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화-You Only Live Once(2)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혹시나 하여 등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윤희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규원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응? 왜들 그래?”
정작 당사자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자기가 한 발언이 우리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볼게. 내일 뭘 하자고?”
규원이에게 질문했다.
“공부 가르쳐 달라구.”
새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웃는 규원이. 다행히 내 고막이 잘못 되지는 않았군.
나는 문고리를 놓고 뒤돌아섰다.
공부할 생각이라고는 개미 눈곱보다도 없었던 애가 스마트폰이라는 목표의식 덕분에 180도 변신을 했다.
스마트폰에 이런 놀라운 순기능이 있었다니.
“주말에도 쉬지 않고 공부하면 점수가 더 많이 오를 거 아냐.”
“음…….”
규원이의 말마따나 주말에도 공부를 하면 성적이 향상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름폭이 크다는 장담은 할 수가 없다. 현상 유지가 고작일 수도 있고.
나는 규원이를 쳐다보았다.
“응?”
규원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얘한테는 주말에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겠구만.
“그건 아무도 몰라.”
단정 짓는 말투로 내뱉었다. 나는 꿈을 꾸기보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이므로.
규원이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운동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나?”
“비슷한 거잖아.”
규원이의 말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운동을 아예 안 하는 것보단 조금씩이라도 하는 게 나은 것처럼, 공부 또한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규원이가 단기간에 성과를 보일 것인가.
아니, 이대로면 성적 향상은 요원한 일일 뿐이다.
“너무 기대감을 갖지 않는 게 좋아. 이건 충고야.”
“에이, 모처럼 의욕 내려고 하는데 너무 초 친다.”
규원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순간이나마 슬기가 연상되었다.
물론 슬기가 좀 더 귀엽지만.
“가끔은 응원해 줘도 되지 않을까?”
윤희가 웬일로 규원이 편을 들어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윤희를 바라보았다.
“오오! 같은 여자라고 챙겨주는구나!”
곧장 기운을 차린 규원이가 윤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윤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장 규원이의 손을 빼냈다.
“이런 거 하지 마.”
“뭐 어때. 친구끼리 스킨십도 좀 하구 그래야지.”
“그런 거 안 익숙해.”
윤희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짠하게 들리는 발언이로군.
“윤희, 실망…….”
규원이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윤희는 스킨십을 허락하지 않았다.
잡설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슬슬 하던 얘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 그럼 내일 모여서 하자. 어디서 할래?”
“스타박스!”
규원이가 한 치도 머뭇거리지 않고 힘주어 답했다.
아마 저번에 규원이, 지아 누나와 만났던 곳을 지칭하는 것일 테지.
그곳은 테이블이 큼직하고 의자도 편안하다.
하지만 한 가지 크나큰 문제가 있다. 카페를 이용하려면 당연히 음료를 주문해야 한다.
스타박스의 커피값이 얼마더라?
나는 기억의 페이지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결과는 매우 비쌈.
“거긴 수다 떨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서 시끄러울 텐데. 차라리 도서관이 낫지 않아?”
나는 반대 의견을 내면서 윤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윤희라면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
때마침 윤희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그러더니 생각에 잠긴 듯 검지로 입술을 살며시 문질렀다.
설마 내가 보낸 사인을 눈치채지 못한 건가.
잠시 후 윤희가 입술을 떼었다.
“일단, 나도 같이 가는 거지?”
“당근이지! 우리 셋은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을 때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는 사이라구.”
“도원결의한 적 없거든?”
우리가 언제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반면 윤희는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규원이의 헛소리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서관! 도서관!
속으로 구호를 외치며 윤희의 입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타박스가 좋다고 생각해.”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스타박스 두 명, 도서관 한 명.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에 따라 나는 패배했다.
규원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역시! 여자들끼리 통하는,”
“그거 하지 마.”
윤희가 규원이를 흘겨보았다.
“왜, 공부하기 좋은 도서관을 놔두고…….”
