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31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7)
“규원이가 계속 관심을 보이길래 나도 흥미가 동했거든.”
지아 누나가 스터디부에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관심이 있다, 흥미가 있다.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하지만 저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요 며칠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지아 누나의 목적을 들은 순간 기대를 접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부를 권해봤지만,
“지금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싶긴 한데…… 아직 확실하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어.”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너랑 윤희 말고 다른 부원은 없는 거야?”
“뭐, 그렇죠.”
지아 누나는 나와 윤희를 번갈아 보더니 힘내라고 응원한 뒤 부실을 둘러보고 돌아갔다.
물론 끝까지 입부하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 * * *
어느새 달력이 4월로 넘어갔다. 그리고 오늘은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오늘같은 날에 가장 들뜬 사람은 다름 아닌 이규원이였다.
규원이는 친구들에게 장난을 걸거나 혹은 당하면서 즐거워했다.
반면 나는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만우절 자체를 안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카운트 다운 때문이었다.
승산은 보이지 않고, 현실의 벽은 버겁기만 하고…….
하지만 마냥 손 놓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 성미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자, 가 내 인생 모토니까.
나는 1교시 쉬는 시간부터 홍보 포스터를 들고 각 반을 순회했다. 1학년 반만으로는 모자랄 듯하여 2학년 반도 전부 다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화요일 6교시가 되어서야 순회 홍보가 끝났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성과는 제로.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규원이를 의심해 보았지만,
“나 약속은 지키거든!”
라고 항변했다.
하긴 얘가 모든 반을 순회하면서 입부하지 말라고 종용할 리가 없지.
오후 5시가 되어 모든 수업이 종료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윤희에게 스터디부 열쇠를 넘겨준 뒤 홍보물 60장을 챙겨 들고 정문으로 달려갔다. 참고로 점심때 학생회장으로부터 외부활동허가는 받아놓은 상태였다.
“스터디부입니다! 관심 있으면 연락 주세요!”
힘찬 목소리를 내며 홍보물을 돌렸다. 이미 각 반을 순회한 탓인지 내 얼굴을 알아보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스터디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오늘도 안 왔네.”
윤희의 목소리에도 옅은 실망감이 배어 있었다. 내가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는데도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으니까.
벽시계를 확인해 보니 7시 15분이었다. 이제 부 활동을 마쳐야 할 때.
“돌아가자.”
나의 선언에 윤희가 보던 책을 덮었다. 우리는 짐을 챙긴 뒤 부실을 나섰다.
윤희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 인생…….
* * * *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슬기가 그새 이부자리를 펼쳐놓고 그 위에 엎드렸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된댔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한 소맇ᄌᆞ 슬기가 밍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20분 기다렸다가 누우라고 항상 얘기하잖아.”
“눼에.”
슬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허구한 날 하는 잔소리니까 듣기 싫겠지. 하지만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도 도통 듣지를 않으니까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일 뿐.
슬기는 이부자리에 철퍼덕 소리가 나게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오빠.”
“왜?”
“요새 무슨 일 있어? 요 며칠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얼굴에 너무 드러내고 다녔나.
나는 양쪽 뺨을 한 번씩 문질러보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슬기가 질문했다.
“오빠 뭐 해?”
“이거? 볼 마사지.”
민망해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스터디부가 그렇게 좋다고 노래를 불러대더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아냐. 그런 일 없어. 그리고 내가 언제 노랠 불러댔다고 그래?”
적어도 내 기억상 집에서 스터디부가 좋다고 노랠 불러댄 적은 없다.
“어? 아니었어?”
“슬기야. 기억에 착오가 생긴 모양이구나. 머리 괜찮니?”
나는 슬기를 향해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닌데. 분명히 그랬던 것 같은데…….”
슬기가 검지로 자신의 옆머리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문고리를 돌리고 방문을 열었을 때 슬기가 손뼉을 쳤다.
“맞다! 그런 적 없었네.”
목청을 높여 말하는 슬기.
“내 말이 맞지?”
“응.”
