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화-You Only Live Once(4)
나는 휴대폰 액정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진동벨이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도 잊은 채.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대낮에 홍두깨라고 해야 할까.
어젯밤에 메시지를 보냈을 때 둘 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을 보내왔다.
만약 규원이가 지아 누나와 미리 약속을 잡아뒀더라면 당연히 거절했겠지.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지아 누나와의 약속이 나보다 늦게 잡힌 약속이라는 것이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
이따금 봐온 모습으로 유추해보건데 두 사람은 매우 친근한 사이다. 아마 둘이 만나서 공부를 하지는 않겠지.
솔직히 지아 누나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규원이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파악한 상태다.
그 녀석은 절대로 나 없이도 착실하게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습관이 잡혀 있지 않다. 이것만큼은 엄지를 걸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기, 손님?”
“네?”
고개를 들었다.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나를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맞다. 음료 챙기러 온 거였지.
하마터면 카운터 앞에서 계속 휴대폰만 보고 있을 뻔했다.
머쓱해진 나는 얼른 진동벨을 건네고 쟁반을 챙겼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윤희는 먼저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었네.”
윤희는 문제집에서 시선을 들고 내 얼굴을 살폈다.
“이규원은? 혹시 안 온대?”
찔러보기 식으로 내던진 말 같은데, 하필이면 그게 정답이라 소름이 돋았다.
“응.”
짤막하게 답한 뒤 윤희에게 아메리카노 잔을 건넸다.
“고마워.”
윤희가 잔을 받아들고 빨대를 가볍게 입에 물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그러자 윤희가 빨대에서 입술을 떼었다.
“이유는?”
나는 메시지를 켜서 윤희에게 보여주었다.
“오늘은 놀고 싶은 모양인가 보네.”
“걔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아. 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오겠다고 해놓고…….”
나는 휴대폰 액정에 대고 불만을 터뜨렸다.
오늘도 공부하고 싶어하길래 일부러 모임을 잡았더니만. 심지어 오늘 가족 나들이 계획마저 취소하고 나온 건데.
“이럴 거면 그냥 오늘 놀겠다고 하지.”
윤희가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야.”
나는 가볍게 혀를 찬 뒤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일단 이건 넘어가자. 그래도 아무 연락도 없이 안 오는 것보단 나으니까.”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해해 줄 생각이었다.
도중에 마음이 바뀌는 일을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셀프 코너에 가서 물 한 컵을 들고 왔다. 그런 뒤 에스프레소를 약간 부었다.
“카페에서 너처럼 하는 애는 처음 봤어.”
윤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빨대로 휘휘 저었다.
투명했던 물에 에스프레소가 천천히 섞여들자 점차 검은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비장한 눈빛으로 컵을 내려다보았다.
윤희도 이쪽을 주시하고 있어서 컵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마셔볼래?”
“내 거 있으니까.”
윤희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은 불안하다. 어제 지옥 같은 맛을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쓴맛은 잠깐이고, 아낀 돈은 내 마음을 오래도록 편하게 해준다.
그래, 사나이로 태어났는데 이까짓 물 탄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쯤이야!
나는 기세등등하게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마셨다.
쓰다…….
잔뜩 인상을 썼다. 그래도 어제처럼 한약재를 먹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메리카노 느낌이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메리카노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무어라 평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윤희가 자신의 잔을 내 쪽으로 슬쩍 밀었다.
“한 번 비교해 봐.”
역시 보통 눈치가 아니로군.
나는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가 문득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이것은, 까딱 잘못했다간 간접키스다!
머그잔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윤희가 피식 웃더니 턱을 괴었다.
“난 빨대로만 마실 거라서.”
이쯤 하면 도사 아니냐?
“어, 응…….”
나는 어색한 고갯짓을 하고 나서 아메리카노를 살짝 머금었고,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으윽! 쓰다…….”
“그래도 어제 네가 마신 에스프레소만큼은 아닐 거야.”
“하긴…….”
그건 정말 내 혀에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지.
윤희에게 잔을 돌려 주고 나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주변의 소음을 벗 삼아 한 시간 가까이 공부를 했을 쯤, 윤희가 샤프를 내려놓았다.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돼.”
윤희가 한숨을 내쉬고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참에 도서관으로 옮길까?”
“그게 좋겠어.”
나의 제안에 윤희가 곧바로 찬성 의견을 표했다.
공부는 역시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제일이지.
