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1화-부푼 기대감으로 1일차(2)
2시에 딱 맞춰서 제일고 전교생이 광화문 앞으로 집합했다. 그런 뒤 선생님들의 인솔을 따라 버스로 되돌아왔다.
“서대문형무소까지 얼마나 걸려?”
“잠깐만.”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을 던졌더니 윤희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뒤 지도를 검색했다.
“별로 안 멀어. 15분 정도.”
윤희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가깝네.”
“내일 가는 곳도 여기서 별로 안 멀어.”
윤희가 검지로 지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 정도면 걸어서 가도 될 것 같은데?”
평소 등교 시간이 40분이라 그런지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면 버스를 타고 온 의미가 없잖아.”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지적이로군. 나는 머리를 움직이며 수긍했다.
담임선생님이 손으로 세어가며 인원을 파악했다.
“다 왔구나. 그럼 출발한다!”
선생님의 목청을 신호로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막히는지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이게 그 유명한 서울의 교통 체증이라는 것이로군.
덕분에 목적지까지 20분 넘게 걸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높은 담과 건축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건물 입구 앞에 서서 우리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오후 5시까지 자유 관람하고 여기로 집합해! 알았지?”
다들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답했다.
그나저나 상당히 자유롭게 풀어주네. 수련회 같은 게 아니라서 그런가.
매표소를 지나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안으로 들어섰다.
“역사관 안에서 떠들면 안 돼. 내가 다 지켜볼 거야.”
당부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앞장서서 역사관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줄줄이 고구마처럼 그 뒤를 따랐다.
나와 윤희는 이번에도 동행하게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던 규원이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달려왔다.
“와. 날 찾지도 않네?”
“이러고 있으면 오겠거니 생각해서.”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자 규원이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헐. 부장이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니 뭐, 내가 그거까지 챙겨줘야 해? 우리 이제 17살이라고.”
나의 부연 설명에 규원이가 눈을 일자로 뜬 채 입을 앙 다물었다.
“그치만, 17살은 아직 관심이 필요한 나이라구?”
“자, 관심.”
손으로 물건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양손으로 덥석 받아드는 행동을 하는 규원이.
“하나론 부족합니다. 더 주세욧!”
“바보들.”
곁에 있던 윤희의 한숨 소리.
윤희가 나와 규원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이쯤 하고 구경하러 가자. 그리고 여기선 정숙해야지.”
나직하고 담담한 음성으로 타일렀다. 나와 규원이는 얼른 입술을 잠갔다.
우리는 바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전시물들을 둘러보았다. 윤희가 제일 앞. 그 뒤로 나와 규원이 순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픈 역사를 보다 보니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과 들뜬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주변에 있는 애들도 조용히 관람에 열중하고 있었다.
“분위기 되게 엄숙하다.”
평소보다 볼륨을 줄여 말하는 규원이.
윤희는 관람을 시작하고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록물이 있으면 멈춰 서서 그걸 읽었고, 이따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시집을 읽을 때처럼 집중하는 모습.
뒤를 돌아보니 규원이도 어느새 차분한 눈으로 전시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더니 도연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네들 모습이 보이길래.”
도연이는 노란 린넨 자켓 앞섶으로 보이는 흰 면티와 진청색 칠부 바지. 하얀 캡모자가 옷차림의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맨날 교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사복 차림을 보니 신선한 느낌이네.
“근데 너 아까 엄청 놀라더라?”
“몰입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러니까.”
아깐 진짜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너희들 항상 붙어 다니네. 여기서도 부활동 하는 줄 알았지 뭐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껴도 될까?”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불쑥 말하는 도연이.
“응. 좋아.”
먼저 대답한 이는 윤희였다.
얘가 웬일이지? 도연이라서 그런가.
“OK.”
사람을 가리지 않는 규원이는 당연히 찬성표를 던졌다.
물론 나도 반대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므로 괜찮다고 했다.
