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5화-비 온 뒤 땅이 굳는다
금요일 밤, 나는 규원이와 1시간 넘게 통화했다.
통화 도중에 규원이는 내게 사과를 했고, 윤희와 마주 앉아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이 정도면 꽤 진전이 있었던 셈.
나는 이 희소식을 지아 누나와 윤희에게 알려주었고, 다음 날 지아 누나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약속 잡았어 일요일 1시에 이데야 커피로 오면 돼~ 애들한테도 따로 깨톡 넣어뒀어」
싸운 지 어느덧 일주일째.
우리는 이제야 서로를 마주할 준비를 갖추었다.
* * * *
그리고 대망의 일요일이 찾아왔다.
나는 한참을 걸어서 이데야 커피점에 도착했고, 구석진 자리에서 손을 흔드는 지아 누나를 발견했다. 누나의 옆자리는 규원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지아 누나, 안녕하세요.”
“약간 일찍 왔네.”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머금은 채 화답했다. 규원이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어색하게 손만 들어 올렸다.
나 또한 아직 어색함이 남아 있어서 손만 가볍게 흔들었다.
지아 누나가 평상시와 다름 없는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윤희는 언제 온대?”
“글, 쎄요…….”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1시까지는 다소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마 시간 맞춰서 올 것 같아요.”
자리에 바로 앉으려니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주문을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카운터로 향했다. 나의 선택은 가장 싼 아메리카노.
음료를 받았을 때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윤희의 모습을 발견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정확히 1시였다.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응. 안녕.”
담담한 표정으로 응해주는 윤희. 그러고는 곧바로 음료 주문부터 했다.
우리는 각자 음료를 손에 든 채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한 테이블에 모이게 되었다.
“왔구나. 안녕?”
지아 누나의 인사를 받은 윤희가 목례를 했다. 그런 뒤 내 옆에 앉았는데, 규원이와 정확히 서로를 마주 보는 구도가 되었다.
“…….”
“…….”
윤희와 규원이는 서로를 향해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지아 누나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빨대를 입에 물었다. 윤희는 빨대로 음료를 저었고, 규원이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주일이라는 시간이 쌓아 올린 벽은 생각보다 크고 튼튼한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깰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지, 지아 누나가 부러 가벼운 톤으로 한 마디 했다.
“음. 우리, 명상하러 온 거 아니잖아.”
하지만 셋 중 누구도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묵언 수행 시간.
이대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주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적임자일까?
답은 금세 나왔다. 바로 스터디부의 부장인 나뿐.
“이규원.”
호명하자 규원이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시선이 내 얼굴을 향했다가 곧 아래로 떨어졌다.
금요일 밤에 통화했을 때도 조심스러워하더니만.
아예 대면한 채 대화를 하려니 더 어색한 모양이었다.
“중간고사 준비는 잘하고 있어?”
근황 얘기부터 꺼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밑 준비를 다져둘 생각으로.
“그냥. 그럭저럭…….”
제대로 안 하고 있는 듯한데. 역시 혼자서는 아직 무리인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
뭔가 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사실 말야. 그때 싸우고 나서 다시 생각해 봤어.”
먼저 본론을 입에 담은 이는 규원이였다.
“따지고 보면 전부 내 공부를 위한 일들이었는데, 내가 너무 게을렀고 대충대충 해왔어. 그때 네가 지적한 대로……. 근데 내 딴에는 그 정도만 해도 나름 최선을 다한 거다, 열심히 한 거다, 그렇게 여겨왔어.왜냐면 몇 시간 내내 너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그것만 해도 충분한 거라고 생각했거든. 여태 그 정도로 공부를 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규원이가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준 과제를 대충한 것도 모자라서 멋대로 약속을 깨버린 일도 여러 번이었고……. 그냥 전부, 내 욕심이었어. 아니, 보상받고 싶었다고 해야 하려나. 네 수업을 열심히 들었으니까 오늘은 놀아도 되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
우리 셋은 침묵을 유지했고, 규원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거야. 내가 한 ‘노력’이 사실은 전혀 노력이 아니었다는 거. 그냥 내 착각이었다는 거. 언니랑 한 약속은 다음으로 미룰 수 있었을 거야. 근데도 나는 기어이 그 약속을 지키려고 했어. 노는 거니까. 공부보다 노는 게 더 좋으니까. 그래서 나중엔 거짓말까지 해버리고…….”
“다음부턴 그런 거짓말 안 하면 되니까.”
