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32화-You Only Live Once(1)
이틀 전인 수요일, 다사다난한 나날을 보낸 끝에 규원이가 스터디드림에 입부했다.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규원이의 목표는 중간고사 전 과목 평균 90점.
그러나 현재 규원이의 공부 수준은 모의고사 전 과목 7등급. 점수로 환산해보면 평균 30도 안 되는 꼴이다.
참고로 교실 게시판에 부착된 4월 일정표에 적힌 중간고사 일정은 4월 27일부터 5월 1일인데, 앞으로 대략 3주 남짓한 기간이다.
그러니까 겨우 3주만에 규원이의 평균 점수를 90점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번개를 맞거나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게 더 쉬울 것 같은데…….
이래서 내가 그토록 반대를 했건만.
하지만 내기에서 졌으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규원이가 입부한 날에 분명한 어조로 일렀다.
“미리 말해둘게. 중간고사에서 바로 평균 90점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규원이가 계속 백일몽을 꿀 테니까. 허황된 꿈은 하루라도 빨리 깨부숴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아냐. 이제 네가 있으니까 할 수 있어! 그리고 사람은 의지를 가진 동물이라고 하잖아? 나 이번에 진짜로 자신 있어.”
주먹을 불끈 쥔 채 규원이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떠먹여줄 거라는 기대감을 모래 알갱이만큼도 숨기지 않잖아.
“그리고 목표가 확실하니까 힘낼 수 있다구!”
뭐, 일단 공부를 하려는 의욕이 생긴 건 좋은 현상이다. 다만 이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의 영역.
“그나저나 목표 말인데, 왜 스마트폰을 원해?
“여고생의 필수 아이템이니까!”
그 이유는 앞서 들은 적이 있다.
“정말로 그것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자 규원이가 입을 다문 채 천장을 응시했다.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욜로(YOLO)니까?”
“욜로?”
되묻자 등 뒤에서 윤희가 설명해 주었다.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의미야. 미국의 전 대통령 오바마가 건강보험 개혁안을 홍보할 때 욜로라는 말을 쓰면서 유명해졌어.”
“아하.”
문장의 유래까지 알려준 덕에 지식이 하나 더 늘었다. 그 와중에 유창한 영어 발음은 덤.
“아, 응 맞아. 바로 그거.”
규원이가 곧바로 윤희의 설명을 주워 먹었다. 보아 하니 어디서 주워 들은 걸 어설프게 인용한 모양이구만.
“천하의 공부벌레도 모르는 게 있구나. 의외인 걸?”
규원이가 팔짱을 낀 채 득의양양한 얼굴을 했다. 저러고 있으니 진짜로 얄밉게 보였다.
“근데 스마트폰이랑 욜로가 무슨 상관이냐?”
“상관있지! 내가행복해지기 위해서거든. 한번뿐인 인생, 충실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이 필수라구, 필수!”
규원이가 어떤 녀석인지 새삼 깨달았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실없는 대화를 몇 마디 주고받은 뒤에 우리 셋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규원이는 이미 예고한 대로 곧장 나에게 가르침을 요구했다. 나와 윤희 사이에 놓인 가운데 책상을 떡하니 차지하고서.
그 다음 날인 목요일에도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나에게 계속 가르침을 요구하는 규원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나가며 가르치는 나. 그리고 홀로 묵묵히 공부를 하는 윤희.
그리고 금요일인 오늘도, 아마 비슷하게 흘러갈 테지.
나는 가방을 챙기고 방에서 나왔다. 벽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7시 35분.
슬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엄마는 아침거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슬기는 TV소리가 들리는데도 잘 자네.
“슬기야. 학교 가야지.”
어깨를 몇 번 흔들자 슬기가 부스스 일어나서 눈두덩을 문질렀다.
“으으응, 가기 싫어…….”
슬기가 입을 큼직하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세수부터 하고.”
슬기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흡사 좀비를 연상케 했다.
나는 TV화면으로 관심을 돌렸다.
[오늘 기온은 서울 아침 11℃, 낮에는 16℃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온화한 날씨는 다음 주까지 계속될 전망입니다. 다만, 다음 주 월요일부터 중국발 황사가 유입된다고 하니 마스크를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황사라는 단어를 들으니 확실히 4월이 왔다는 체감이 들었다.
