품을 믿고 자리에 누웠지만, 고막을 거세게 두들기는 굉음 때문에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나버린 것이다.
다시 또 복도로 나가기는 귀찮았고.
결국 귀를 틀어막은 채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지 눈을 뜬 지금 정신이 몽롱했다. 눈꺼풀도 무겁게 느껴지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선생님들도 제대로 못 잤는지 눈이 퀭했다.
오직 담임선생님만이 상쾌한 아침을 만끽했다.
“어우, 잘 잤다.”
기지개를 켜고 나서 이리저리 몸을 푸는 담임선생님. 그런 뒤 동숙인들을 둘러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좀비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나와 다른 선생님들.
“아, 혹시 어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선생님이 머쓱한지 뒷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게, 제가 피곤하면 좀 더 심해지더라고요.”
보통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할 테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솔직히 너무 심했으니까.
“방을 따로 잡아야 하려나.”
“그게 좋을 것 같……은 아니고, 귀마개가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아요.”
3반 담임선생님의 제안에 나머지 사람들도 찬동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오늘 준비해 올게요.”
담임선생님의 발언 덕에 다들 한숨을 돌렸다.
집합 시간이 가까워졌고, 나는 선생님들을 따라 방을 나섰다.
1층 로비에 전교생이 집합해 있었다.
내게 손을 흔드는 도연이. 거기에 화답해준 뒤 얼른 우리 반 맨 뒷줄에 합류했다. 인원 파악을 마친 뒤 우리들은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 메뉴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빵 종류와 잼, 시리얼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스터디부 멤버에 도연이가 낀 4인 그룹 형태로 한쪽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시리얼을 한 숟갈 떠먹고 빵을 베어 물었다.
“빵을 직접 굽는 건가? 맛있네.”
나의 평을 들은 규원이도 덥석 빵을 집어먹었다.
“오! 그런 것 같은데? 쩐다.”
“에이, 어디서 받아오는 거겠지.”
빵 한 쪽을 뜯어서 입에 넣은 도연이가 말했다.
“괜찮네.”
윤희의 감상은 간결했다.
“그나저나 영재야. 어젠 잘 잤어?”
숟가락을 들어 올린 채 말을 건네는 도연이.
눈치 없게 하품이 먼저 튀어나왔다.
“……피곤해 보이네.”
맞은편에서 내 안색을 살피던 윤희의 음성이었다.
“우린 피곤해서 조금 떠들다가 금방 잤는데.”
규원이의 얼굴을 보니 생기가 감돌았다. 아주 그냥 푹 잤구만.
“넌 쌤들하고 있어서 긴장됐겠다. 그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말하면서도 하품이 나왔다. 이건 꽤 심각한 상태 같은데.
“엄청 시달렸구나…….”
도연이가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시달렸다니?”
되묻는 규원이. 윤희의 시선도 도연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도연이가 고개를 길게 빼고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알려주었다.
“우리 선생님 코골이가 심하더라구.”
“허얼. 리얼?”
규원이는 말 그대로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
윤희는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코골이와 외모 간의 상관관계가 있었던가.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정신적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식탁에 엎어질 것 같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근데 문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니까. 엄청 났어.”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윤희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버스 소리 같았어.”
말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태까지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새벽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괜찮아?”
윤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버스에서 좀 자야 될 것 같아.”
말을 끝맺자마자 또 하품.
오늘도 여기저기 다닐 텐데 이대로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으으. 난 그러면 절대로 못 자는데.”
규원이가 몸서리를 쳤다.
“진짜로, 경험하지 않는 게 최고야.”
“쌤한테 얘기하자.”
규원이가 앞뒤 맥락을 자르고 말했다.
“뭐를?”
“방 옮겨달라고. 잠을 못 자겠다고 얘기하면 되잖아.”
“그래서, 선생님께 코골이가 심하다는 얘길 하자는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윤희가 끼어들었다.
“그거야……. 하면, 안 되겠지?”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딱 잘라서 말하는 윤희. 계면쩍은 듯 규원이가 뒷머릴 매만졌다.
“아냐. 선생님도 알고 계시더라. 오늘 귀마개 사온다고 하셨어.”
“귀마개 있음 괜찮겠구만!”
나는 규원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괜찮을 거야. 아마도. 괜찮겠지…….”
진짜로 그러길 바라며 나는 계속 되뇌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우리들은 버스에 탑승했고,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 * *
몸이 갈대마냥 흔들거려서 정신을 차렸다.
“많이 피곤했구나.”
윤희의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래턱을 매만졌다. 다행히 침은 흘리지 않았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희가 슬며시 웃었다.
“가자.”
윤희의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바깥으로 나오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담임선생님 앞으로 모두들 집합했다.
선생님은 휴대용 마이크를 들고 주의 사항을 전파했다.
