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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화 〉46화-5월은 푸르다(1) (46/131)



〈 46화 〉46화-5월은 푸르다(1)

어느새 우리들 곁을 성큼 찾아온 5월.
싱그러운 봄기운을 가득 품은 햇살과 포근한 날씨가 잠을 솔솔 불러오는 때.
교사 뒤편의 화단이 완연한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간신히 화해하고 나서 우리들은 중간고사가 끝날 때까지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내 생애 이렇게나 정신없이 보낸 시험 기간이 있었던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애써 보기도 하고.
감정이 상해서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 위해 공부를 제쳐두기도 하고.
여지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
주변의 도움과 서로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결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중간고사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감독 선생님이 나가자 애들이 하나둘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몬아미 볼펜을 필통에 집어넣으며 이번 시험도 꽤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러  봐온 내용들이 출제되었으니까.
나와 윤희, 규원이는 스터디부로 향했다. 모여서 가채점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아 누나는 먼저 부실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혼자 학년이 달라서 가채점을 하지는 못하지만.
누나가 다소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럴 땐 선배인 게 안 좋네. 그러니 너희들 점수나 구경해야겠어.”
지아 누나가 내 뒤에 다가왔다.
가채점을 하기에 앞서 우선  시험지를 채점해 보기로 했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결과는,  백.”
내 시험지를 내려다보면서 눈만 깜빡거리는 셋.
“미친. 사람인가.”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모를 규원이의 한 마디.
“진짜 소문대로였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는 지아 누나.
“역시나…….”
윤희는 그럴  알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니, 이건 가채점이니까 성적표랑 다르게 나올  있어요.”
“가채점이라도 올 백인 게 어디야. 게다가 마치 100점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뭔가 얄미운데.”
지아 누나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반만 떼 줬으면…….”
규원이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럼 나 50점밖에 안 되는데?”
“그만큼 내 점수에 붙이는 거지!”
규원이가 외쳤다. 헛소리니까 적당히 흘려듣기로 했다.
“역시, 이름값 하는구나. 영재.”
윤희는 짤막한 품평을 남겼다.

* * *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났다.
“자, 얘들아. 오늘 드디어 성적표가 나왔다.”
종례를 위해 교실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이 교탁 위에 종이뭉치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애들이 단체로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저걸 보여줬다간 엄마한테 죽을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할 걸 그랬다는 등의 후회와 두려움에 젖은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이도록 하고, 이름 불리면 나와서 받아 가.”
담임선생님이 가나다순으로 한 사람씩 호명했다. 나는 이름에 ㅎ자가 들어가니 당연히 마지막 순번이었다.
“성적표는 부모님께 꼭 보여드려야 된다. 알았지?”
“네에…….”
어딘가 기운이 빠진 대답들을 뒤로 한 채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섰다.
나는 성적표를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희와 규원이는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자.”
내 한 마디를 필두로 우리는 스터디부로 향했다.

