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8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4)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이 깔끔한 화면.
결국 윤희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했다.
메시지가 너무 경박했나. 아니면 괜한 참견을 해버린 건가.
“음…….”
이런 사소한 일로 서로 불편해지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은데 말이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 어느덧 학교에 도착했다.
“안녀엉.”
도연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가볍게 손을흔들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어제 그만한 소동이 있었던 것 치고는 조용한 편이었다. 얘네들 성격상 그냥 넘기지는 않을 텐데…….
윤희와 관련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걸까.
의문을 접어둔 채 내 자리로 향했다.
윤희는 웬일로 시집이 아닌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의자를 질질 끌어서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윤희는 이쪽에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도 모른 체하는 기색이었다.
스터디부에 들어와달라고 권유하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
이럴 줄 알았으면 정문에서 홍보물 배부하는 것도 혼자 할 걸 그랬나.
나는 가방을 풀면서도 곁눈으로 윤희의 동향을 살폈다.
윤희의 시선은 좀처럼 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그 모습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배열된 문단을 읽어 내려가는 맑은 눈동자.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다가 최소한의 손동작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마치 현악기의 현을 튕기는 듯한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
내 예상보다도 읽는 속도가 빨랐다. 나라면 윤희보다 한참 늦게서야 페이지를 넘겼을 텐데.
그나저나 난 왜 계속 눈치만 살피고 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이런 행동은 나답지 않잖아.
나는 윤희의 어깨를 살며시 쿡 찔렀다. 윤희가 교실에서 나를 부를 때마다 썼던 방법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자 윤희가 눈길만 슬쩍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관찰하던데.”
예상한 대로 이미 눈치채고 있었군.
“어, 그러니까, 음.”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윤희가 책을 내려놓고 차분한 눈길를 보냈다.
“어제 있었던 일이 계속 신경이 쓰여서…….”
“문자라면 어제 확인했어.”
느닷없이 본론을 끌고 오는 윤희.
윤희만의 직설 화법이 좋기는 한데, 가끔씩섬찟할 때가 있다.
“문자에 답장하는 것보다 직접 대면하고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 윤희.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었구만.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답장이 안 와서 노심초사했거든. 내가 실수했나 싶기도 했고.”
윤희의눈썹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걱정했구나?”
“당연하지.”
이부자리에서 한참이나 뒤척였을 정도니까.
“괜찮다는 그 말은, 네 진심이지?”
“응.”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찬가지로 어제 내가 했던 사과도 전부 진심이었어.”
“알고 있어.”
내 대답에 윤희가 살며시 고개를 움직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 이 얘기는 이걸로 마무리 짓자.”
윤희의 발언에 그제야 갑갑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윤희가 싱긋 웃자 나도 미소로 화답했다.
진심과 진심은 결국 통하게 되는 법일지도 모른다.
HR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애들이 각자의 자리로 부리나케 되돌아갔다.
나도 윤희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교재를 내려다보았다.
“영재야.”
윤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렀다. 돌아보자 반듯하게 접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홍보 멘트. 새로 적어봤어.”
라고 친절한 답변이돌아왔다.
“저번에 쓴 건 마음에 안 들어 하길래.”
나는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너무 티냈나 보네.
“이것도 마음에 안 들면 기탄없이 얘기해 줘. 난 괜찮으니까.”
“그러면 내가 나쁜 놈 될 것 같은데…….”
“괜찮아.”
윤희가 부드럽게 일렀고, 나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공부.
우리는 이제 지쳤습니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야 말로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혼자 하려니 막막하지요?
망설이는 당신, 더 이상 망설이지 마세요.
헤매이는 당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스터디드림(StudyDream)에서 우리 함께 해요!
곧이곧대로 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저번 것보다 훨씬 좋았다. 좀 더 감성을 자극하며 호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홍보 포스터에 내걸었던 표어를 적절하게 사용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장인 내가 오롯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듯한 뉘앙스가 사라진 것이 가장 좋았다.
나는 윤희의 어깨를 건드린 뒤 OK 사인을 보냈다. 윤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쪽지를 상의 주머니에 챙긴 뒤 교재로 시선을 내렸다.
