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화-5월은 푸르다(3)
입부.
그 단어에 갑자기 과거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말, 부원 3명을 모으기까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이제 여기에 주현 선배만 들어와 준다면 마지막 한 자리까지 채우게 된다.
정말로 바라마지 않던 순간.
그런데 괜찮을까?
주현 선배는 한눈에 봐도 소심해 보이는 성격인데……/
나는 스터디드림 부원들의 성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1. 심윤희.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할 말은 다 함(독설 포함). 눈치가 비상함.
2. 이규원. 평소에 생각 없이 지냄. 오버를 많이 함. 오지랖도 상당함.
3. 정지아 누나. 명랑함. 연상의 여유를 보여줌. 교내에서 가장 미인.
지아 누나의 마지막 카테고리가 성격의 영역에서 벗어났지만 뭐, 사소한 문제이니 그냥 넘어가는 걸로.
중요한 건 이 세 명과 주현 선배가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다.
“호, 혹시 맘에, 안 드는 거라면…….”
주현 선배가 말꼬리를 삼켰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표정.
“아뇨! 거절할 생각 1도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나저나 주현 선배는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던 걸까.
나는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선배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5시 조금, 넘어서부터.”
개미 발소리만한 목소리.
내가 이사장실을 나왔을 때가 거의 6시쯤이었으니까…….
“1시간 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놀라서 반문했더니 주현 선배가 어깨를 한 번 움찔했다.
“그냥 노크하고 들어와도 되는데 굳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그게 한 시간씩이나 필요할 일입니까!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른 말을 얼른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런 말을 했다간 당장에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태도니까.
아무튼 주현 선배를 더이상 여기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갔더니 멤버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로 떠드는 쪽은 규원이와 지아 누나.
내 이럴 줄 알았지.
“이제야 왔네.”
지아 누나가 나를 반겨주었다. 윤희는 이쪽을 향해 눈길만 보냈다.
“와.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굳이 자신의 뒷목을 문질러가며 말하는 규원이.
“면담이 생각보다 좀 길어져서. 그나저나 지금 2학년 선배 한 분이 입부하고 싶다고 하는데.”
“진짜? 진짜, 진짜?”
규원이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나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온대?”
지아 누나가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 덕분에 채워진 거 아니겠어요?”
“다 내 덕인 줄 알아.”
비행기 태워주자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누나.
그런 모습도 나쁘지 않군.
“나도 환영이야.”
윤희도 찬성 의견을 내보였다.
다들 긍정적인 반응.
나는 문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문밖에 서 있는 선배를 향해 손짓을 했다.
“선배. 들어오세요.”
주현 선배가 쭈뼛거리며 부실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어! 주현이었구나. 안녕?”
지아 누나가 손을 흔들었다.
“지아 누나.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주현 선배한테 인사했죠?”
“저번이라니?”
지아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한 달도 더 된 일인데 기억 못할 만도 하지.
“저번에 왜, 여기저기에 부원 모집 홍보물 붙이러 다닐 때 마주친 적 있잖아요. 구름다리에서.”
“……아, 그때? 그야, 같은 반 친구니까.”
“같은 반이라고? 이 무슨 우연의 일치?”
누나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알려주자 규원이가 놀라워했다.
“우리 셋도 같은 반이잖아. 새삼스럽긴.”
윤희의 지적에 규원이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일일이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피곤하지 않을까 싶다.
“음, 선배. 혹시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주현 선배가 교복 블레이저의 끝자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긴장이 되는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러면 나도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냥 이름만 말하셔도 괜찮으니까요…….”
명찰도 있고 아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육성으로 들려주는 게 좋으니까.
세 사람의 시선이 주현 선배에게 닿았다.
주현 선배는 시선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다음에 해도 되지 않을까?”
나를 향해 말하는 윤희.
“선배 파이팅!”
그 와중에 규원이는 팔을 높이 쳐들었다.
주현 선배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우물거렸고, 인고의 시간 끝에 그제야 입술을 움직였다.
“마, 만나서, 반갑, 습니다. 2학년 1반…… 김주현이라고 합니다.”
