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화-5월은 푸르다(2)
종이 울리면서 3교시 국어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이 나가자 모두들 각자의 방식대로 쉬는 시간을 즐겼다. 엎드려 자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혹은 스마트폰을 갖고 놀거나.
나는 항상 해왔던 대로 필기 노트를 펼쳐 놓았다.
누차 강조하지만 복습만큼 가장 효과적인 공부는 없다. 국어 수업 시간 때 필기한 내용을 빠르게 두 번 훑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윤희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집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
중간고사가 끝난 덕에 한껏 여유를 만끽하는 것이리라.
열린 창문 너머로 봄바람이 들어오자 커튼 자락이 가볍게 펄럭거렸다.
윤희의 긴 속눈썹도 바람결을 따라 살짝 흔들거렸다.
확실히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모습.
윤희가 입술 사이로 가만히 한숨을 내보내더니 이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뭔가 할 말 있는 거야?”
“아, 그냥. 언제나 보는 모습이구나 싶어서.”
생각이 거름망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튀어 나갔다.
쑥스러워져서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 참.”
윤희가 슬며시 웃고 나서 다시 시집을 응시했다. 나도 펼쳐 놓은 노트 페이지로 시선을 떨구었다.
“얘들아, 주목!”
전방에서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연이가 양손에 인쇄물을 든 채로 교탁에 서 있었다.
“이거 지금 나눠줄 건데, 우리 수학여행 관련한 프린트거든.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내일까지 가져와야 한대.”
설명을 마친 도연이가 분단 맨 앞자리에 앉은 애들에게 인쇄물을 돌렸다. 덕분에 나도 금세 받아볼 수 있었다.
인쇄물에는 행선지에 대한 설문 조사와 행선지에 따른 예상 경비, 참석 여부 등이 적혀 있었다.
행선지 후보로는 경주와 서울, 부산이 있었다. 경비는 최하 20만원 이상.
“20만원…….”
입으로 조그맣게 되뇌었다.
좀 부담스럽다.
엄마라면 무조건 보내주려고 하겠지만,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참석 여부란에는 불참 시 학교에 출석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자습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영재야.”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도연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교탁에 서 있었던 애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윤희도 어느새 시집이 아닌 도연이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너넨 어디가 좋을 것 같아?”
갈지 말지로 고민하는 중에 행선지에 대해 묻다니.
나는 침음을 내며 인쇄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딜 가나 괜찮을 것 같아서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가겠다고 마음먹는다는 가정 하에.
……경주는 다른 곳들보다 지루할 것 같으니 일단 패스.
“글쎄,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선택지가 좁혀지지 않아서 결국 무난한 답안을 내놓았다.
“김 빠지는 대답이네. 모두들 손꼽아 기다리던 수학여행인데.”
“어디든, 일단 간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잖아.”
학교라는 일상을 벗어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윤희 너는?”
도연이가 가만히 듣고만 있는 윤희에게 화살을 돌렸다.
윤희는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 살며시 책장을 덮었다.
“난, 경주에 가보고 싶어.”
곧바로 대답을 내놓은 윤희는 이유도 함께 댔다.
“박물관에 가고 싶어서.”
“그렇구나. 뭔가 딱 너답네.”
도연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무슨 의미야?”
“이상한 의미는 아니구, 평소에 지적이고 차분한 이미지니까 딱 너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한 거야.”
“지적, 인가…….”
윤희의 떨떠름해 했다.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연이의 시선이 내게로 되돌아왔다.
“사실 난 너도 경주라고 말할 줄 알았어.”
“뭐? 내가?”
나는 토끼 눈을 했다.
“너는 우리 반, 아니 제일고의 브레인이니까. 학구열이 강한 이미지이기도 하고.”
“너도 날 그런 존재로 여기는구나.”
“그럴 수밖에. 모의고사에 이어 이번 중간고사도 전교 1등이잖아.”
도연이의 말마따나 학구열 자체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교 공부에 한해서 하는 얘기.