지아 누나의 한 마디에 규원이가 고개를 두 번 주억거렸다.
“너는 가족 나들이 약속도 미룬 채 공부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았어. 그리고 나를 그렇게까지 믿어주는 줄도 전혀 몰랐고.”
“일부러 티 내지 않았으니까.”
믿고 있다는 걸 드러내면 거기에 기대서 나태해질까 봐.
규원이가 나에게 시선을 한 번 보냈다.
“사실, 한편으로는 그런 얘기를 한 번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치만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그런 얘기도 해줬겠지? 그래. 결국 다 내가 자초한 일이야. 내 잘못.”
내 잘못.
마지막 세 글자에 악센트를 실어 넣는 규원이. 양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차분한 어조와 눈빛이었기에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규원이의 말소리가 더 이어졌다.
“근데 난 또 그 순간에 욱해서는 못할 말이나 하고……. 심지어 말리려고 나선 윤희의 멱살까지 잡아버리고…….”
가만히 얘기를 경청하고 있던 윤희가 입술을 오므렸다.
규원이는 자신의 오른쪽 뺨에 손을 올렸다. 그때 윤희에게 맞았던 자리.
“한 대 맞고 나니까 말이 안 나오더라구. 아파서. 서럽기도 했고. 우리 엄마 아빠한테도 맞은 적 없었는데.”
규원이가 눈을 들어 윤희를 보았다.
“그렇게 안 하면 너를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거든.”
규원이의 시선을 피하는 윤희.
나는 알고 있다. 저 말이 반 정도는 거짓말이라는 걸.
며칠 전 윤희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알지만……. 그럼에도 미처 몰랐던 일면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게 두려워. 그 순간에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런 나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윤희는 그때 그런 행동을 한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심리를 감추려고 하는 것일 테고.
“꼭, 때려야만 했어?”
“…….”
말을 잃은 윤희를 응시하던 규원이의 입술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시선과 시선의 대치.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다름 아닌 윤희였다.
“……아냐. 이런 말을 하려고 온 게 아냐.”
“영재한테 들었어. 너도 화해하고 싶다면서.”
윤희가 묵직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나도 화해하고 싶어. 내가 잘못한 게 많으니까. 저번에 헛소문 퍼뜨린 일이랑 네 멱살 잡았던 것도. 그치만, 가라앉히라고 때렸다는 건 좀, 상처네.”
“그건…….”
윤희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너. 진짜로 화해하고 싶은 거야?”
나는 규원이의 옆모습을 보았다. 실망 어린 눈빛.
“영재가 나오라고 해서 나온 거야?”
추가타가 이어졌다.
나는 계속 상황을 주시했다. 지금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어줘서는 안 되니까.
윤희가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시선을 들고, 규원이와 눈을 마주했다.
“내 의지로 나왔어.”
간결하고도 단호한 한 마디.
“그럼 말해 줘. 왜 때렸는지.”
규원이의 어조도 강했다.
윤희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 성격 급하고 촐랑거리는 규원이가 이번만큼은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두 사람에게 번갈아 보던 지아 누나가 조용히 음료를 마셨다.
침묵이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고, 나는 윤희의 이름을 발음했다.
“윤희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말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윤희가 내게 눈길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응원의 눈빛을 담아서.
윤희가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다시 눈을 떴다.
천천히, 입술이 벌어졌다.
“그 순간에, 화가 치솟았어. 분위기에 휩쓸렸던 건지, 말을 하면서 그랬는지, 아니면, 멱살을 잡혀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장님이 벽을 짚으며 한 걸음씩 떼는 양 단어를 이어나가는 윤희.
“보통 같았으면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을 텐데 그땐, 그러질 못했어. 깨달았을 땐, 이미 손이 나간 뒤였으니까. 순간적인 충동,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
감춰져 있던 내밀한 얘기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난 원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거든. 그때 일은…… 나에게도 충격이었어.”
“그렇구나. 화가 났으니까. 단지 그 이유구나.”
윤희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 규원이.
그러더니 규원이가 턱을 괴고 콧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그런 이유가 나아.”
“그게 무슨?”
윤희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나한테 화가 나서 그랬다구. 가라앉혀야 되느니 뭐니 하는 거, 다 가식으로밖에 안 들렸다구.”
규원이가 슬며시 미소를 그렸다. 이 자리에 온 뒤 처음으로 보여주는 웃음.