“여긴 북촌한옥마을이야. 이 동네에는 실제로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까 조용하게 둘러봐야 한다. 이 점 꼭 명심해. 그리고 골목이 복잡하니까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들 하고. 12시까지 여기로 모이면 된다. 이상!”
애들이 친한 친구들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9시 반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반.
줄 앞쪽에 있었던 규원이가 우리들에게로 왔다. 그리고,
“안녀엉?”
도연이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도연아아. 너 이제 스터디드림 명예부원하자.”
규원이가 도연이를 가볍게 안았다.
친하면 저런 행동이 나오는 걸까.
같은 여자인 윤희에게 물어보려다가 얼른 입술에 지퍼를 채웠다. 아무리 잠이 와도 그렇지, 그런 짓거리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왜?”
“아냐. 그냥.”
나는 윤희를 향해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규원이는 포옹을 풀었다.
“나도 왜 저러는지 잘은 몰라. 그냥 친밀감의 표시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저기, 윤희야?”
윤희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언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거야?”
너무 놀라서 방금까지 들러붙어 있던 수마가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왠지 모르게 궁금해 하는 것 같았어.”
“미안.”
“마음 쓰지 마. 요샌 괜찮아지고 있으니까.”
윤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렇구나.”
대화를 얼추 마무리 짓고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한옥마을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좁지만 잘 정비된 도로. 고풍스러운 담벼락과 한옥들.
우리 학교 학생들 말고도 관광객들이 꽤 있었다.
“와아. 분위기 있다.”
도연이가 감탄을 내질렀다.
윤희는 뒤에서 풍경 사진을 계속 찍었고, 규원이는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옥마을이라는 이름답게 눈을 돌리는 곳마다 목재로 된 처마가 보였다.
우리는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영재야. 같이 사진 찍자.”
도연이가 내 손목을 잡아끌더니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앞에 섰다. 그러고는 나와 어깨를 맞댄 채 손나팔로 윤희를 불렀다.
“윤희야. 사진 찍어줘.”
“알겠어.”
도연이는 엄지와 검지로 하트를 만들고는 나에게도 만들라고 요청했다.
“영재야. 너도 하트 만들어.”
내가 하트를 만들자 윤희의 스마트폰에서 짧게 플래시가 터졌다.
“어때? 잘 나왔어?”
“봐봐.”
윤희는 자신에게 다가온 도연이에게 선뜻 스마트폰을 건넸다. 규원이도 옆에 들러붙어서 사진을 구경했다.
다들 사진에 관심이 많구나.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어때?”
물어보자 도연이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잘 나왔네.”
“나 키 좀 작게 나온 것 같은데…….”
도연이는 약간 불만스런 눈치였다. 나는 윤희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다시 찍을까?”
“아냐. 어차피 오늘은 실컷 찍을 거니까. 참! 너네도 저기 서 봐. 내가 찍어줄게.”
도연이의 지시에 윤희와 규원이가 장독대 앞에 서서 포즈를 잡았다.
규원이는 양손 엄지를 치켜세운 채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고, 윤희는 아까 우리가 했던 것처럼 하트를 만들었다.
“너네 좀만 더 붙어 봐.”
도연이의 주문에 규원이가 윤희의 팔짱을 꼈다.
당황한 듯 눈썹을 치뜨는 윤희.
“준비 OK!”
윤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규원이는 싱글벙글한 모습이었다.
도연이는 그대로 사진 촬영을 했다.
“표정이 좀…….”
사진을 보면서 불만족스러워 하는 윤희.
“난 맘에 들어.”
반면 규원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마당을 나온 우리는 다시 골목을 따라 걸었다.
이따금 조용히 관람해 달라고 하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당부한 게 아니었군.
가다보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볼까?”
“나는 저쪽으로 가보고 싶어.”
윤희가 곧장 의견을 표명했다.
“난 반대쪽으로 갔으면 해.”
도연이는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규원아, 너는?”
“난 어디든 좋은데?”
규원이는 중립.
이러면 의견 모으기가 쉽지 않은데.
“저쪽으로 꼭 가보고 싶어.”
윤희는 쉽사리 고집을 꺾지 않을 듯했다.
“그럼 잠깐 나뉠까?”
대안을 제시한 이는 다름 아닌 도연이였다.
“그래도 같이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난 좋아.”
윤희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견이 너무 자연스럽게 묵살되었는데?
“규원아. 같이 가자.”
“응? 갑자기?”
“사진 찍어줄 사람 필요하니까.”
윤희가 규원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건 영재한테 부탁하면…….”
“아무튼. 일단 따라와.”
거의 반강제로 끌고 가는 윤희.
갑자기 왜 저러지?
“우린 반대쪽으로 가볼까?”
도연이가 선선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발을 움직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으려나.
“그러자.”
나는 도연이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