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화-5월은 푸르다(4)
나는 발길이 향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골목을 거닐었다. 유년 시절부터 살았던 동네인 만큼 길은 모조리 꿰고 있으니 헤맬 걱정은 전혀 없다.
그나저나 밤에 거니는 골목은 확실히 낮과는 다른 느낌을 주네.
낮에는 고즈넉했다면, 지금은 좀 을씨년스럽다고 해야 할까.
때때로 통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때는 그나마 적적함이 덜했다.
수십 분을 걷다가 동네에 하나뿐인 마트의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엄마의 일터이기도 한 곳.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온 건 꽤 오랜만인데.
내가 반찬을 해먹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군것질은 거의 안 하다 보니 올 일이 잘 없는 것이다.
온 김에 엄마 일하는 모습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트 안으로 들어갔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내부가 무척 한산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유니폼을 걸친 채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엄마!”
“어머! 아들, 어쩐 일로 여기 왔어?”
내가 다가가자 심드렁했던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그냥. 문득 산책이 하고 싶더라고.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들어오게 됐네.”
“엄마가 좀 있으면 퇴근인데 같이 갈까?”
엄마의 목소리에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배어있었다.
“응. 좋지! 혹시 내가 도와줄 일 있어?”
“얘는. 그건 엄마가 할 일이지. 저기 가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렴.”
엄마가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나는 마트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과자 코너에 진열된 과자 봉지들을 보고 있으려니 없던 식욕이 샘솟으려 했다. 이래서 마트는 사람에게 유해한 공간이라니까.
우유·음료 냉장고를 죽 둘러보다가 축산 코너로 향했다.
“학생. 우리 이제 마감하는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회색 앞치마에 위생모를 걸친, 푸근한 인상을 지닌 아주머니였다.
벌써 정리를 마쳤는지 진열대가 텅 비어있었다.
“아. 저는 엄마 기다리고 있어서요.”
그러면서 말끝에 엄마의 이름을 댔다.
“아하. 경희 씨 아들이었구나. 가끔 얘기 들었어.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며?”
엄마가 내 자랑을 했었구나. 조금 의외였다.
“그냥.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대답을 하면서도 어깨가 으쓱했다. 다름 아닌 공부에 대한 칭찬이니까.
“고등학생이지? 근데 몸이 왜 이렇게 약하니. 클 때는 많이 먹고 그래야 하는데.”
“아, 네. 뭐…….”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칭찬을 하자 마자 곧바로 아픈 곳을 때릴 줄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머니는 호방하게 웃을 뿐이었다.
“얘야. 오늘 밤에 고기 좀 구워달라고 해. 아줌마가 특별히 싸게 줄 테니까.”
이번에는 장사 모드.
아주머니가 진열대 구석에 있던 고기 한 팩을 가져왔다. 간장 소스로 양념을 한 돼지갈비였다.
“경희 씨! 이리로 와 보세요.”
아주머니가 격렬하게 손짓을 했다.
돌아보니 엄마가 음료 상자를 내려놓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음료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엄마.
“아들이 참하게 생겼는데, 몸이 너무 약해. 오늘 고기 좀 먹여요. 1Kg 5천원에 줄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이는 아주머니.
그러자 엄마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주세요. 오랜만에 애들하고 고기 좀 먹어야겠네.”
“아유. 잘 생각했어.”
아주머니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고기팩을 비닐에 담은 뒤 나에게 건넸다.
“키 크려면 자알 먹고 다녀야 해. 고기 좀 많이 사달라고 그러고.”
“아, 네. 그럴게요…….”
아주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엄마는 냉장고에 음료캔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괜히 방해만 될 것 같은데……..
“엄마, 나 밖에서 기다릴게.”
“그러렴.”
나는 부리나케 마트 바깥으로 나갔다.
* * * *
휴대폰 시계가 정확히 11시가 되자 마트의 간판 불이 꺼졌다.
유리문을 밀고 나온 엄마. 축산 코너 아주머니도 뒤따라 나왔다.
“그나저나 경희 씨 아들 보니까 우리 아들 생각나네.”
“대학생이라고 하셨죠?”
