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37화-You Only Live Once(6)
지아 누나가 고개를 왼편으로 기울이고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부원 다 채운 거 아니었어? 저번 주에 우리 반에서 홍보했잖아. 정문에서 포스터도 돌리고.”
나는 들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 고생을 해서 이규원만 들어온 거예요.”
“그래?”
지아 누나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엄청 열심히 하길래 다 된 줄 알았는데.”
“뭐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말꼬리를 흐렸다.
“내기했다면서?”
할 말을 잃었다.
이규원, 너 정말 입이 가볍구나. 최소한 깃털보다는 무거울 줄 알았더니.
지아 누나가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손목 스냅으로 감자튀김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마냥 리드미컬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냥 궁금해서 그래.”
지아 누나가 지휘봉으로 쓰던 감자튀김을 입에 물었다.
“저 취조 받는 건가요?”
“뭔가 켕기나 보네,”
누나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곤혹스러워졌다. 규원이를 받기 싫어서 그랬다고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고민에 잠겨 있는데 누나가 입술을 움직였다.
“아냐. 둘이 뭔가 있었겠지. 사실 규원이가 미주알고주알 다 불었거든.”
“잠깐만요.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아녜요?”
지아 누나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누나도 보통 내기가 아니군.
나는 콜라를 몇 모금 마셨다. 이야기가 잠깐 삼천포를 다녀왔으니 다시 처음의 화두로 되돌릴 때였다.
“그래서 누나. 스터디부에 들어오실래요?”
지아 누나가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내 눈을 응시했다.
“음. 사실 마음이 없는 건 아냐. 저번에 견학도 갔었으니까.”
“네. 그랬었죠.”
머리를 끄덕였다.
“뭐랄까, 좀 망설이고 있거든. 내가 이대로 공부에 열중할 수 있을지. 그리고 잘할 수 있을지……. 아직은 갈피를 못 잡겠어.”
지아 누나가 시선을 슬쩍 다른 곳으로 돌렸는데,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닿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그리움에 잠긴 사람처럼 덧없게 느껴졌다.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죠.”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너무 똑 부러진 남자는 여자한테 인기 없어.”
내게로 고개를 돌린 누나의 눈빛은 어느새 평소처럼 되돌아와 있었다.
“원래 성격이 이래서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가끔은 여자애가 하는 말에 공감해 주는 자세도 필요하다구.”
“저보다 나이가 많아도요?”
“응. 그럼.”
일부러 짖궂게 물어봤는데도 지아 누나는 시원스레 긍정했다.
약간은 화를 낸다든지, 손으로 찰싹 때린다든지 하는 반응을 예상했는데.
“게다가 아직 열여덞이라구. 얼마나 꽃다운 나이야.”
참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내 입으로 ‘열일곱이 꽃다운 나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는데. 그런 수식어가 내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아 누나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로 그렇게 느껴졌다. 워낙에 미인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구만.
역시 사람은 뭐가 되었든 일단 외모가 빼어나야 하는가 보다.
“누나는 참 시원스런 사람이네요.”
“그런 말 가끔 들어.”
칭찬으로 들렸는지 지아 누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지만…….”
누나의 중얼거림. 혼잣말인데도 내 귓가에 들릴 만한 성량이었다.
아까 양아치들을 향해 제 목소리를 내던 당당한 모습과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던 발랄한 태도와 사뭇 달랐다.
“…….”
지아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누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아이참. 햄버거 다 식겠네.”
드디어 지아 누나가 햄버거에 손을 댔다. 내가 먹는 것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였다.
마냥 활달해 보이는 지아 누나에게도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햄버거를 우물거렸다.
“이거 진짜 맛있네요. 누나 것도 맛있어 보이고.”
“규원이랑 자주 오거든. 뭐가 맛있는지 정도는 다 꿰고 있지.”
지아 누나가 자신감을 내비쳤다.
“언젠가 다른 것도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내 지갑이 두둑해진다는 전제조건 하에 말이지.
“누나가 다음에도 쏠까?”
“아아,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수차례 흔들었다.
이후 우리는 잡담을 주고받으며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비워나갔다.
포만감이 느껴지는 저녁 식사는 참 오랜만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치우고 나서 버거왕을 나섰다. 대로변에서 다소 떨어진 위치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잘 먹었어요.”
진심이었다. 오랜만에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했으니까.
“보기보다 잘 먹더라?”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 눈길이 귀여운 동생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거기에 있었어요?”
궁금해서 말을 꺼냈다.
“어디 들를 곳이 있었거든. 그러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그리됐지 뭐야. 너 꽤 예쁜데 잠깐 시간 내줄 수 있냐고 하면서.”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하지만 말하는 어조에 비해 내용이 그리 가볍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누구든 두려움을 느낄 텐데.
“누나. 무섭지 않았어요?”
“당연히 무섭지. 나도 사람인데.”
지아 누나가 걸음을 멈췄다. 나도 곧장 멈춰 서서 누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데서 겁먹은 티 내면 지는 거야. 오히려 당당하게 밀고 나가야 함부로 못 건드리거든. 그런데 너야말로 겁나지 않았어?”
“엄청 겁났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래? 그런 것 치곤 엄청 능청맞던데.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한 거 진짜 대단한 거야.”
“아는 사람이라서 못 지나친 거죠 뭐…….”
괜히 쑥스러워서 뒷머릴 긁적였다.
지아 누나가 나를 향해 검지를 치켜세웠다.
“이거 기억해 둬. 용기 있는 남자가 미인을 차지한다.”