놀 때는 그냥 다 잊고 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만약 가게 된다면, 경주보다는 서울에 있는 에바랜드가 더 즐거울 테지.
가만, 이렇게 따지고 보니 가장 괜찮은 행선지는 서울이 되는군?
“경주는 뭐랄까, 놀 거리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사실 나도 경주는 조금…….”
도연이가 조심스레 동조했다.
아무래도 여론은 경주를 배제하는 쪽으로 흘러갈 성 싶다.
“그래도 난 경주가 좋아.”
윤희는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 응원할게. 응원만.
“그런데 너네, 최근에 규원이랑 완전히 화해한 거지? 진짜 다행이야.”
도연이가 화제를 갈아치웠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우리 자리에 온 건가.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움직였다.
“싸운 채로 지내면 아무래도 서로 불편하니까. 그리고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고.”
도연이와 형준이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준 지아 누나가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냉전 상태를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반 애들도 은근히 불편해 했거든. 요즘 너희들이 전보다 친해진 것 같아서 다들 안도하더라. 비 온 뒤 땅이 더 굳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너 아니었음, 반 애들이 우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평생 모를 뻔했어.”
“이번 기회로 확실히 알았지? 그러니까 다음에는 싸움 같은 거 하지 마.”
도연이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공부는 어떨지 몰라도, 다들 심성이 착하다.
“최대한 노력할게.”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윤희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는 게 보였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아! 벌써 수업이야?”
도연이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맞다! 영재야.”
다시 이쪽으로 몸을 트는 도연이.
“방과 후에 담임선생님이 잠깐 교무실로 오랬어. 이거 알려주려 했는데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그럼 난 이만.”
멋쩍은 미소를 남긴 뒤 도연이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 * * *
종례가 끝나자마자 규원이가 우리들 자리로 다가와서 재촉했다.
“얘들아 빨리 가자.”
하지만 내게는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나는 부실 열쇠를 윤희에게 넘겨주었다.
“윤희야. 부실에 먼저 가 있어.”
“음? 영재, 너 오늘 못 오는 거야?”
사정을 모르는 규원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그래. 좀 있다 갈 거니까 놀지들 말고 공부해.”
“알겠어.”
윤희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혹시 몰라서 한 마디 덧붙였다.
“특히 규원이 잘 감시해 줘.”
“알고 있어. 걱정 마.”
“나 그래도 요샌 열심히 하는데…….”
규원이의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처음보단 나아졌지. 하지만 공부 습관이 완전히 잡히려면 아직은 더 힘내야 해.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나서 교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나서 미닫이문을 열었다. 선생님들이 퇴근 준비를 하는 풍경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담임선생님도 벗어놓은 양복 재킷을 걸치는 중이었다.
“선생님.”
“어, 영재야. 지금 바로 이사장실로 가면 된다.”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져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더니 선생님은 휘휘 손짓을 했다.
“이사장님 처음 뵙는 것도 아니잖아. 얼른 가 봐.”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에게 인사한 뒤 나는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이사장실에 가는 건 삼자대면 사건 이후 처음이군.
대체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하려고 걸까.
근심과 불안,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은 채 이사장실 앞에 섰다.
똑똑.
노크를 하자 곧이어 들어오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사장님은 업무용 책상에서 노트북과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왠지 올 때마다 일을 하고 있는 듯한데.
“잠시만 앉아있어라.”
“네.”
나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몇 번 와본 덕분인지 이젠 이 분위기도 꽤 익숙해졌다.
“휴우. 끝났구먼.”
이사장님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내 의향을 물었다.
“커피가 좋다 했지?”
“네.”
이사장님이 전기포트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물이 끓을 동안 종이컵 두 잔에 믹스 커피를 준비하는 이사장님.
산처럼 쌓인 녹차 티백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잠시 후 이사장님이 종이컵을 든 채 소파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종이컵을 받고 한 입 머금었다.
혀끝에 감도는 달짝지근한 맛. 역시 아메리카노보다 믹스커피지.
“요즘 스터디부는 좀 어떻니?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모양이던데.”