“고마워.”
생긋 웃는 도연이.
관람객들이 우리들을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고 있었군.
“얼른 가자.”
내 말에 윤희가 먼저 움직였다.
나와 도연이, 규원이가 윤희의 뒤를 따라갔다.
* * * *
역사관을 전부 둘러보고 나왔다.
“후아아! 살 것 같다.”
규원이가 잠깐 멈춰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엄숙한 분위기 탓에 많이 갑갑했던 모양이다.
“집합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도연이의 음성.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4시 30분.
여기서 집합 장소인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좀 더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공터와 잘 정비된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좀만 걸어볼래?”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역사관 안에서 그렇게 걸었는데 또?”
규원이는 쉬고싶어 하는 모양새.
도연이와 윤희는 괜찮겠다고 했다.
“힘들면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윤희의 발언에 고민에 빠진 듯한 규원이. 우리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생각해 보니까, 아직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렇게 다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우리는 뻗어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여기저기에 시선을 뿌리며 앞장서서 걷는 규원이와 도연이.
윤희는 풍경을 담고 싶은지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런 윤희에게 바투 다가갔다.
“마음에 들어?”
“왠지 영감을 줄 것 같아서.”
“시?”
윤희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시 얘기를 꺼내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다.
“최근에는 잘 안 떠올라서…….”
걸음을 세우는 윤희. 그러고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만 보면 여기가 지옥 같은 장소였다는 느낌이 안 드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윤희가 하고 있는 대로 고개를 들어 건축물을 보았다.
옛날엔 감옥을 이렇게 지었구나, 하는 감상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메말랐나?
“너희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약간 떨어진 곳에서 목청을 올리는 도연이.
규원이는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재빨리 그들과 합류했다.
“위에 뭐 있었어? 혹시 UFO?”
규원이가 턱을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UFO야 어디 있니?”
하지만 새파란 하늘에는 솜털구름 떼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도연이는 규원이의 행동이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도연이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영재야. 넌 걷는 거 좋아해?”
“갑자기 왜?”
“음. 그냥. 왠지 걷는 게 느긋해 보여서.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궁금해서 그래.”
“내가 그랬었나?”
도연이가 고개를 두 번 주억거렸다.
나는 턱을 문지르며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걷는 일이 일상 그 자체라 좋은지 싫은지를 따져본 적이 없으므로.
“굳이 얘기한다면, 좋아하는 쪽이려나.”
대답하면서도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그렇구나. 영재는 산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머릿속에 저장해야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콕콕 찌르는 도연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까지 더해지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기억해서 어디에 쓰려고.”
“뭐든 쓸 날이 오지 않겠어?”
도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시선이 부드럽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착각일까.
“와아. 영재 인기 많네.”
순수하게 감탄하는 규원이.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모르는 사람이 듣고 오해하면 어쩌려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슬슬 돌아가자.”
등 뒤에서 윤희가 말했다.
온 김에 더 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집합 장소인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 * * *
우리가 이틀을 보내게 될 숙소는 서울 근교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대리석이 깔린 로비가 상당히 넓었다. 이 정도면 엄청 호화로운 거 아닌가?
1반부터 5반까지 전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자, 주목! 버스에 짐 놔두고 온 사람 없지?”
담임선생님의 물음에 모두들 네, 하고 대답했다.
“지금부터 객실이랑 객실에 들어가는 인원 알려줄 테니까 집중해서 잘 듣도록.”
담임선생님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쳤다. 다른 반 담임들도 그러고 있었다.
우리 반은 2층 객실 세 군데였다.
윤희, 도연이, 규원이는 같은 방 멤버가 되었다.
선생님이 마지막 이름까지 다 호명했다.
“자, 이상!”
응? 잠깐만.
“저기, 선생님.”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왜?”
“제 이름은요?”
“아아. 넌 선생님들하고 같은 방 쓸 거야.”