“네. 이제 2학년이에요. 기숙사 룸메이트들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는 하지만, 어디 걱정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아직도 어린데.”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애 크는 건 진짜 한순간이더라구요. 잘 키워놔야 해. 너는 엄마 말 잘 듣고.”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경희 씨.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영자 씨도요.”
엄마와 아주머니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는 골목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오늘은 아들이 있어서 든든하네.”
“앞으로 매일 나올까?”
“얘는. 네 할 일 해야지.”
“그럼 가끔은 괜찮겠네?”
“엄마는 그 마음만 있으면 충분해.”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는 내일 아침에 구워놔야겠구나.”
“난 지금 먹어도 되는데.”
“시간이 늦었잖니.”
“알고 있어. 그냥 한 소리야.”
사실 반은 진심이었지만.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집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초조함을 느꼈다.
수학여행에 대해 말해야 할까?
어차피 엄마에게 얘기해야 될 내용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수학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부담감도 있었따.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혀가 입 안 여기저기를 굴렀다.
“왜 그러니?”
엄마가 뒤돌아보고 있었다.
“응?”
정신을 차려보니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머쓱함을 느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게, 생각을 좀 하다가…….”
“엄마한테 얘기해 봐.”
내 곁으로 다가온 엄마가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이 문제는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거리가 아니지.
“어……. 오늘 학교에서 수학여행 관련해서 안내문을 받았거든. 행선지랑 참석여부를 조사하는 건데 경비가 좀 비싸서.”
“어디에 가는데?”
“아직 확정된 건 아냐. 서울이랑 경주랑 부산 중에서 골라야 해.”
“엄마는 경주에 가보고 싶네.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갔었는데 참 좋았거든.”
“추억이 떠올랐나 봐?”
“엄마도 너 만하던 때가 있었잖니.”
잠깐 회상에 젖었는지 엄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경비가 얼마길래 그러니?”
“……20만원.”
약간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게 걱정되서 그랬니?”
엄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좀, 비싸잖아.”
“일정은 어떻게 돼?”
“어, 그게…….”
경비에만 정신이 팔려서 다른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턱을 매만지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당장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까먹었어. 집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그런 걸 기억해야지, 왜 돈에만 신경 쓰니? 응?”
그러면서 엄마의 손이 내 볼을 꼬집었다. 손톱으로 살갗을 짓누르니 아팠다.
“으가아앍. 나 져 나 져.”
‘놔 줘’를 똑바로 발음하기 힘들 만큼.
엄마가 볼을 힘껏 비틀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벌에 쏘인 느낌이 이런 걸까.
엄마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아들이 그런 걸로 걱정 안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수학여행은 이 나이 때가 아니면 갈 수도 없잖니.”
“엄마…….”
왠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수학여행 가고 싶지?”
나직하게 물어보는 음성.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가고 싶어 하는 눈을 하고 있더라고. 안 가면 얼마나 후회하겠니. 돈 걱정은 접어두고 맘 편히 다녀오렴.”
“그래도…….”
괜히 엄마에게 부담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치밀었다.
“다음에 장학금 나오지 않니?”
“응. 다음 분기부터 나온다고 했어.”
언젠가 담임선생님을 통해 들었던 내용을 입에 담았다.
“그럼 괜한 걱정할 필요가 없네.”
엄마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 고마워.”
나도 만면에 미소를 그렸다.
“아, 근데 말야. 아까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고?”
“엄만 네 눈빛만 봐도 알지. 그리고 네가 아닌 척해도 감정을 얼마나 잘 드러내는데.”
“진짜로?”
“그럼.”
엄마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내가 그렇게 티를 많이 내고 다녔나?
얼굴 여기저기를 더듬자 엄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늦겠다. 어서 가자.”
먼저 걸음을 옮기는 엄마. 나는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집에 돌아왔더니 슬기는 이부자리를 펴놓은 채 엎어져 있었다.
나는 엄마의 저녁상을 차려준 뒤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 책상 위에 올려둔 수학여행 인쇄물의 빈칸을 채웠다.
행선지란에는 서울, 참석 여부란에는 ‘참석’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
다음날.
수학여생 인쇄물을 선생님에게 제출하고, 오전 수업을 충실히 보냈더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필기 노트를 펼쳐서 읽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간드러지는 음성과 함께.