종이컵을 내려놓은 이사장님의 첫 마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윤희가 상담하러 갔었댔지.
“부원 한 명이랑 의견이 안 맞아서 크게 싸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화해해서 잘 지내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꽤 두루뭉술하게 얘기했지만 이사장님은 충분히 헤아려주는 기색이었다.
나는 스터디부의 근황에 대해 좀 더 얘기했다.
“최근에 2학년인 선배도 들어와서 총 4명이 됐어요.”
“부원 모집하느라 꽤 바쁘게 돌아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 다행히 성과가 있었구나.”
“……홍보 활동한 거 알고 계셨어요?”
그러자 이사장님이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모르고 있으면 안 되지.”
이사장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손녀가 화제가 되기도 했었고.”
“아……. 가면 말이죠?”
말하다 보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곤혹스러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러모로 추억으로 남은 사건.
사진을 남겨두지 못한 게 한이었다. 윤희가 눈치채지만 않았더라면, 휴대폰 앨범에 저장해 놓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나 또한 그 이유를 알고 있어서 가만히 고개를 움직였다.
지금의 윤희라면 적어도 가면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밝아졌어요.”
아직까지는 스터디부 멤버들과 가까워지고 있는 수준이지만.
“요새는 가끔 나와 몇 마디 대화도 나누곤 한단다. 윤희 스스로도 변하려고 마음먹은 것일 테지.”
“앞으로 계속 좋아질 거예요.”
“고맙구나.”
이사장님이 커피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커피를 마셨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 했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허허. 운도 실력이란다.”
이사장님이 테이블에 종이컵을 올려놓았다.
단순히 칭찬을 하기 위해서 꺼낸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종이컵을 매만지면서 이사장님의 눈빛을 관찰했다.
“이번에 우리 학교의 성적과 다른 학교 간의 성적을 비교해 보았다.”
비즈니스에 대한 얘기였다.
생각해 보니 그간 부원 모집과 부원들, 특히 이규원 가르치기에 매진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모의고사 전체 성적은 세 학교 중 꼴찌, 중간고사 성취도 종합 결과도 꼴찌……. 뭐, 매년 이런 상황이었긴 하다만.”
익숙하다는 듯 덤덤한 어조로 말한 이사장님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대로 1년을 보내게 된다면 내가 한성고에 편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사장님이 공들여 준비한 공학전환도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이해한다. 어쩌면 제대로 안 풀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고 본다.”
이사장님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나는 비장한 눈빛을 보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만 한다.
이사장님은 고개를 몇 차례 끄덕거린 뒤 소파에 상체를 기댔다.
“이번 수학여행은 어떻게 할 게냐?”
“글쎄요……. 참석할지 말지 고민 중이에요.”
“참석하도록 해. 경비가 부담스럽다면 개인적으로 내어줄 테니.”
“아, 아뇨! 괜찮아요! 엄마랑 상의하면 되거든요.”
재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러지.”
벽시계를 보니 어느새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챘는지 이사장님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은 모양이구나. 이만 가 보거라.”
나는 남아있던 커피를 마저 털어 넣었다.
“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이사장실을 나섰다.
* * * *
부실 앞에 도착했더니, 누군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교과서에 실릴 만큼 모범적인 단발머리에 둥근 빨간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이쪽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처진 눈매가 무척이나 순한 인상을 풍겼다.
명찰을 확인해 보았다.
김주현.
색깔이 노란색이니 2학년 선배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은데…….
주현 선배의 시선이 한 군데에 있지 못하고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저기요. 혹시…….”
말을 걸던 중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교내에 홍보물을 부착하러 다닐 때, 나에게서 홍보물 한 장을 받아 갔던 사람.
“저번에 저한테서 홍보물 받아 가셨죠?”
아랫배에 모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주현 선배가 한 차례 고개를 움직였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
뜸 들이는 주현 선배.
물론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이유야 뻔하지. 다만 저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을 따름이다.
잠시 기다린 끝에 주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입부……. 하고 싶어서.”
무척이나 반가운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