시립도서관은 여기서 도보로 15분 남짓이다.
우리는 가방을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청명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 윤희가 말을 걸었다.
“그저께 도서관에 가자고 했었지? 소원 이뤘네.”
“그러게.”
도서관을 희망한 이유는 단 하나다. 의무적으로 커피를 살 필요가 없으니까.
누구 씨의 의향 때문에 이틀씩이나 스타박스를 이용하게 됐지만.
그때 윤희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참! 지금 생각난 건데, 우리 학교 주말에도 열려 있어서 부 활동을 할 수 있어. 깜빡하고 있었네.”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피 같은 4,000원을 아낄 수 있는 기회를 무지함 때문에 놓쳐 버렸다니!
기분이 급격히 우울해지려고 했다.
“다음엔 부실에서 하자.”
윤희가 제안했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윤희에게 용돈을 거의 안 받고 산다고 밝혔다. 그것 때문에 나름대로 신경 써주는 것일 테지.
“……그래.”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슬퍼해 봐야 이미 지갑을 떠난 돈은 돌아오지 않으니 가슴에 묻어두는 수밖에.
* * * *
우리는 도서관의 2층 열람실에서 각자 공부를 했다. 정숙한 분위기인 만큼 집중력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넘게 공부를 하다 보니 허기가 찾아왔다.
윤희가 내 어깨를 쿡 찌르고 볼륨을 낮춘 음성으로 말했다.
“간단하게 먹고 하자.”
도서관인 만큼 말 대신 고개로 응답했다.
우리는 스낵코너와 매점이 있는 도서관의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빠르게 스캔했다. 가장 싼 메뉴인 라면조차도 3,000원이라니…….
동전 지갑에 있는 자금은 2,350원. 택도 없다.
“나는 김치볶음밥할래.”
돈에 쪼들리지 않는 윤희는 무려 4,500원이나 하는 메뉴를 선택했다.
“나는 매점 갈게.”
“그래.”
윤희가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매점에서 가장 저렴한 컵라면 하나를 골라왔다.
“그걸로 밥이 돼?”
윤희가 컵라면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괜찮아. 원래 소식가거든.”
잠시 후 윤희도 주문한 음식을 받아왔다. 우리는 느긋하게 밥을 먹었다.
나는 국물만 약간 남긴 채 나무젓가락을 내려놓았고, 윤희는 볶음밥을 3분의 1 정도 남겼다.
“물 마실래?”
“응. 고마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컵을 가져왔다. 그리고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이규원 얘를 어떻게 해야 될까.”
“골치 아픈 사안이긴 해.”
공감을 표하는 윤희.
나는 하소연하듯 말을 줄줄 읊었다.
“사실은 요 며칠 이규원을 겪어보니까 한 번은 믿어보자, 이렇게 생각했거든. 적어도 내가 가르칠 때만큼은 집중하려고 노력하니까. 근데 오늘 행동은 솔직히 좀, 그랬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되새겨보니 괘씸하긴 했다.
“나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윤희는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무엇이든 비출 것만 같은 맑은 눈망울이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영재야.”
맑은 눈망울이 돌연 나에게로 돌아왔다.
“너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다. 그 눈에 담겨있는 감정은 맑지 않았다. 거기에 담겨있는 것은 불신.
“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 계기가 있다면.”
“계기…….”
윤희가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너는 그런 경험해봤어?”
“응.”
“그렇구나.”
윤희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가끔이라도 응원해 주자고 그랬지 않았나?”
그러자 윤희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립서비스니까.”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둘은 매우 상극인 존재라고.
그리고 윤희가 여전히 규원이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윤희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삼자대면 이후 오랜만이었다. 나는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윤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해. 딴 길로 샜네. 본론으로 돌아가자.”
아마도 나의 침묵을 불편한 신호로 읽은 모양이었다.
“그래. 얘를 어떻게 공부시켜야 할지.”
입을 움직이던 중에 어떤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혹시 이런 건 어떨까?”
윤희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과제를 내주자. 매일 한 시간씩만 투자하면 할 수 있는 걸로 말야.”
“괜찮은 방법이네.”
“너도 할래? 규원이 혼자만 시키면 좀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으니까.”
“난 상관없어.”
윤희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나는 한동안 고민하고 나서 윤희에게 먼저 과제의 범위를 알려주었다.
규원이에게는 문자메시지로 이 같은 내용과 과제 범위를 전달해 주었다.