슬기가 고개를 움직였다.
“나 이제 공부한다.”
“공부벌레 싫어…….”
슬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짤막한 웃음을 내뱉고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아서 영어 문제집을 펼치고 몬아미 볼펜을 쥐었다. 그 직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슬기가 내 안색을 살폈을 정도면 정말로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래도 12살이고 사춘기니까 그 정도 눈치는 생긴 걸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슬기에게만큼은 내 시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상념에 빠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가지를 뻗어나가려 했다.
나는 양쪽 뺨을 세게 때렸다. 얼얼한 통증이 나를 상념으로부터 건져 올렸다.
이제부터는 무조건 집중이다.
나는 문제집 속으로 들어갈 듯이 몰입했다.
한참을 하던 중 문밖으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아.”
거실로 나왔더니 슬기가 먼저 엄마를 반기고 있었다. 보통 이 시간이면 자고 있을 애가 웬일이래.
“엄마 왔어?”
“응. 다녀왔어.”
엄마가 거실에 올라서자마자 기지개를 쭉 켰다.
그 사이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저녁상을 차렸다.
슬기는 이부자리로 돌아가서 엎드렸다. 오른손에 몽당연필을 쥐고 있었다.
엄마에게 상을 대령한 뒤 슬기에게 다가갔다.
“뭐 해?”
“낙서.”
연습장에는 초현실주의 화가들도 저리가라 할 정도로 기괴한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글자로는 묘사하기 어려운 그런 무언가.
“이게 뭐야?”
슬기가 고개를 쳐들고 씨익 웃었다.
“오빠.”
“야”
한 대 쥐어박을 작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냐 아냐. 농담이야, 농담.”
슬기가 얼른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외쳤다.
“사실은 그냥 손 가는 대로 끄적거렸어.”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자. 내일 학교 가야지.”
“응. 그래야지. 슬슬 잠도 오니깐…….”
슬기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런 뒤 연습장과 몽당연필을 머리맡에 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못 끝낸 공부를 마저 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 엄마가 목에 수건을 걸친 채 방에 들어왔다.
“웬일이야?”
펜을 놓고 말문을 텄다. 엄마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요 며칠 기운이 없어 보여서. 무슨 일 있니?”
역시나 엄마는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슬기에게도 들킨 마당에 엄마가 모를 리 없지.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나를 상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역시 털어놓는 편이 좋다. 엄마라면 믿고 말할 수 있으니까.
나는 엄마에게 근 일주일 간 있었던 일을 풀어냈다.
이규원과 내기를 걸었던 일.
부원을 모집하기 위해서 했던 모든 홍보 활동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내기에서 지게 생긴 지금의 상황에 대해.
엄마는 이따금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안 따라오니까 실망감이 크더라고.”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잖니.”
“머리로는 알지만…….”
엄마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왜 안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니?”
“너무 터무니없는 목표를 이루려고 해서. 게다가 오지랖도 넓고.”
고자질을 하고 나서 이규원의 현재 성적과 목표 성적도 함께 얘기했다.
“재밌는 애구나.”
엄마가 후한 평가를 내렸다.
“엄마라면 흔쾌히 부원으로 받을 것 같아.”
“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스터디부에 들어오려고 하는 애가 그 애뿐이잖니.”
윽!
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 띄워주는 친구가 있으면 즐거운 부활동을 할 수 있을 거야. 당장에는 몰라도 나중에는 그 애 덕을 보게 될지도 모르고.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덕을 볼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데.
엄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
“잘 생각해보렴. 답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니까.”
엄마가 일어섰다.
“너무 늦게까지 하진 말고.”
“좀만 더 하고. 엄마 잘 자.”
나는 놓았던 몬아미 볼펜을 다시 손에 쥐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나는 그 단어를 입 속에서 되뇌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와닿지 않았다.
* * * *
대망의 수요일이 찾아왔다.
내기 마지막 날. 일명 디데이(D-Day).
오늘은 홍보 활동을 하러 다니지 않았다.
