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화-열탕을 지나 냉탕(3)
15분을 이동한 끝에 목적지인 편의점에 도착했다. 형준이는 편의점 바깥에 놓인 테이블 중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야! 일루 와!”
녀석이 팔을 높이 든 채 손짓을 했고,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전력 질주했다. 덕분에 형준이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무릎을 짚고 호흡을 정리하는 동안 형준이가 말을 걸었다.
“와. 날 위해서 뛰어온 거냐? 감동…….”
“무슨. 후딱 끝내고 집 가려고 그랬던 거지.”
“헐. 내 감동 물어내라. 100만원.”
나는 녀석이 내민 오른손을 탁 쳐내며 씨익 웃었다.
“싫은데?”
“자식. 친구한테 너무하네.”
“너무하긴. 이거야 말로 진정한 친구 아니겠냐?”
실실 웃으며 형준이를 바라보았다.
“나 기분 상했으니까 오늘은 네가 사라.”
“어? 뭐라고?”
형준이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꼈다. 자기 뜻대로 안 돼서 삐친 어린애처럼.
덩치도 큰 놈이 저러고 있으니, 솔직히 좀 징그러웠다.
“아, 알았으니까 팔짱부터 풀어. 안 어울리게 시리.”
“오오. 진짜로?”
형준에 딴에야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을 테지.
하지만 이럴 때 내가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잠깐만. 잔고 확인 좀 하고.”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리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야.”
“왜?”
형준이가 턱짓을 했다.
“휴대폰밖에 없어.”
오른손에 든 휴대폰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한턱 내겠다고 해놓자마자 이 꼴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형준이도 어이가 없었는지 가볍게 실소했다.
“그걸 자랑이라고 꺼내 놓냐? 어휴, 됐어. 내가 사고 말지.”
시원스레 내뱉은 형준이가 간이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함께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고, 졸지마 캔커피 2캔과 포까칩 2봉지를 골랐다.
“이 시간에 감자칩 두 개가 들어가냐?”
참고로 지금은 11시 반이다.
“원래는 이런 거 대신 컵라면 먹는데? 가끔 내키면 밥도 말고.”
역시 먹성 하난 대단한 녀석이군.
계산을 하고 나서 우리는 아까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잘 먹을게.”
내가 캔커피를 따는 사이 형준이는 포까칩 두 봉지를 한꺼번에 뜯어서 펼쳤다.
“역시나 질소가 반…….”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중얼거리는 형준이.
“이건 진짜 돈 아까운데?”
“그래도 맛은 있으니 참아준다.”
형준이는 감자칩 한 조각을 한 입에 삼킨 뒤, 커피캔을 따고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감자칩에서 작은 조각만 골라서 먹었다.
“너네 중간고사 언제야?”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형준이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캔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우리 학교보다 하루 빠르구만.”
형준이는 고개를 몇 번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나저나 벌써 감자칩 양이 반이나 줄어든 거 실화냐.
“요새 공부하느라 정신없겠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빡세게 하느라 죽을 것 같다야. 여기 애들 공부하는 꼴 보면 귀신도 놀라서 달아날 걸?”
형준이가 쥐고 있던 캔을 세게 내려놓았다. 태앵, 하고 빈 캔 특유의 맑은 소리가 울렸다.
“집 들어가면 4시까지 공부하고 자야지. 너도 그러지 않냐?”
형준이가 이쪽으로 토스했다.
“오늘은 3시까지만 하게.”
“공부한 시간으로만 성적 매기면 내가 너보다 잘 나와야 할 텐데 말이지.”
“글쎄, 그걸로만 따져도 내가 너보다 더 높을 걸?”
“아, 맞네.”
쉽사리 백기를 들어 올린 형준이.
“근데 오늘은 웬일로 보자고 한 거야?”
물어보자 형준이가 대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맨날 학교, 학원, 집 반복하니까 무료해서. 가끔은 다른 자극도 줘야지.”
대답을 듣는 동안에 질문 거리가 떠올랐다.
“근데 너, 그때 이후로 어떻게 됐어?”
“그때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가출했을 때 말야.”
“아아, 그거.”
형준이가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날로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었지.”
“진짜로?”
“아니.”
빠른 부정.
“아, 뭐야아. 진짠 줄 알았네.”
내 반응에 형준이가 피식거렸다.