「오케이 낼 꼭 하게씀!」
규원이의 기운 넘치는 답장을 확인한 뒤 우리는 다시 열람실로 올라갔다.
* * * *
월요일이 되었다.
나는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두 사람에게 과제를 해왔는지 물었다.
“응. 해왔어.”
윤희는 살며시 고개를 움직였고,
“당연하지이! 날 뭘로 보고.”
규원이는 가슴팍을 치며 자신 있어 했다.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은 기대가 되었다. 한편으로 정말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고.
결과는 스터디부 활동 시간에 알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
나는 오랜만에 혼자서 밥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다.
웬 여학생이 교실 뒷문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통통한 풍채가 왠지 낯이 익었다.
“저기.”
뒤에서 말을 붙이자 여학생이 고개를 홱 돌렸다. 생활부장인 주신영 선배였다.
“오. 마침 너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저요?”
“아아. 별 건 아니고.”
괜스레 불안하게 만드는 도입부였다.
“저번에 게시판에 붙여놓은 홍보물 있지? 오늘 중으로 수거했으면 해서.”
다행스럽게도 별일이 아니었다.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어요.”
“그런 것 같아서 알려주러 왔어. 스터디부 활동은? 잘 돼?”
명랑한 음성이었다.
“잘 되고 뭐고가 있겠어요. 그냥 하는 거죠.”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가면 썼던 애랑은 잘 지내고?”
“네. 첫 번째 부원이니까요.”
아무래도 윤희는 주신영 선배에게 평생 가면 쓴 애로 기억될 것 같다.
“그렇구나. 아무튼 오늘 중으로 꼭 해 줘.”
주신영 선배가 인사를 하고 나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담임선생님한테 빌린 압정도 돌려줘야 하는군.
5교시 쉬는 시간에 나는 윤희와 규원이에게 홍보물을 수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슬슬 정리할 때긴 하네.”
윤희는 당연한 흐름이라며 납득했다.
“엥? 아직 부원 더 모집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려면 붙여놓는 게 낫지 않나.”
규원이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생활부장 선배가 직접 부탁했으니까 그러지.”
“좀만 더 붙여놓게 해달라고 하자!”
“뭘 근거로?”
나의 되물음에 규원이가 팔짱을 끼더니 자신만만한 태도로 내뱉었다.
“2명만 더 모집하면 수거하겠다고.”
자기 딴에는 그럴 듯한 이유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걸로 잘도 설득하겠다.”
“이름하여 동정심 유발 작전!”
“응. 전혀 안 통해.”
“단호박…….”
규원이가 볼멘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종례가 끝나는 대로 각자 게시판을 돌자고 의견을 냈다.
두 사람 모두 알겠다고 답했다.
* * * *
종례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서자 규원이가 부리나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네 빨리 와, 빨리!”
뒷문으로 와서는 다급히 손짓을 했다.
덕분에 나와 윤희도 평소보다 약간 더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스터디부에 가방만 갖다 놓은 뒤 홍보물을 수거하러 다녔다.
뿔뿔이 흩어진 덕분에 생각보다 이르게 작업을 끝냈다. 나는 홍보물 18장과 압정 전부 이상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이상 무.
“자, 이제 과제 검사를 해볼까.”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고, 윤희가 먼저 문제집을 제출했다. 펼쳐보니 이미 답안 체크까지 다 해 놓은 상태였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오답 노트는 했어?”
“아니. 그건 안 했어.”
“앞으로는 오답 노트를 작성해 봐. 실수가 더 줄어들 거니까.”
나는 윤희에게 문제집을 돌려주었다.
“명심할게.”
“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으면 나중에 물어봐도 되고.”
윤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후후. 이제 내 차례로군.”
의기양양한 얼굴로 문제집을 내미는 규원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구만.
확인해 보니 문제는 다 풀어낸 대신 답안 체크가 되어있지 않았다.
“앞으로는 답안 체크도 다 해서 가져 와.”
“네에, 부장니임.”
오버하기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답안지를 옆에 펼쳐놓고 답안 체크를 시작했다.
반 정도 체크했을 때, 나는 왜 규원이가 그토록 자신만만해 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긴 한숨을 흘려보내며 문제집을 덮었다.
“응? 아직 덜했잖아?”
규원이가 의아하게 여겼다.
“너. 이거 답안지 보고 베낀 거지?”
나는 규원이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