내 기관지는 황사에 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니까 별 걱정 안 하지만. 마스크 살 돈이 아까운 것도 물론 있고.
“엄마. 나, 갔다 올게.”
현관을 나선 직후 나는 까만색 몬아미 볼펜 잉크가 간당간당한 상태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동전 지갑에 들어있는 자금은 6,230원.
몬아미 볼펜 한 자루에 300원이니 대략 5퍼센트를 쓰는 수준.
공부를 위한 지출이니 필요한 것이지만…….
오늘은 지난번과 같은 행운이 안 찾아오려나?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돈 순간,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육각형 물체를 발견했다.
행운이 찾아왔다!
속으로 만세 삼창을 하고 나서, 차가운 길바닥에서 떨고 있는 녀석을 손안에 품었다. 그런 뒤 잉크 잔량을 확인해 보았다.
무려 반이나 남아있다!
그래, 이건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야.
입김을 불고 손으로 문지르며 녀석을 깔끔하게 닦아준 뒤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
금요일 3교시는 수학 수업 시간이다.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깐깐한 인상을 지닌 노처녀이다. 깐깐한 성미 탓에 애들에게 인기 없는 선생님이지만 나는 반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지하게 수업을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칠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선생님의 말 한 마디, 말과 말 사이의 호흡에도 주의를 집중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눈동자만 살짝 굴려서 이규원의 동태를 살폈다. 내가 강조한 사항 중 하나인 수업 시간 중 졸지 않기를 잘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중간·기말 고사는 선생님의 수업 내용에 모든 힌트가 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규원은 내가 예측한 대로 교과서에 이마를 거하게박고 있었다. 벌써 3연패를 이어나가는 중.
사실 이건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다.
평소에 졸던 애들마저도 수업을 듣고 있는 상황인데, 아직도 버릇을 못 고치면 어떡하냐.
나는 혀를 차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뒤 윤희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는데,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하고 있었다.
누구 씨라아 엄청나게 비교되는구만.
규원이가 윤희의 반만큼만, 아니 발톱만큼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이것도 나의 지나친 욕심이려나?
규원이는 결국 3교시 수업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규원이에게 직행했다. 그리고 어깨를 쿡쿡 찔렀다.
규원이는 비척거리다가 고개를 들고는 나를 맞아주었다.
“오오, 한영재…….”
눈꺼풀에 졸음기가 진하게 남아있었다.
“졸리다고 바로 엎드리지 말고 좀 버티려고 해 봐.”
“어, 음……. 잠이 너무 강력해. 못 이기겠어.”
규원이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신입 부원이라고 엄청 살갑게 챙겨주네.”
옆에 있던 여자애들이 키득거렸다.
어제 규원이가 스터디부에 입부했다고 떠벌리고 다닌 탓에 모두들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야지. 빡세게 공부시킬 거라고 해뒀으니까.”
평균 90점을 노리고 있다는 부연 설명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와. 규원이 고생 깨나 하겠구나.”
규원이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애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냐, 그 고생은 내가 하는 거지.
“응. 근데 영재가 엄청 잘 가르쳐 주더라구.”
규원이의 깨알 칭찬.
“근데 내 머리로는 반밖에 이해 못 했어.”
굳이 그런 얘기를 해야 할까 싶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규원이니까.
“그럼 말짱 도루묵 아냐?”
“그러게.”
애들끼리 또 이러쿵저러쿵 말이 오갔다.
“4교시엔 20분만이라도 버텨 봐.”
규원이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나서 자리로 돌아왔다.
윤희는 오랜만에 시집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윤희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거, 관심 있어?”
윤희가 시집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당연히 내가 모르는 시인의 시집이었다.
“아, 그냥. 뭔가 하고 본 거야.”
“그렇구나.”
이윽고 4교시 사회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수업에 집중하면서도 간간이 규원이의 뒤통수를 힐끔거렸다.
규원이의 목이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마냥 자꾸만 휘청거렸다.