“도서관에서는 공부를 봐줄 수가 없으니까.”
나의 중얼거림을 윤희가 놓치지 않았다.
듣고 보니 그렇네. 거기서 떠들었다가는 민원 때문에 쫓겨나겠지.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을 만큼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내일도 스터디부 모임을 갖게 되었다.
스타박스 음료 값…….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 * * *
스타박스. 오후 1시까지.
어제 헤어지기 전에 최종 합의한 내용이었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 보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책상과 바닥에 펼쳐놓은 교과별 문제집들. 이 중에서 무얼 챙겨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팔짱을 낀 채 문제집들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수학 문제집을 집어 들었다.
윤희는 수학이 다소 약한 편이니 가르쳐주는 걸 고려한다면 수학은 필수겠지.
규원이는 모든 과목에 약하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 주는 게 맞지만, 모든 과목의 문제집을 들고 가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렇다면 편법을 써먹어야지. 그건 바로 비교적 쉽게 점수를 올릴 만한 과목을 위주로 공부를 시키는 것.
단기간에 점수를 올릴 만한 과목은 기술가정, 체육, 미술, 음악 정도.
그렇지만 이런 과목들은 당장에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문제집도 없고.
문제집이 있으면서도 비교적 점수를 빨리 올릴 수 있는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생각의 가지가 거기까지 뻗어나가자 문제집 두 개가 시야에 포착되었다.
[통합 사회], [통합 과학]
나는 그것들도 가방에 챙긴 다음 옷장에서 신중하게 옷을 골라서 입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방에서 나오자 엎드려 있던 슬기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오빠 오늘 어디 가?”
“오늘 스터디부 모임 있어서.”
“어떻게 공부를 하루도 안 쉬고 해?”
슬기가 질색했다.
“애들 가르쳐 주러 가는 거야. 내 공부할 시간은 별로 없다고.”
“그것도 공부 아냐?”
“공부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온전히 내 공부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가?”
슬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네가 공부를 잘하게 된다면 말이지.”
“그런 날은 절대로 안 올 거야.”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는 슬기에게 손을 흔들고는 집을 나섰다.
* * * *
스타박스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12시 50분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무척 많았다. 다행히 구석진 곳에 4명이 앉을 만한 테이블이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도착했어?」
윤희의 메시지였다.
「응 나 안쪽자리에 앉아있어」
답장을 보냈다.
「금방 갈게.」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몬아미 볼펜을 쥐었다. 문제집을 가볍게 훑어보는 사이 윤희가 1시 정각에 도착했다.
“걔는?”
“아직.”
내 대답을 들으면서 윤희는 베이지색 로브 자켓을 벗었다. 까만 브이넥 니트에 진청색 스키니로 코디를 맞춰왔는데 색다른 느낌이었다.
“커피는 아직?”
윤희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포니테일이었다.
“다 모였을 때 주문하려고.”
“흐음.”
윤희도 가방에서 공부할 거리를 꺼냈다.
나는 다시 문제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휴대폰이 또 부르르 진동했다.
규원이의 전화였다.
“어디야?”
[헉헉. 거의 다 왔어.]
뛰고 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일 안쪽 자리에 있으니까 빨리 와.”
[응!]
이거 참. 먼저 제안한 사람이 제일 늦다니.
규원이는 통화를 끝내고 10분이 더 지나서야 스타박스에 도착했다.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규원이가 연거푸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흰색 나팔 소매 블라우스에 남청색 트레이닝 바지. 최대한 편한 차림새로 고른 것 같았다.
간신히 호흡을 고른 규원이는 당연하다는 양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오늘 주로 배울 사람은 규원이니까 당연한 자리 배치이기는 하지.
윤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고.
우리는 곧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물론 계산은 각자.
알바생 누나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주문을 받았다.
윤희는 카페 라떼.
규원이는 민트 초코 프라페.
“으, 하필 민트.”
내가 오만상을 쓰자 규원이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왜, 뭐, 왜? 민트가 얼마나 꿀맛인데.”