누나가 말을 끝맺으면서 윙크를 발사했고, 나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규원이랑 얘기하는 모습을 볼 때도 느꼈지만 정말로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휴대폰 시계를 보니 이미 9시를 지난 상태였다.
“아. 슬슬 가야겠다.”
지아 누나가 중얼거렸다.
“저기누나. 집 어디예요? 근처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여기서 가까우니까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아 누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여러 번 겪어봐서 괜찮아.”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요?”
“여러 번 겪고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잖아. 내 나름 방법이 있다구.”
지아 누나는 끝끝내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물러서기로 했다.
“영재야. 스터디부 입부는 좀 더 생각해 볼게. 대신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음…….”
아무리 생각해도 스터디부 입부 말고는 부탁할 만한 게 안 떠오르네.
“생각 안 나면 나중에 얘기해도 되고. 아! 그리고 이참에 번호 교환도 하자.”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불쑥 내밀었다.
번호라니…….
이런 걸로 제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예입니다.
나는 누나가 내민 스마트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누나는 그것을 저장한 뒤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면서 문자 넣을게. 그럼 내일 봐.”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드는 지아 누나를 향해 나는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 * *
다음날, 학교에 도착했더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복도까지 다 들려왔다.
내가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뭐지?
그때 이규원이 목청을 높이면서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멸치 히어로 등장!”
“응? 뭐라고?”
내 고막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히어로라고 한 것 같은데?
아니 근데 왜 거기서 멸치가 나오는 거야.
“어제 우리 언니를 구해준 영웅이잖아.”
하루도 안 지난 일이 벌써 핫이슈로 떠오르다니. 소문의 진원지는 뭐…… 보나마나겠지.
저기 반 애들의 중심에 서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이규원 말이다.
“봐봐! 이 문자.”
규원이가 한달음에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내 얼굴에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이렇게 가까이 들이대면 대체 어떻게 읽으라는 거냐.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 좀 해 봐.”
나는 규원이의 양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어냈다.
“암튼! 이거 너잖아.”
나는 당사자였으니 저 휴대폰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을지 짐작이 갔다. 근데 안 봐주면 또 치근덕거릴 듯하니 구태여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는 규원이에게서 휴대폰을 건네받고 메시지를 읽어보았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어젯밤 내가 지아 누나를 도와준 일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딱히 호들갑 떨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영재야. 어제 양아치들 상대로 어퍼컷 날린 거 진짜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얘가 갑자기 소설을 쓰네?
규원이가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막 어퍼컷으로 한 놈을 쓰러뜨리고, 날라차기로 딴 놈 면상을 뭉개버린 거 아냐? 막 원펀치 쓰리강냉이 같은 거.”
“…….”
오버액션도 저 정도면 중병인데.
다른 애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 없이 규원이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님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다들 호응을 안 해줘서 그런지 규원이가 매우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규원아. 아무리 그래도 뼈밖에 없는 애가 그걸 해낼 리가 없잖니.”
정론을 펼치는 도연이.
맞는 말이긴 한데, 왜 내 코끝이 시큰해지는 거냐…….
다른 애는 그런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피식 웃었다.
“이런 건 과장해서 말해야 재밌지 않, 나?”
“아니. 너무 가버렸어.”
뒤쪽에서 튀어나온 발언에 모두가 공감을 표했다. 그러자 규원이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쭈그러들었다.
“재미없었나…….”
응. 진짜 노잼이었지.
“그래서 영재야. 어제 그 언니랑 어떻게 했는데?”
도연이를 비롯한 다른 애들도 관심을 보였고, 나는 어제 한 행동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우와. 재치 있게 했네.”
도연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멋져, 대단해, 같은 찬사를 보내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HR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녕, 멸치 히어로.”
윤희가 재밌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멸치는 빼주라.”
“잘 어울리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윤희를 응시했다.
“잘 어울린다니까.”
여학생밖에 없는 학교에서의 생활은 여러모로 피곤하다.
* * * *
나의 대활약상에 대한 이야기는 종례시간이 다가와서야 수그러들었다.
종례가 끝나자 우리 셋은 곧장 부실로 향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나와 윤희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고, 규원이는 우리 사이의 빈 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과제 검사부터 하자. 먼저 윤희.”
윤희가 문제집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확인해 보니 역시 답안 체크까지 마친 상태였다.
“다 좋은데, 어제랑 비슷한 유형에서 또 오답이 났네.”
시선을 들어서 윤희를 보았다.
“응. 그래서 네가 말한 대로 오답 노트에 적어뒀어.”
“역시. 잘하고 있네. 나중에 오답 노트도 보여줘.”
윤희가 문제집을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은 우리들의 골칫덩어리 차례.
나는 가방에 24시간 동안 봉인해놓은 답안지를 꺼내 들었고, 규원이는 비장한 눈빛으로 문제집을 내밀었다.
“일단 다 풀긴 했지?”
펼치기 전에 확인차 물어봤다.
“최대한 했어!”
“오케이.”
나는 빨간 몬아미 볼펜을 손에 쥐고 하나씩 답을 매기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빗금, 빗금, 빗금, 동그라미, 빗금, 빗금…….
채점은 금세 끝났다. 하지만 나는 볼펜을 놓을 수가 없었다.
“총 30문항 중 정답은…….”
나는 고개를 틀고 규원이를 쳐다보았다.
“7개…….”
그러자 규원이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난 5개 맞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다행은 개뿔!
나는 문제집에 이마로 박치기를 했다.
갈 길이 너무나도 험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