그런 뒤 깍듯하게 인사하자 모두들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기소개 한 번 듣기가 참 어렵구만.
“선배. 일단 입부 신청서 써야 하니까 저기 자리에 앉아주시겠어요?”
주현 선배는 내가 가리킨 자리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에 책장에 보관해둔 입부 신청서를 가져와서 주현 선배에게 내밀었다.
“여기 보시면 그냥 이름이랑 반, 연락처, 입부 희망란 표시만 하면 돼요.”
“응.”
잠시 기다리자 주현 선배가 기입을 끝낸 신청서를 내게 내밀었다.
“이건 내일 제가 담당선생님께 제출할게요.”
받아든 입부 신청서를 반듯하게 접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선배.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바로 시작하실래요?”
주현 선배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공부할 책 있으시죠?”
“응. 잠깐만…….”
주현 선배가 메고 있던 가방을 책상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라서 주현 선배의 가방을 쳐다봤다.
“헐. 벽돌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규원이의 물음.
“그, 그건 아니, 고.”
주현 선배가 문제집 세 권을 꺼냈다. 웬만한 책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두꺼운 녀석들이었다.
“이 정도, 하려고…….”
“선배. 앞으로 1시간만 더 하면 활동 끝인데 너무 많지 않나요? 무리해서 할 필요 없어요.”
저 정도 분량을 1시간 안에 공부하는 건 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주현 선배가 문제집 하나를 골라서 펼쳤다.
“괜, 찮아. 오늘, 정해진 분량, 을 다, 해야 하거든…….”
“아. 그렇군요.”
내심 기대가 되었다.
분량을 정해놓고 공부를 하는 것은, 공부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까.
“수능 대비인가.”
옆에서 윤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네.”
주현 선배를 대신하여 대답하는 나.
지아 누나가 주현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주현아. 이번 중간고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 우리 모두 성적이랑 등수 공개했거든.”
싱글벙글한 표정.
“그건 나중에 물어봐도 되지 않겠어요?”
자기소개도 그렇게나 힘들어했던 사람인데, 과연 성적 공개를 할 수 있을까.
“언니이! 저는 궁금해요오.”
얘는 벌써부터 친밀감을 드러내네.
“부담스럽게 만들지 마.”
윤희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치마안. 궁금하잖아.”
“그럼 네 성적부터 공개해.”
윤희가 받아친 말에 규원이는 합죽이가 되었다.
“거봐.”
윤희의 턱짓.
“아냐, 듣고 보니 그렇네. 역시 여기선 모범을 보여야겠지?”
규원이가 결심을 굳혔는지미간에 힘을 주었다.
“언니! 저는, 평균 43점에 101등이에요.”
한 번 공개를 한 덕분일까. 이번에는 우물쭈물하지 않고 발언했다.
이렇게 되니 나머지 멤버들도 성적을 공개하는 쪽으로 흐름이 이어졌다.
지아 누나, 윤희를 지나서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올 백에 전교 1등이에요.”
“영재야. 솔직히 말해 봐. 얘기할 때마다 뿌듯하지?”
누나의 눈빛이 마치 얄미운 동생을 바라보는 듯했다.
“좀, 그렇죠?”
“은근히 자만하는 게 더 얄밉단 말이야.”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지아 누나.
애정 어린(?) 눈길이 살짝 부담스러워서 나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일, 등?”
주현 선배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네. 근데 선배는 부담스러우면 얘기 안 해도 괜찮아요.”
배려하는 차원에서 내던졌다.
주현 선배가 시선을 내린 채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아, 아냐. 나도, 얘기할, 게.”
그러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작게 심호흡을 시작했다.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저렇게 보니까 흉부가 꽤……아니다. 나는 얼른 주현 선배에게서 시선을 뗐다.
“평균은, 93……. 전교, 8등.”
“와! 윤희를 제쳤네?”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이는 바로 규원이었다.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지아 누나의 반응을 보니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하긴, 지아 누나와 주현 선배가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겠네.
“그 정도면 혼자서도 충분히 잘할 것 같은데.”