끈질긴 것은 분명 나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것도 성과가 보여야만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법.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봤자 쓸데없이 에너지만 축내는 꼴이다.
그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일.
나는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기운이 좀 생겨났다.
어젯밤 엄마와 나눈 대화 덕분일지도 모른다.
7교시 쉬는 시간.
나는 노트 필기를 보는 대신 다음 수업을 대비한 예습을 했다.
“한영재 씌이.”
규원이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릴 내며 양손을 내 책상에 올렸다.
팔목에 걸린 분홍색 팔찌.
액세서리를 보는 눈이 없는 내가 봐도 싸구려 티가 물씬 풍겼다. 취향인 듯하니 별말은 안 하겠다만.
의식하지 않은 한숨이 먼저 새어나갔다. 몸의 반응은 이다지도 솔직하다.
“후후. 부원 모집은 좀 되었는가?”
어미에서 한 옥타브를 올린 규원이.
얘는 정말이지, 사람 속 긁는 데 도가 텄다.
“몰라.”
나는 상대하기 귀찮은 티를 한껏 내며 대답했다.
“오늘로 내기 끝나는 거 알지?”
나는 교과서에서 눈을 떼고 규원이를 일별했다.
의기양양한 표정. 입꼬리가 대놓고 귀밑에 걸려 있었다.
다 알고서 온 거구만.
“글쎄다. 내기가 있었던가?”
나는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헐. 시치미 떼는 거 보소.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니다.”
“쳇.”
나는 혀를 찼다.
“우와, 완전 쪼잔하다.”
“너도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눈을 흘겨도 규원이에겐 눈곱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나라면, 얼씨구나 신입 부원이다, 하면서 받았을 텐데?”
어젯밤 엄마도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이규원을 응시했다.
“응? 왜? 나 오늘 좀 이뻐?”
규원이가 검지로 자신의 볼을 찌르면서 귀여운 척을 했다.
……아무리 봐도 얘한테서 덕을 볼 것 같지가 않다.
“아냐. 잠깐 생각을 좀 해봤어.”
나는 손을 내저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무슨 생각?”
“좋은 생각.”
“그거 월간 잡지 아냐?”
“근데 쉽지는 않다.”
“잠깐만. 우리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내 생각에 몰두해 있다 보니 대화의 맥락이 어긋나버렸다. 뭐, 아무렴 어떠냐 싶지만.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어찌된 건?”
규원이가 자신의 관자놀이 근처에서 검지 손을 빙빙 돌렸다.
“절대 아냐.”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규원이가 입을 가린 채 실실 웃었다.
“암튼, 나중에 스터디부 갈게. 그럼 이만!”
규원이가 총총걸음으로 제자리에 갔다.
교과서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 * * *
“너네, 4월 말에 중간고사 있는 거 알고 있지?”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의 서두였다.
“이제 4월이니까 각자 시험 준비 잘 해둬라.”
애들이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외에 한두 가지 전달 사항을 전파하고 나서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섰다.
규원이는 1등으로 가방을 싸들고 나갔다. 어디서 시간을 때우고 올 요량으로 보였다.
나와 윤희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가방을 챙긴 뒤 스터디부로 향했다.
부실 앞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각자 할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와 윤희는 거의 반사적으로 벽시계를 확인했다.
5시 반.
이 타이밍에 등장할 만한 인물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나 왔어.”
문을 열자 내기의 승리자인 규원이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어깨를 잔뜩 펴고 있었다.
“내가 이긴 거 맞지?”
규원이가 고개를 내빼고 부실 안을 살폈다.
“그래.”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제 두 말하기 없기다, 알았지?”
규원이가 검지를 세워 보였다.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 듯 짤막한 한숨을 내던졌다.
“나, 진짜로 열심히 할 거니까!”
오른손을 내미는 규원이.
“그 말, 꼭 지켜. 엄청 빡세게 갈 거니까 각오하고.”
“이미 각오했다구! 스마트폰을 위해서라면!”
규원이의 눈에서 광채가 보였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이로써 규원이는 스터디드림의 2번째 부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파란을 불러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