“사실 그날 밤에 바로 엄마랑 둘이서 얘기를 나눴지. 거의 한 시간 정도? 근데 그렇게 하니까 좀 알겠더라고.”
“뭘?”
형준이가 자신의 턱살을 주물러대며 신음했다.
“엄마만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니라는 것? 뭐, 아무튼 그랬어.”
“설명이 엄청 생략된 거 같은데.”
내가 지적하자 형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삼백안을 저렇게 뜨니까 인상이 덜 나빠 보였다.
“다짜고짜 수집한 만화책 버리겠다고 한 엄마도 나빴지만, 가출한 나도 못할 짓 한 거니까. 더구나 스타박스 앞에서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고……. 결국 서로에게 감정 상할 짓을 한 거였더라고. 그걸 다 터놓고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많이 풀렸지.”
“다행히 잘 해결했네.”
“뭐, 이번 중간고사 때는 만화책이고 뭐고 일체 금지 상태지만.”
“당연히 그래야지. 성적은 중요하니까.”
납득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형준이가 못마땅한 눈길을 쏘았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응.”
명쾌하게 응답하자 녀석이 짧게 한숨 쉬었다.
“하아. 그래도 중간고사만 끝나면 터치 안 한다고 했으니까 그거 생각하면서 버텨야지.”
형준이가 굴러다니는 감자칩 몇 조각을 빠른 속도로 흡입했다. 그리고 나는 남아있던 캔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근데 스터디부는 요새 어떠냐? 저번에는 너랑 여자애 한 명뿐이라면서.”
“어째 만날 때마다 스터디부 얘기를 꺼내네?”
“건전한 남고생으로서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걸랑. 그래서 애들 더 들어왔냐? 들어온 애들은 어떤데?”
“거의 뭐 발정기인데.”
“노노노.”
형준이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을 갖듯, 남자도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이쯤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넌 어차피 학교가 달라서 못 만나잖아.”
“아, 또 깬다. 한영재 아니랄까 봐. 형아가 지금 네 얘기라도 들으면서 대리만족하려는 거잖아. 엉? 그래서 요새 무슨 일 없었어?”
“……그럴 만한 일 없어.”
“내가 들어보기 전에는 모르지.”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형준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호라. 뭔가 있긴 했나 보구만. 뭐, 고민 거리라도 있나 봐? 내가 특별히 들어줄 테니 어서 말해 봐.”
“사실은 말야, 최근에 크게 싸웠거든.”
그렇게 서두를 뗀 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부원으로 이규원이 들어온 것.
이규원의 불성실한 태도에 화가 났던 일들.
결국 그것 때문에 대판 싸우게 된 일.
“아직 화해는 안 했나 보구만.”
얘기를 잠자코 듣던 형준이가 되물었다.
나는 수긍의 몸짓을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달까, 아무래도 잘못은 그쪽이 더 크니까. 일단 친한 선배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긴 한데…….”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그거지? 화해는 꼭 해야겠는데 저쪽의 잘못이 더 크니까 먼저 숙이기엔 그림이 좀 뭐하다, 이거잖아.”
역시 친구 아니랄까 봐.
“화해하고 싶다며? 근데 그렇게 자존심 세울 필요가 있나?”
“네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너도 알고 있네. 자존심인 거.”
거듭되는 지적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놈아. 그런 생각하면 평생 화해 못해. 나도 가출했을 때만 해도 내 잘못보단 엄마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더니 형준이가 내 어깨에 큼직한 손을 턱, 올렸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질 게 아니라 어떻게 잘 화해할지나 생각하라고.”
주변에 있는 모두가 비슷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화해하고 싶다고 해놓고 또 잘못의 경중을 따질 생각이나 하고.
어리석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심’인데 말이다.
* * * *
다음날, 종례시간이 끝나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5교시 쉬는 시간 중에 받은 메시지였다. 발신인은 지아 누나.
「영재야~ 수업끝나면 뒤편 화단으로 와줘 혼자만 와야 해!」
아무래도 중요한 얘기인 모양이었다.
“윤희야.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먼저 부실에 가 있어.”
내가 건넨 부실 열쇠를 받아든 윤희.
“혹시 지아 선배?”
역시 눈치 9단!
나는 그렇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은 내가 챙겨 놓을게.”
“고마워.”
윤희에게 가방을 맡겨 놓고, 곧장 화단으로 향했다.
지아 누나는 물레방아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아 누나.”