스터디부의 2등 자리를 한 방에 내준 윤희가 내비친 의문에 주현 선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미, 미안……. 내가 들어오면, 불편…….”
“아, 아뇨. 그냥 혼잣말이니까.”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젓는 윤희.
“윤희 나빴네.”
규원이의 일침에 윤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벽시계를 보니 벌써 6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더 이상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나는 손뼉을 치고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공부 시작.
떠들썩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들 집중력을 한껏 발휘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돌렸다.
반원 형태로 배치된 책상 다섯 개.
아!
나는 그제야 이사장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멤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는 구조. 거기서 ‘우리’라는 동료 의식, 소속감이 더불어 생겨난다는 것을.
* * * *
8시를 약간 넘긴 시각에 집으로 돌아왔다.
슬기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기에 밥상부터 차렸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두부가 들어간 된장찌개, 콩나물무침, 신 김치.
무난한 구성이었다.
우리는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슬기가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더니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오빠. 이거 봐봐.”
방에서 나온 슬기가 종이를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렇게 가까이 대면 어떻게 보라는 거야?”
“앗. 그렇네.”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슬기.
나는 종이를 넘겨받았다. 5월 말에 있을 수련회에 관련한 공지였다.
경비는 5만원. 내 수학여행의 4분의 1 수준.
“벌써부터 설레고 막 그래. 얼마나 재밌을까.”
손을 모아 쥔 채 한껏 기대에 부푼 모습. 출발일은 3주 뒤였다.
“역시 카드 챙겨 가야겠지? 아니면 화투패라든가.”
“초딩이 무슨 화투야. 카드만 챙겨 가.”
얘가 큰일 날 소릴 하네.
“나 규칙 알고 있어. 친구들이 가르쳐줬다구.”
요즘 초딩들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그나저나 그걸 자랑이라고 떠벌리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선생님께 걸렸다간 그냥 안 끝날 텐데?”
“밤에 몰래 하면…….”
“그럼 걸려 봐.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그러자 슬기가 샐쭉한 얼굴을 했다.
“그럼 카드만…….”
빠르게 고집을 꺾는 슬기.
“근데 오빠네 학교는 뭐 없어?”
“우린 수련회 대신에 수학여행이 있어.”
“수학, 여행?”
“응.”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밥을 삼켰다. 슬기가 수학, 수학 되뇌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으으. 여행 가서도 수학 공부를? 난 싫어어.”
“그런 거 아냐. 그냥 여행하는 거라고. 거기서 무슨 공부를 하겠냐?”
“그치만 수학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잖아.”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착각할 만하지.
“잘 들어. 수학여행이란 건 말이지, 학생들이 평상시에 대하지 못한 곳에서, 자연 및 문화를 실지로 보고 들으며 지식을 넓히도록 한다는 의미야. 수학 공부가 아니라고.”
“아하! 그런 거구나. 난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한순간 자신의 미래를 걱정했나 보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아직 안 정해졌어. 경주, 부산, 서울 이렇게 셋 중에서 가장 표를 많이 얻은 곳으로 간대.”
“서울이 좋지 않아? 에바랜드.”
그러고 보니 규원이한테도 어디가 좋은지 물어볼 걸 그랬나?
“에바랜드……. 재밌긴 하겠다.”
“근데 오빠는 별로 기대가 안 되나 봐? 반응이 엄청 밋밋해.”
“정해진 게 없어서 그럴지도?”
사실은 참석 여부조차도 아직 고민하고 있으니까.
물론 이 얘기는 슬기에게 꺼내지 않았다.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
“밥 식겠다. 빨리 먹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슬기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나는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슬기와 함께 TV를 시청했다. 한동안 시험 걱정도 없으니까 이 정도 여유쯤은 부려도 괜찮겠지.
그런데 계속 앉아 있기만 하려니 왠지 좀이 쑤셨다.
잠깐 동네 한 바퀴만 돌고 올까?
때로는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좋으니까.
방에서 휴대폰을 챙겨 나왔다.
“오빠. 어디 가?”
“잠깐 산책.”
선선한 어조로 대꾸한 뒤 현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