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38화-You Only Live Once(7) (38/131)



〈 38화 〉38화-You Only Live Once(7)

우리 셋은 이번 주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터디부 모임을 가졌다.
윤희는 혼자서도 공부를 잘 해나갔지만, 규원이는 여전히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가르쳐야 했다.
덕분에 나는 모자란 공부 시간을 집에서 최대한 메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중간고사까지는 앞으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요 며칠 하루에 4시간밖에  잔 탓에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많이 잤다. 그래도 엄마가 출근하는 9시 반에는 이부자리에서 나와서 엄마를 배웅했다.
슬기는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야, 한슬기. 일어나.”
“으으음.”
어깨를 거칠게 흔들자 슬기는 이부자리에서 뒤척거리며 칭얼거렸다.
“밥 먹어야지.”
그제야 슬기가 부스스 일어났다.
오늘 메뉴는 된장국과 김치, 두부구이였다. 이만하면 진수성찬이지.
자리에 앉아서도 비몽사몽하던 슬기가 밥상을 대하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슬기에게 뒷정리를 맡겼다.
저번 주에 이어 오늘도 주말 스터디 모임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스타박스도, 시립도서관도 아닌 부실에서 하기로 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의무적으로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최상의 장소였다.
그래도 밖에서 점심 한 끼는 먹어야겠지…….. 동전 지갑의 잔고를 살펴보니 3,270원뿐이다.
좋아, 오늘 점심은 컵라면 하나다.
공부하러 가는 거니까 옷은 있는 걸로 대충 걸치고, 가방을 챙겼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휴대폰의 전화번호부 목록을 살펴보았다.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사이 전화번호부 목록에 새로이 추가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심윤희, 정도연, 정지아.
특히 지아 누나의 번호를 받았을 때는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지.
아직은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은 없지만…….
그리고  다른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그 이름은 바로 이규원.
저번 주 일요일에 급작스럽게 모임에 불참하고, 답안지를 보며 과제를 해오는 등의 황당무계한 짓을 벌인 녀석.
그리고 주말 스터디 활동이 생겨나도록  장본인.
최근에는 수업 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뭐, 솔직히 이번 중간고사에서 평균 90점을 받겠다는 것부터가 이미 글러 먹은 목표이긴 하지.
나는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앉은뱅이 의자 등받이에 체중을 실었다. 문득 책꽂이에 꽂아둔 스터디부 홍보물이 눈에 띄었다.
지난번에 교내 게시판에서 수거해온 것들인데, 이면지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 내 방에 쟁여놓았다. 지구와 나무를 지키기 위해 이면지를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는 재활용 정신을 발휘한 것!
나는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는 홍보물  장을 꺼냈다.

헤매지 말아요.
망설이지 말아요.
우리 함께 나아가요.

윤희랑 이거 만드느라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지.
겨우 한 달밖에 안  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윤희는 이걸 쓸 때 어느 부분에 의미를 두고 싶어 했을까. 물어보면 쑥스러워 하려나?
홍보물을 제자리에 되돌려놓고 시간이 12시가 다 되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약속 장소로 출발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 * * *