“부장니이임.”
고개를 틀어서 나를 괴롭히는(?) 규원이를 보았다.
“왜?”
“배꼽시계가 눈치 없게 울리고 있슴다.”
“그래? 난 아닌데.”
홀쭉하게 들어간 내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꼬르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배에서 이렇게 큰 소리가 날 리가 없을 텐데?
나는 곧 오른편에서 들려온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규원이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아침을 못 먹었거든. 그러니까 지금 밥 먹으러 가자!”
“난 좀 있다가 갈 건데?”
노트를 슬쩍 들어 보였다.
“윤희 너는?”
타깃을 변경하는 규원이. 윤희는 대답 대신 시집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 안 돼. 같이 밥 먹으러 갈 사람이 필요해애.”
그러더니 규원이가 내 오른팔을 붙잡았다.
“다른 친구들은 어쩌고?”
“나 화장실 간 사이에 먼저들 줄 서버렸어.”
규원이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혼밥해. 요즘 대세잖아.”
내 말에 규원이가 도리질을 했다.
“아무튼 너네도 밥 먹을 때잖아. 지금 가자, 지금!”
이럴 때는 정말로 끈질기단 말이지.
“응? 응?”
이제는 간절한 눈빛 공격이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스터디부 멤버인데 가끔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결정을 내린 뒤 노트를 덮었다.
윤희는 여전히 시집을 보고 있었다.
“윤희야. 같이 가자.”
“그렇게, 할까?”
내가 권유하자 천천히 책장을 덮는 윤희.
“와. 영재 말은 다 들어주네.”
“그야 부장이니까.”
윤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규원이를 향해 대꾸했다.
우리는 줄에 합류했고, 그로부터 5분 뒤에 급식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조용했던 교실과는 달리 시끌벅적하고 복작복작한 분위기.
식판을 든 채 주위를 둘러보자 괜찮은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윤희와 규원이가 나란히 앉고, 나는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나저나 주현이 언니 말야.”
먼저 말문을 여는 규원이.
“어제 보니까 공부 레알 열심히 하더라. 제2의 한영재인 줄.”
“2학년 전교 8등이라고 했잖아.”
윤희가 담담하게 끼어들었다.
“야 잠깐만. 그렇다고 거기서 내 이름을 꺼내는 건 또 뭐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스터디부에서 주현이 언니랑 비교할 만한 대상이 너뿐이걸랑.”
“응.”
윤희가 규원이에게 동조했다.
“근데 왠지 모르게 쫓기듯이 하는 느낌이었어.”
“쫓기다니?”
단번에 의미를 알아채기 어려운 말. 나와 규원이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윤희는 검지로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음. 강박증,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해야 되나.”
“그래?”
아리송한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규원이.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기분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윤희 스스로도 알송달송한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현 선배의 그런 모습을 오히려 더 좋게 보았으니까.
“근데 우리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규원이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서 후후, 웃음소릴 냈다.
보아하니 수학여행 얘기로군.
“바로 수학여행!”
예상한 대로였다.
“너넨 어디로 찍었어?”
규원이가 질문을 던지고는 나와 윤희를 번갈아 보았다.
“난 서울. 너도지?”
검지로 규원이를 지목하자 당연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희 너는 왠지 경주를 선택했을 것 같은데. 맞아?”
규원이의 한 마디에 윤희의 동공이 커졌다.
“맞구나? 크으. 역시나. 너라면 그럴 것 같더라구.”
규원이가 팔짱을 낀 채 거들먹거렸다.
“반에서 내 이미지가 그쪽으로 굳어지네…….”
윤희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평소에 책 보고 조용하게 있으니까?”
사실 나도 윤희라면 경주를 가고 싶어 할 거라고 예상했을 정도니까.
“경주에 재밌는 게 있나?”
규원이가 중얼거리고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네, 없어.”
“박물관, 나름 재밌지 않을까?”
의견을 피력하는 윤희.
““그건 아닌 듯.””
나와 규원이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웬일로 규원이와 의견이 일치하는구나.
“아무튼 아직은 정해진 게 아니니까.”
윤희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1학년 수학여행 세부 일정 공문이 왔다.
행선지는 모두의 예상대로 서울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