이유는 구태여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왜? 애들하고 같은 방 못 써서 아쉬워?”
선생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상식과 개념으로 무장한 건장한 남고생의 명예를 걸고서.
그런데 애들이 단체로 아우성을 터뜨렸다.
“선생니임. 저희는 영재랑 같은 방 써도 괜찮은데요.”
“영재도 속으론 저희랑 같이 있고 싶어 할 거라고요.”
아니, 얘들아. 내가 안 괜찮은데요.
담임선생님도 의외라고 느꼈는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뭔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냐?”
“괜찮아요! 저희 숫자가 더 많으니까.”
규원이의 음성이었다. 제발 이상한 데서 열 올리지 말았으면…….
“그래도 안 돼. 내가 선생님인 이상 그건 허락해 줄 수 없어.”
다행히 선생님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십년감수했구만.
선생님은 객실에서 짐 풀고 7시 반까지 다시 로비에 집합하라는 공지를 알렸다.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다들 질서정연하게 중앙 계단을 올라갔다.
선생님들이 묵을 방은 2층의 복도 끝에 있었다.
“으으. 영재 어떡해.”
객실로 들어가기 전에 규원이가 나를 보며 불쌍하단 눈길을 보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시원스레 대답한 나.
“그래두.”
“괜히 문제 생기는 것보다 낫지.”
나는 규원이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윤희와 도연이도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혼자 남자인 이상 이런 부분은 감내하는 수밖에.
객실 안으로 들어왔더니 쾌적한 내부 시설이 나를 반겨주었다.
“영재야.”
옷을 갈아입다 말고 입을 여는 담임선생님.
“내가 잠버릇이 좀 안 좋아. 이해 좀 해 주라.”
“아, 네.”
나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하루종일 고생한 다리를 풀어주었다. 눈치가 보여서 눕지는 못하겠고…….
집합 시간이 되자 선생님을 따라 1층 로비로 향했다.
인원을 빠르게 파악한 선생님이 호텔 지하층에 있는 식당으로 우리들을 안내했다.
“오! 뷔페다.”
근처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호텔 측에서 특별히 준비해 준 거야.”
담임선생님의 설명.
실로 오랜만에 실컷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슬기가 여기에 왔었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싸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슬기 몫만큼 최대한 많이 먹는 수밖에.
음식을 담고 자리에 앉았다. 윤희와 규원이가 자연스레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쯤 하면 거의 자석이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인데.
“너네 여기 있었구나.”
도연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들의 자리에 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접시를 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앉아도 되지?”
앉은 뒤에 그렇게 물어보면 어쩌라는 거니.
뭐, 상관은 없지만.
“오늘따라 우리 쪽에 자주 붙네. 도연아, 이참에 스터디부 들어와.”
맞은편에서 규원이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학원 때문에 시간을 맞출 수가 없더라고. 나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윤희의 눈길은 나와 도연이를 한 번씩 오갔다.
“윤희야 왜?”
“……아냐.”
수저를 쥐고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윤희.
순간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 하지만 도연이가 다시금 분위기를 띄웠다.
규원이의 텐션까지 더해진 덕에 우리는 즐겁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 * * *
어느덧 다가온 취침 시간.
나는 담임선생님 바로 옆에 누웠다. 그러자 낮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선생님들은 벌써 숙면에 들어갔는지 방 안이 고요했다.
크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 눈을 뜨면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옆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
버스에 시동이 걸릴 때 생기는 소음과 맞먹을 정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음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코가, 사람이 낼 수 없을 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들기는 그른 것 같은데.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밝은 조명 때문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문밖으로도 코 고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시 들어가기가 겁날 지경인데.
눈이 금세 조명에 익숙해진 직후, 반대편 복도 끝에 서 있는 윤희와 도연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본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딘가 진지해 보이는 옆모습.
이런 건 못 본 척 하는 게 예의지.
나는 침을 삼키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영재야.”
도연이가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