이름을 부르자 지아 누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영재야.”
나는 지아 누나에게 달려갔다.
누나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영재야. 생각보다 일이 좀, 어렵게 됐어.”
활력 넘치던 평소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규원이가 너랑은 화해하고 싶어 하는데, 심윤희 걔랑은 얼굴도 마주 보기 싫다고 그래서.”
“진짜요?”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너한테는 얘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
“봐도, 되나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니 깨톡 채팅창이 띄워져 있었다.
“응. 아직 서로 대면하기에는 껄끄럽잖아.”
“그건, 그렇죠…….”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한눈에 봐도 채팅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이렇게 되면 사적인 얘기도 다 보게 되는 셈인데…….”
내가 머뭇거리자 지아 누나가 괜찮다고 했다.
“여고생들의 리얼한 토크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구? 게다가 저번에도 한 번 보여줬으니까.”
누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은 분명 중요한 국면이다. 누구든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와중에 누나가 던진 농담은 경직된 어깨를 다소나마 풀리게 해 주었다.
“확실히 그렇네요.”
나는 채팅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시험이 끝나면 어디에 놀러 가자, 어디에 코인노래방이 새로 생겼더라 등등의 일상적인 대화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들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규원이가 지아 누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내용.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는 누나의 채팅.
누나가 자신을 핑계거리로 삼은 일에 대한 질책도 길게 적혀 있었다.
“누나에게는 사과했던가요?”
“응. 월요일에 따로 만나서 사과받았어.”
역시 절친한 사이라 이거로군.
따지고 보면 나와 윤희, 규원이의 친분은 오래되지 않았다.
스터디부 입부로 따졌을 때는 3주 남짓. 같은 반 친구 사이로도 2달이 채 안 된다.
나는 채팅창의 스크롤을 계속해서 내렸다.
한참을 내려가자 지아 누나가 말한 내용이 나왔다.
뀨원 : 언니 영재한테는 용서를 구하는 게 맞는 거 가튼데, 윤희랑은 그닥 말 섞고 싶지 않 아 그때 맞은거 생각하면.. 얼굴 보기도 싫어져
“이러면 곤란한데…….”
신음이 절로 나왔다. 나와 규원이만 화해한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윤희 또한 당사자니까.
싸운 사람들 전부가 화해해야만 이 상황이 해결된다.
무엇보다 나는 규원이를 스터디부에 다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인원을 채워야 한다거나, 지아 누나가 같이 입부하기 때문에라든가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규원이가 이래저래 고생을 많이 시켰고 귀찮게 하기도 했지만, 규원이가 없는 스터디부는 어딘가 허전하니까.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규원이뿐이다.
결국 어제 형준이가 말한 대로다.
잘못의 경중을 재고, 알량한 자존심을 붙들고 있다간 평생 화해하지 못한다.
나는 누나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내가 아무리 해봐도 결국 제3자 입장이라서.”
“아녜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것만 해도 참 고마운 걸요.”
하지만 마냥 지아 누나에게만 맡겨두는 건 역시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건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러니 먼저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 * * *
스터디부에 돌아왔더니 윤희는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 옆에 앉자마자 윤희가 말을 걸어왔다.
“어땠어?”
“음, 그냥…….”
이걸 말해도 될지 어떨지.
“문제라도 생긴 거야?”
차분한 어조로 묻는 윤희.
고개를 돌려서 윤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윤희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미리 얘기하는데, 너무 상처받지는 마.”
“알겠어.”
윤희가 의연한 눈빛을 한 채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지아 누나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윤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렇게까지 거부 반응을 보이면 곤란해지네…….”
미리 경고했어도 타격이 오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어떡하지.”
윤희가 손으로 턱을 받쳐 든 채 중얼거렸다.
가장 좋은 방법은 윤희가 규원이에게 연락을 해서 얘기를 나누는 것.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규원이가 연락을 무시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오늘 밤에 내가 설득할게.”
확고한 어조로 선언하자 윤희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자꾸 너에게만 맡기는 꼴이 돼 버리네. 미안해.”
“신경 쓰지 마. 이래뵈도 스터디부 부장이잖아?”
활짝 웃어 보이자 윤희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확신을 더해 주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방에서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뚫어져라 쳐다만 봤다.
정확하게는 이규원 이름 세 글자를.
잘 설득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불안감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 끌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연결음.
[여보세요.]
규원이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