황사를 걱정하는 슬기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현관을 나섰다. 황사와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려진 것 치고는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말에 학교를 나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평소에 하지 않는 일을 행할 때 느끼는 두근거림이라고나 할까.
머리로는 별것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한참을 걸어서 스터디부 부실에 도착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12시 40분.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래, 이름뿐인 부장이라고 해도 모범을 보여야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는 열쇠로 부실 문을 열었다. 그런 뒤 늘 앉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문을 투과하여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이 마룻바닥에 드러눕고 있었다.
문제집과 교재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부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풍경.
영어 듣기용 CD플레이어가 자리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깔끔했던 화이트 보드판에는 규원이가 해놓은 낙서가.
윤희가 자신만 쓰려고 갖다놓은 필기구 보관통까지.
사소한 변화들이지만 각자의 흔적을 나타내는 징표 같았다.
혼자 있는 지금이 조금은 허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혼자서 부실을 쓸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는데.
감상에 젖어있는 와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방가방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규원이.
뒤따라 들어온 윤희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규원이는 발랄한 걸음으로 다가와서  오른편 자리에 착석했다.
윤희는 마스크를 벗고 나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그 손길을 따라 가볍게 찰랑거렸다.
“일찍 왔나 보네.”
“한 15분 됐어.”
윤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윤희가 내 왼편 의자에 자릴 잡았다. 그동안 규원이 옆에 앉았던 걸 생각하면 의외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윤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물어볼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불편해서. 그래서 차라리 바로 옆에 앉는 게 좋을  같아.”
“듣고 보니 그렇네.”
사실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간 규원이 옆에 앉았는지.
아마 이제는   거리를 좁혀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과제 검사부터 할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희가 문제집을 들이밀었다. 매번 윤희 먼저 검사했더니 이제는 자동 반응 수준이 되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꼼꼼히 확인해 보았는데 그동안 자주 틀리던 유형도 이번에는 맞췄다.
“여기 오답 노트도 정리해 봤어.”
윤희가 노트도 펼쳐서 보여주었다. 지난번에 내가 알려준 대로 작성하고 있었다.
틀린 문제와 정답. 문제의 유형과 왜 틀렸는지에 대한 나름의 분석.
오답 노트의 끝자락까지 읽고 나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잘하고 있네. 계속 이대로만 해줘.”
“그럴게.”
윤희에게 문제집과 노트를 돌려준 뒤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자. 그리고 다음은…….”
“이때를 기다렸다!”
규원이가 활짝 펼친 문제집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번엔 자신 있음!”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팡팡 치는 규원이. 확실히 굴곡이라고는 찾아볼  없…… 아니다.
나쁜 생각은 한시라도 빨리 몰아내야 한다. 훠이훠이.
문제집을 내려다보니 일단 다 풀기는 했다. 나는 답안지를 꺼내서 정답을 체크해 보았다.
총 30문항 중 9개 정답.
며칠째 정답률이 오르지 않는 상황.
“오오! 어제에 이어 오늘도 9개나 맞췄네?”
규원이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내 속이 어떤지 알기나 할까.
나는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금 문제집을 살펴보았다.
사흘간 규원이에게는 과학 문제집으로만 과제를 내줬다. 매번 개념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문제 풀이 예시까지 보여주는데 왜 이런 걸까.
아무리 공부 머리가 없다고 해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다 보면 알게  수밖에 없을 텐데.
……이참에  번 테스트해 볼까?
“선생님! 이제 수업해야죠?”
규원이는 아무것도 모른  실실 웃고 있었다.
“아니. 수업을 하기에 앞서  알아볼 게 있어.”
“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규원이를 내버려둔 채 나는 책장에서 과학 문제집 두 권을 골라왔다.
“아니 왜 또, 새로운 문제집을…….”
규원이의 혼잣말을 무시한 채 두  다 2단원 부분을 펼쳤다.
“먼저 이거 풀어봐.”
문제집을 건네자 규원이가 뭐 씹은 얼굴을 했다.
“어서.”
단호하게 말하자 규원이가 앓는 소릴 내며 샤프를 쥐었다.
끙끙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면서 한 문제씩 풀어나가는 규원이.
“다, 했다…….”
책상 위에 대자로 엎어지려는 것을 나는 얼른 제지했다.
“자, 이것도 풀어.”
“사, 살려주세요…….”
“안 돼.”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물기가 고일 듯 말 듯한 눈망울을 보내도 소용없단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규원이가 두 번째 문제집도 클리어했다.
“좋아. 수고했어.”
“나 10분만 쉴, 게…….”
규원이가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나는 빠르게 두 문제집의 답을 체크했다.
첫 번째 것은 6문항만 정답. 두 번째는 11문항 정답.
그런  과제로 내준 문제집까지 펼쳐서 비교해 보았다.
덕분에 내가 품었던 의문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이규원. 일어나 봐.”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규원이가 마지못해서 일어났다.
“드디어 수업이야?”
“아니. 그 전에 얘기할 게 있으니까 잠깐 따라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는 규원이.
“따라오라니까?”
나는 손짓을 했다.
이 건은 확실하게 얘기해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 * * *

우리는 3층 구름다리에서 멈춰 섰다.
“왜에?”
나는 돌아서서 규원이를 노려보았다.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뭔데 그래?”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입술을 뗐다.
“너. 과제할 때 어떤 식으로 해?”
“그거야, 한 문제씩 풀고 있지.”
순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거짓말하지 마. 다 찍고 있잖아.”
 순간 규원이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아, 아냐.”
“아까 내가 다른 문제집 2개를 풀도록 시킨 이유가 뭘까? 그것도 똑같은 단원을.”
규원이는 눈만 깜빡거릴 뿐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문제집 3개 전부 비교해 봤는데, 맞춘 문제가 다 제각각이더라. 보통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문제가 조금씩 달라도 다 맞출 수 있거든. 왜냐면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근데 문제집마다 맞춘 게 제각각이라는 뜻은,”
숨을 들이쉬고 뒷말을 이어 붙였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거지.”
“…….”
“내가 가르쳐 준 내용들 복습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나는 규원이를 몰아세웠다.
“그, 그치만 집에 돌아오면 저녁도 먹어야 하고, TV도 보면서  쉬고, 샤워도 해야 하고……. 그리고 머리도 식힐 겸 게임 좀만 하다 보면 항상 잘 시간이 다 돼서. 그래서…….”
나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도 저녁 먹고 쉬기도 하고 그러면서 공부하는데?”
규원이가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지금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
“이게 답안지 보고 베끼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
“…….”
나는 코웃음을 쳤다.
“평균 90점은 무슨, 20점도 안 나오겠다 야.”
규원이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 그래도 20점도 안 나온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아?”
“아니. 지금 너 하는 꼴 보면 진짜 그런데?”
“그, 그래도…….”
“내기할래? 중간고사 점수 어떻게 나올지.”
규원이가 입을 앙 다문 채 아무런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깊이 묵혀둔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좋아서 싫은 소리 하는 거 아냐. 오해하지 말라고. 근데 진짜 지금 이대로는 안 되니까 하는 소리야.”
“응.”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규원이.
“오늘부터라도 문제 찍지 말고 똑바로 풀어. 모르겠으면 다시 복습하고.”
우리는 다시 부실로 되돌아왔다.
이 정도로 얘기했으면 규원이라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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