* * * *

우리는 스터디부에 도착했다.
나는 고정석이나 다름없는 가운데 책상을 차지했고, 윤희는 왼쪽, 규원이는 오른쪽을 차지했다.
잠시 후 지아 누나도 부실에 도착했다. 누나의 자리는 규원이의 바로 옆자리.
오늘도 이렇게 4명이 모였다.
“너네도 오늘 성적표 나왔지?”
“응!”
지아 누나의 질문에 우렁차게 답하는 규원이.
“그럼 나 먼저 공개할까? 난 이번에 평균 75점 나왔어.”
“와! 언니 공부 되게 열심히 했네.”
“나쁘지 않네요.”
규원이는 감탄했고, 윤희는 덤덤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무난하다는 평을 내렸다.
“영재한테는 그렇게 보이겠다.”
지아 누나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아, 그게. 다른 뜻이 있는  아니라, 말 그대로 무난하다, 이런 거예요.”
“흑. 누나 상처받았어.”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누나.
이건 분명히 장난이다. 일부러 나를 곤란하게 해놓고서는 반응을 보려고 하는 것일 터.
하지만 진짜로, 조금은 상처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와, 영재 말넘심.”
옆에서 규원이가 그런 나의 생각을 부추겼다. 그리고 윤희마저 쐐기를 박았다.
“나라도 기분이  나쁠  같아.”
이래서 말 한 마디도 조심해서 내뱉어야 하는 거다.
“저기, 누나. 아까 그 말은, 미안해요.”
“진짜?”
지아 누나가 머리를 홱 틀고 이쪽을 응시했다.
“네.”
“진짜, 진짜?”
“네, 네.”
나는 고개를 수차례 주억거렸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줘.”
눈을 찡긋거리는 누나. 역시나 장난이었군.
“알겠어요. 어떤 거예요?”
누나가 검지로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건……. 좀 있다가?”
그러면서 배시시 웃었다.
1살이 더 많기 때문일까. 지아 누나는 시종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천성 자체가 밝고 활력 넘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왠지 불안한데요?”
“뭘까아?”
규원이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꽤나 기대하는 눈치였다. 제발 이상한 것만 안 시켰으면…….
“그보다 너희도 성적 공개해야지.”
지아 누나가 순식간에 화제를 돌렸다.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성적표를 꺼냈다.
우선 확인해 볼 것은 평균 점수와 석차.
 성적은 반 1등. 전교 1등. 평균 100점이었다. 가채점 결과대로 나와서 다행이네.
나는 윤희와 규원이를 번갈아 쳐다본 뒤 발표했다.
“내가 먼저 얘기할게. 나는 평균 100점에 전교 1등이야.”
부장으로서 선수를 쳤다. 지아 누나에게 진즉에 뺏기긴 했지만.
“허얼.”
저번 주에 가채점했을 때처럼 얼빠진 소릴 내는 규원이.
“가채점 결과랑 똑같네…….”
적잖이 놀라는 지아 누나.
“하긴, 스터디부 부장이니까.”
윤희는 납득하는 표정을 내비쳤다.
“그나저나 처음부터 너무 높은 점수를 말해버리면 뒷 순번 애들은 어떡하고.”
“옳소!”
지아 누나의 지적에 규원이가 곧바로 동조했다.
오랜 지기 아니랄까봐 호흡이 아주 그냥 척척 맞아떨어지네.
“난 평균 86점이야. 전교 27등.”
윤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하게 자신의 점수를 밝혔다.
“꽤 괜찮은데.”
윤희의 가채점 때 점수가 85점이었던 걸 생가갛면 약간의 운이 따라준 것 같다.
“근데 수학 점수가 조금 낮아. 수학만 좀 더  받으면 평균 90도 노려보겠는데.”
윤희의 어조가 아쉬움에 젖어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한 명뿐.
모두의 시선이 규원이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규원이가 성적표를 들고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으아아.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모의고사 성적표는 잘만 보여줘 놓고.”
“그거랑 이거랑은 달라!”
규원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반박했다.
뭐가 다르다는 얘기인지 감이  온다.  다 시험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을 텐데?
“뭐가 다른데?”
“모의고사는 진짜 대충 친 거고, 이건 그래도 공부를 한 거니까.”
“그럼 모의고사보단 잘 나왔겠네.”
“으음. 그렇긴 한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규원이.
지아 누나가 규원이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뭣하면 이 언니가 대신 발표해줄까?”
“아냐! 내가  거야.”
규원이가 세차게 도리질했다. 턱 아래까지 간신히 닿는 짧은 머리칼이 붕붕 휘날렸다.
“평균, 43점…….”
“가채점한 거랑 같네. 등수는?”
점수가 중요한 만큼 등수도 중요하다.
규원이가 잠시 우물쭈물 거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101등…….”
1학년 전교생이 113명이니까 하위 90~100% 라인이다. 뭐, 충분히 예상한 범주네.
평균 90점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스마트폰도 갖지 못할 것이고.
규원이는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100등 안에는 들어올  알았는데.”
“괜찮아! 다음엔 잘 나올 거야.”
지아 누나가 희망을 심어주었다.
“꾸준히 하다 보면 오르게 돼 있어.”
윤희의 응원  마디.
규원이가 토끼 눈을 한 채 윤희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윤희가 규원이를 돌아보았다.
“우와. 윤희가 나한테 저렇게 말해주는 날이 오다니……. 완전 감동.”
규원이가 코를 슥슥 문질렀다.
분위기상 나도  마디 곁들어야  듯했다.
“목표를 조금씩 올려서 잡으면 나중에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될 거야.”
“고마워. 근데 나, 스마트폰 생길  같아.”
“응?”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엄마가 수리비 내주기로 했거든.”
규원이가 V자 사인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공부는 계속 할 거니까 돈 워리.”
“그럼 다행이고.”
저번에 대판 싸운 걸 계기로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규원이에게는 규원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테지.
그때 지아 누나가 손뼉을 한 번 쳤다. 맑은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지아 누나에게 쏠렸다.
“우리 오늘 성적표도 나왔는데 뒤풀이 어때?”
“갑자기요?”
누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도 매일 공부만 했잖아. 하루쯤은 놀았으면 해서. 뭐, 부장님이 싫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난 대찬성!”
규원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퀴즈 예능에 참가한 방송인들도 저것보다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쉬는 건 나도 좋아.”
윤희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뒤풀이로 여론이 쏠린 상황. 여기서 반대되는 결정을 했다간 원성이 자자하겠지.
그리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런 날을 가져도 좋을 거란 생각도 들고.
“그럼, 그렇게 하자.”
 허가에 모두들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재야.”
누나가 불렀다.
“아까 미뤄뒀던 부탁, 지금 할게.”
“네.”
“과자랑 마실  들어야 하니까 따라와.”
강제 짐꾼행인가.
“대신 내가 살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 * *