……잠깐만.
문득 방금 있었던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윤희가 쪽지를 건네기 위해 나를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았나?
책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윤희의 옆얼굴을 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 * * *
마음에 드는 홍보 멘트가 생긴 덕에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이제 필요한 준비는 나의 마음가짐뿐.
이제 다른 반을 돌면서 스터디부를 홍보해야 하니까.
참고로 다른 반은 전부 여학생들뿐이다.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다져야만 한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필기 노트가 아닌 홍보 멘트를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맞도록조금씩 더 보완해 나갔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어, 나에게 안성맞춤인 홍보 멘트가 완성되었다. 때마침 교실이 텅텅 비어있으니 노트에 옮겨 쓴 홍보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
소리를 너무 크게 내는 건 부끄러워서 웅얼거리는 느낌으로.
멘트를 외우는 일에 집중하는 탓에 누군가 접근해 오는 것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왁!”
“으앗! 씨…….”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히히히. 리액션 완전 최곤데?”
범인은 바로 이규원.
“야 너.”
“엄청 집중하고 있길래, 한 번 해봤지.”
규원이가 V자 사인을 흔들며 히히덕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쓸데없이 사람 성질 살살 긁는 짓은 특기구만.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 이만 사라져줄래?”
“사라지라니! 또 섭섭하게 군다. 우리 하루이틀 사이도 아니잖아.”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던 거냐.
어이가 없어서 쳐다봐도 규원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데 뭐 보고 있어?”
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려고 해서 나는 얼른 노트를 덮었다.
“지금 숨긴 거 뭐야아? 혹시, 고백편지?”
어머어머. 규원이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내는 소리였다.
머릿속에 있는 게 스마트폰이랑 연애뿐인가?
대꾸하기 귀찮았다. 하지만 무시로 일관한다고 포기할 애가 아니다.
게다가 멋대로 오해해서 또 헛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르고.
곤란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멘트야. 스터디부 홍보할 때 쓰려고.”
“아, 그거. 엄청 열심히 하는구나.”
남 일인 양 말하는 규원이.
내기를 건 당사자는 우리 둘인데, 어째서 나만 이토록 고생을 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이건 좀 불공평한 거 아닌가?
하지만 얘를 받지 않기 위한 일이니 감수해야겠지…….
“나 그거 봐도 돼?”
“아니. 절대로 안 돼.”
나는 노트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와. 너 까칠 맞다. 차도남인 줄.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그렇게 생긴 게 대체 뭔데?”
퉁명스런 어조로 반문했더니 규원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잘생긴 거?”
“너 은근하게 외모 비하한다?”
그러자 규원이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냐! 비하라니. 절대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냐. 너도 나름, 어……. 음…….”
규원이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때가 있다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그냥 말하지 마.”
“어, 음. 그러니까……. 나름 괜찮게, 생겼, 다?”
“하지 말라고.”
“넵.”
칼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막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니까.”
위로랍시고 하는 말인데, 이다지도 위로가 안 될 줄이야.
괜찮다. 스스로도 못 생겼다는 자각은 하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 이런 걸로 상처받지는않는다. 진짜로, 안 받는다.
……왜 눈에서 땀이 나려는 것 같지?
“진짜로 못 봐줄 수준은 아냐! 내가 장담할게.”
규원이가 자신의 빈약한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냥 딴 데로 사라지면 안 될까?”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규원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영재야 지지 마! 세상은 외모가 다가 아니라구.”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나저나 윤희 얘는 어디 갔대?”
규원이가 화제를 돌렸다.
옆자리를 확인해 보니 정말로 윤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벽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12시 15분.
내가 이규원을 상대하는 동안 급식실로 향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너랑 윤희가 정문 앞에서 가면 쓰고 놀았다면서?”
소문이 또 와전된 모양이었다.
“놀았다니. 스터디부 홍보물 돌린 거라고. 가면 쓴 건 윤희 혼자였고.”
“아아. 그래? 난 너도 가면 썼다고 들었는데.”