저 상태면 20분은커녕 5분도 못 버틸 성 싶었다. 하지만 규원이는 기적처럼 20분을 버텼고,
철푸덕!
굉음과 함께 장렬하게 엎어졌다.
어떻게든 성공은 했구만.
나는 속으로 가벼운 박수를 보냈다.
* * * *
점심시간이 찾아오자 나는 필기 노트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윤희는 이미 시집을 읽는 중이었다.
그때 규원이가 가까운 곳에서 목청을 높였다.
“영재야아!”
나는 오른쪽 귀를 손으로 막았다.
“깜짝이야.”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지금?”
되묻는 말에 규원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가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그렇게 기다릴 동안에 필기한 내용을 한 줄 더 읽는 게 낫지.
“부원이랑 친목 다져야죠, 부장니임.”
규원이가 내 팔을 잡고 아양을 부렸다. 듣기 거북하군.
“네 친구들하고 가면 되잖아.”
“먼저 갔다구.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휘리릭 사라졌다니깐.”
“차였네.”
덤덤하게 대꾸했다.
“혼자 있음 심심해애.”
이제는 아예 팔을 흔들어댔다. 무시하려고 했더니만 너무 거치적거렸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팔 좀 놔.”
결국 나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네에!”
규원이가 해맑은 표정을 했다.
그래 뭐, 한 번쯤 어울려 주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규원이는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윤희야아, 너도 같이 가자.”
규원이가 윤희 곁으로 다가갔다.
“난 됐어. 너네끼리 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절하는 윤희.
“먼저 가라잖아. 놔두자.”
“그치만.”
규원이가 아쉬워했다.
그 심정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규원이의 손목을 잡고 앞장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팔을 잡히는 입장이었는데 말이지.
아직 윤희는 규원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상태다. 더구나 규원이는 윤희와 관련된 헛소문을 퍼뜨린 적도 있고.
그러니 지금은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가 손목을 잡은 탓인지 규원이가 고분고분 따라왔다. 우리는 대기줄의 맨 끄트머리에 합류했다.
“엄청 많네. 노트 들고 올 걸.”
“이런 데선 친구들하고 얘기하면서 시간 때워야지.”
“난 너랑 달라서.”
이따금 한두 마디씩 말을 주고받다 보니 우리도 급식실에 들어왔다. 오, 이 시간에는 급식실이 가득 차 있구만.
우리는 나란히 붙은 자리에 앉았다.
“어때. 생각보다 빨리 들어오지?”
득의양양해 하는 규원이.
“뭐, 그렇긴 하네.”
우리는 수저를 들었다. 가끔은 이렇게 줄을 서서 밥을 먹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방과 후 우리 셋은 곧장 스터디부로 향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규원이와 윤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스터디부에는 나밖에 없었다.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친 끝에 윤희가 입부했다.
내가 그토록 입부를 거부하여 내기까지 걸었던 이규원도 이제는 어엿한 부원이 되었다.
윤희가 들어온 지 3주만에 들어온 신입 부원.
여전히 두 자리를 더 채워야 하는 상황이지만 한동안은 이대로 지내도 괜찮을 것이다.
나와 윤희는 항상 그래왔듯이 책상 한 칸의 간격을 두고 앉았다.
비워둔 가운데 자리는 이제 규원이의 고정석이 되다시피 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부장님!”
나와 마주한 자세로 허리를 숙이는 규원이.
“빨리 문제집부터 펴.”
규원이가 문제집을 펼치는 동안 윤희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중간고사 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한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가 가르치려는 과목은 수학.
규원이는 특히 수학 기초가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개념부터 차근차근 이해시켜야 한다.
나는 문제집에 나와 있는 개념 설명을 토대로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가며 설명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규원이.
정말로 이해하는 건지, 아니면 척수반사인지.
나는 곧바로 문제 풀이를 시켜보았다.
“으음…….”
규원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역시나 척수반사였군.
막막했다. 공부 못하는 애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 이런 기분일까.
선생 노릇을 하는 동안 부활동을 마칠 때가 다가왔다.
가방을 둘러메고 부실을 나서려는 찰나, 규원이가 한 마디했다.
“영재야. 내일 토요일이니까 다 같이 모여서 공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