우리 둘은 학교 근처에 위치한 편의점에 갔다. 나는 바구니를 든 채 지아 누나의 수행원이 되었다.
왈새우칩, 뿌링굴스, 꼰초, 개또레이, 육성사이다 등등.
두 바퀴 정도 돌자 바구니가 가득 찼다.
“2만원입니다.”
상당한 금액이 나왔다.
지아 누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누나에게서 얼핏 형준이의 모습을 엿본 순간이었다.
우리는 편의점을 나섰다.
“영재야. 음료수 들어.”
1,5리터 페트만 3병. 나는 누나가 시킨 대로 페트병을 양 옆구리에 끼웠다. 지아 누나는 과자가 가득 담긴 봉지를 들었다.
우리는 완만한 경사로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날씨 좋다아.”
지아 누나가 턱을 치켜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녁 6시를 넘겼는데도 태양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차례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몽실몽실한 쌘구름 한 점이 바람을 타고 서서히 유영했다.
저녁 무렵의 평화로운 풍경.
“그러게요.”
맞장구를 쳤다.
학교 정문이 가까워졌을  앞장 서던 지아 누나가 걸음을 멈췄다.
“고마워.”
뜬금없는 감사 인사.
“갑자기요?”
나 또한 발걸음을 세웠다.
누나가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키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눈높이가 맞았다.
“규원이를 부원으로 받아준 거 말야.”
가볍게 눈웃음을 짓는 지아 누나.
사실 누나가 고마워할 정도의 일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규원이의 입부를 거절해왔으니까.
“그건 그냥 내기에서 져서 그랬을 뿐이에요. 제가 먼저 제안한 내기였으니까. 그러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이자, 이런 마인드였죠.”
“그게 아냐.”
누나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규원이가 그렇게 민폐를 끼치고 실망을 안겼는데도 다시 부원으로 받아들여 줘서.”
그 얘기를 하려던 거였구나.
나는 줄곧 생각하고 있던 것을 털어놓았다.
“규원이가 빠진 부실 풍경이 상상이  가서 그랬어요.”
“부원을 아끼는 부장이네. 좋아.”
그렇게 직접 들으니 좀 쑥스러웠다.
“엄청 신경 쓰고 있었군요.”
“많이 걱정했었지.”
하긴, 우리들 싸움에 중재자역을 자처했을 정도면 말 다한 셈이겠지.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제가 해야  것 같아요. 누나가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규원이와 화해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부원으로서 들어와 주기까지 했고.”
“기브 앤 테이크 아니겠어?”
“듣고 보니 그렇네요.”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오늘은 맘껏 즐기자.”
누나가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좋아요.”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니까 영재야. 이것 좀 들어 줘.”
갑자기 나에게 봉지를 건네는 지아 누나.
“네? 저 손이 없는데요.”
“손가락에 걸어줄게. 이리 대.”
지아 누나가 비어있는 손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것만 해도 무겁다구요.”
나는 울상을 지었다.
“아무튼 와 봐.”
짐꾼으로 쓴다더니 제대로 부려 먹을 셈인가 보다. 뭐, 오늘의 물주는 누나니까 최대한 따르는 수밖에.
나는 지아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지아 누나는 뜻밖의 행동을 취했다.
내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페트병 하나를 뺏어서 자신이  것이다.
“어때?  낫지?”
“어, 그래도 충분히 들 수 있는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
싱긋 웃어 보인  누나가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뒤를 쫓아 발걸음을 뗐다.
오늘 뒤풀이는 정말로 재밌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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