이래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아무튼, 어제 그 일 때문에 애들이 윤희한테 엄청 관심을 가졌단 말야. 나도 그렇고. 어제 좀만 늦게 하교했으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이상했다. 오늘 아침에 애들의 반응이 상당히 미적지근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모두들 윤희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그런 것 치곤 반응이 별로 없던데.”
“아, 그게…….”
규원이가 머뭇거렸다.
나는 어서 말해달라고 재촉했다.
“음. 너 오기 전에 애들 몇 명이 관심을 보이면서 다가갔거든. 근데 윤희가 아주 그냥 얼음공주 벨사처럼 쌀쌀 맞게 굴더라고. 그런 뒤에는 애들 질문 다 무시해 버리고…….”
그제야 아침에 있었던 정황을 알게 되었다.
우선 걔들이 조심성 없게 다가간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윤희도 마냥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말인데, 윤희 걔는 왜 가면을 쓰고 나타난 거래? 너는 윤희랑 친하니까 알 거 아냐.사알짝만 귀띔해 줘.”
규원이가 다짜고짜 자신의 귀를 들이밀었다.
“안 돼.”
규원이의 머리를 밀어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괜히 싸움 내려고 하지 말고.”
“오오 한영재. 입이 무거운 사나이로군!”
적어도 너보단 말이지.
“규원아!”
누군가가 규원이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난 방향은 교실 뒷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지아 누나였다.
누나는 문틀에 머리를 기댄 채 서 있었다. 오늘은 왼쪽 옆머리에 큐빅이 박힌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화사한 사람이로구만.
“심심해서 놀러 왔어.”
“언니이.”
규원이가 지아누나 앞까지 쪼르르 달려갔다. 영락없이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꼴이었다.
“어, 영재도 있었네? 안녕.”
“안녕하세요.”
가볍게 목례를 했다.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재밌는 얘기!”
규원이가 활기 넘치게 화답했다.
“그랬구나. 우리 잠깐 자리 옮길까? 아, 영재야 잘 있어. 다음에 봐.”
지아 누나가 나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규원이와 함께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어느샌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아 누나,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 * * *
5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홍보 멘트가 적힌 노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었다.
이제 결전을 치를 때.
각오를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재야. 너 어디 가?”
누군가가 내 동향에 관심을 보였다.
“1반에.”
주위에 있던 애들이 경악으로 눈을 치떴다.
“영재가 우릴 버렸어!”
“1반에 가다니. 이건 배신이야.”
“임자가 누구냐!”
“우리들로는 만족 못하겠다는 거야?”
아니, 님들 왜 그러세요…….
“스터디부 홍보하러 가는 거라고!”
목청껏 외쳤다. 그런 뒤 성큼성큼 걸어서 1반 교실에 갔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눈총들을 무시한 채 심호흡을 내쉬고는 1반 교실 문을 열었다.
“저기, 안녕?”
손을 들어 올리자 스무 명 남짓한 애들이 하던 동작을 멈췄다.
일제히 몰려드는 눈길. 하나 같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쟤, 한영재 아냐?”
“어제 가면 쓴 애랑 같이 있던?”
“게다가 쟤 입학식 때 수석 대표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내 귀에도 다 들렸다.
모두에게 주목을 받으니 억눌렀던 긴장이 다시금 새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은 홍보를 제대로 해내는 일에만 집중하자.
반장으로 보이는 애가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왔어?”
“스터디부 홍보를 좀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아, 그거. 응. 해도 돼.”
나는 교탁 앞으로 다가가서 흠흠, 헛기침을 하고 난 뒤 외워둔 홍보 멘트를 또박또박 읊어나갔다.
대체로 관심 있어 하는 분위기였는데, 선뜻 들어오겠다고 하는 애들은 없었다.
“들어오면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공부에도 엄청나게 도움이 될 거고.”
그럼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미미했다.
각오하고 왔는데 이건 좀 너무한 처사 아닌가.
“그래.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아직 다른 반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 몇 명은, 아니 한 명쯤은 입부를 희망할 것이다.
희망을 품고 돌아선 순간 누군가 목소릴 냈다.
“저기.”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떤 여자애가 손을 반쯤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 관심 있어.”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