규원이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은 계산을 마치고 먼저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나만 주문하면 된다.
나는 메뉴판을 빠르게 스캔했다. 목표는 물론 가장 저렴한 음료.
대부분이 3~4천원을 우습게 아는 가격대. 그러나 2천원인 음료가 딱 하나 있었다.
그래, 오늘은 너다!
“에스프레소요.”
이렇게나 착한 가격에 마실 수 있는 커피라니. 운이 좋았군.
결제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가지러 갈게.”
엉덩이가 가벼운 규원이가 날래게 일어나더니 쟁반을 들고 왔다.
보통 사이즈 잔 2개와 유독 작은 잔 1개가 놓여 있었다.
규원이가 작은 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야? 처음 보는데.”
“에스프레소.”
윤희가 대신 대답하고 나서 나에게 눈길을 던졌다.
“혹시 이걸 마시려고?”
“그럼.”
나는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실망이다. 2천원이라고 이렇게 작은 잔에 주다니. 이건 차별 아니냐?
스타박스에 큰 실망을 하면서 에스프레소 잔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영재야. 커피, 잘 마셔?”
“당연하지.”
사실은 믹스 커피도 어쩌다 맛보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나름 커피를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윤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왜 저러지.
나는 김이 피어오르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머금었다.
“…….”
말이 나오지 않고 입술이 쪼그라들었다. 눈썹에서 경련도 일어나고…….
마치 안면 마비가 온 것만 같은 이 느낌.
잔을 들고 있는 손도 달달달 떨렸다.
그만큼 쓰디쓴 맛이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몰랐구나.”
윤희가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와, 얼굴 진짜 대박.”
규원이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스타박스에서 언제 한약을 팔았던 거냐?”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간신히 삼키고 말했다. 이제는 실망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이딴 걸 팔아먹는다고?
“아메리카노가 에스프레소에 물을 부은 커피잖아.”
윤희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윤희 너, 잡지식이 많다. 대단해!”
규원이가 감탄했다.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입 안에 진하게 밴 쓰디쓴 향을 없애는 게 먼저다.
나는 셀프 코너로 달려갔다. 냉수를 연거푸 들이켜자 그제야 한약 맛이 사라졌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중에 윤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따라 와. 내가 하나 살게.”
한순간 윤희에게서 형준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나는 사양했다.
“아냐. 저기에 물 타서 마시면 괜찮을 것 같아.”
“요 사흘 간 규원이 가르치느라 고생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규원이가 사줘야 하는 거 아냐?”
윤희가 문제집을 바라보고 있는 규원이를 곁눈질했다.
“그런 눈치가 없는 것 같아서.”
“그건 그렇네.”
우리는 카운터로 향했다. 이번에는 캬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했다.
“너네 되게 사이좋다.”
자리로 돌아온 우리를 향해 규원이가 던진 감상이었다.
“공부 가르치느라 고생하니까.”
아까 나에게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읊는 윤희.
눈치껏 하라는 일종의 암시.
“그렇구나.”
그리고 당연하게도 규원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학.
하필이면 셋 다 문제집이 달라서 번갈아 가며 봐줘야 했다.
카페인 만큼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그래도 윤희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반대로 규원이는 한 문제를 넘어갈 때마다 질문 공세를 쏟았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군.
우리는 2시간 가까이 수학 문제만 풀고 난 뒤에 김밥극락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시 스타박스로 돌아온 뒤 나는 규원이에게 통합 사회와 과학을 가르쳤다.
어느덧 해가 지고, 하늘에 짙푸른 빛깔이 그득하게 들어찼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내가 묻자 애들이 대답 대신 펜을 내려놓았다.
규원이의 얼굴을 보니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하나 끝낸 것 같은, 기분이야.”
규원이가 내리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가면 바로 침대에 엎어질 것 같은 상태.
“수고했어.”
윤희가 규원이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때 규원이가 내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영재야.”
“왜?”
“내일은 너네 집 가서 공부해도 돼?”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