내내 굳어있던 지아 누나의 표정이 풀렸다.
긴장하고 있던 윤희도 한시름 놓은 모습이었다.
결국 규원이가 원한 것 역시 진심이었다.
윤희가 어렵게 털어놓은 진심이 규원이의 응어리를 녹게 만든 셈이었다.
“영재야. 정말로 미안해.”
규원이가 이쪽을 향해 머리를 한껏 숙였다.
그동안 해왔던 장난스런 사과가 아닌, 진심 어린 사과.
“그래. 그땐 나도 잘못했어. 좀 더 좋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아냐. 되돌아보니까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규원이의 짙은 눈썹이 곡선을 그렸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서 윤희를 바라보는 규원이.
“윤희야. 그동안 했던 짓들, 전부 다 사과할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머리를 숙였다.
“그때 때린 거, 진짜로 후회하고 있어. 미안해.”
“그랬구나. 그럼 됐어.”
그제야 짓눌려 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지아 언니. 다음엔 절대로 안 그럴게.”
“너, 다음에 그러면 진짜 혼날 줄 알아.”
지아 누나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응…….”
마냥 친한 사이인 줄 알았더니 상하 관계가 확실히 잡혀있군.
“누나. 정말 고마워요.”
“아냐. 그보다 잘 화해해서 다행이야. 그리고 나는,”
지아 누나가 검지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상당한 볼륨감이……아, 아니다. 물러가라, 악귀야!
“스터디부의 일원이 됐고.”
지아 누나가 싱글벙글 웃었다.
“환영합니다!”
목소리를 키우자 주변의 시선이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뭐? 언니도 들어온다고?”
유일하게 내막을 모르고 있던 규원이만 얼빠진 소릴 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누나의 목소리에 비음이 섞여들었다. 귀가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
“헐. 실화야?”
“응.”
윤희도 거들었다.
“그래도 뭐, 언니까지 들어오면 나야 좋지. 후후.”
규원이답게 갑작스러운 얘기도 쉽게 받아들였다. 역시나 보통 적응력이 아니로군.
소소한 대화 몇 마디에, 그간 우릴 괴롭혀왔던 압박감과 답답함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갑자기 타는 듯이 갈증이 느껴졌다.
나는 빨대를 빼내고 아메리카노를 후루룩 들이켰다.
갈증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모두들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푸하! 좀 살 것 같다.”
규원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마디 내뱉었다.
“잠깐. 생각해 보니까 이대로 끝내기엔 조금 억울한데?”
“뭐가?”
되묻자 규원이가 나를 돌아보더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맞은 건 갚아줘야지!”
그러면서 윤희를 쳐다보는 규원이.
“……여기서?”
“응.”
눈에 띄게 당화한 윤희를 향해 규원이가 과장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뒤 검지로 윤희를 정확히 겨누었다.
“심윤희. 일어서.”
“아. 으, 응.”
윤희가 머뭇거리다가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이런 구도는 꽤 신선한데.
이윽고 규원이도자리에서 일어섰다.
“뺨 대. 이걸로 완전히 풀 거니까.”
윤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서.”
규원이가 묘하게 우쭐거리는 얼굴로 턱짓을 했다. 윤희가 고개를 약간 앞으로 내밀었는데, 긴장했는지 미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 그럼 간다?”
규원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지아 누나가 흥미진진한 눈을 했다.
설마, 진짜로 때리려는 건가?
규원이 성격이라면 그럴 것 같기도 하고.
규원이의 오른손이 휘둘러졌다.
아니, 윤희의 뺨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윤희가 실눈을 떴다.
규원이의 입꼬리가 귓불까지 올라갔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말야, 안 때려도 될 것 같아. 나는 너처럼 폭력주의자가 아니거든.”
“폭력, 주의자?”
자다가 봉창이라도 두들겨 맞은 얼굴을 하는 윤희.
“왜? 틀렸어?”
“아…….”
윤희가 입을 다물었다.
규원이가 처음으로윤희를 이긴 날이로군.
“그치만 다음엔 꼭 때려줄 거야.”
규원이가 씨익 웃었다.
“좋아. 하지만 다음엔 쉽게 안 대줄 거니까.”
윤희도 미소를 지었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악수를 했다.
“후후. 멋진 우정인 걸.”
지아 누나가 즐거워하며 웃었다. 나는 규원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규원아.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
“응!”
규원이가 손을 맞잡았다.
스터디드림은 그렇게 멤버 4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