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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27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3) (27/131)



〈 27화 〉27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3)

부활동 시간 내내 우리는 침묵 속에서 공부를 했다. 고요하다 못해 갑갑함마저 느껴지는 공기.
보통 이런 환경이면 집중이 더욱  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공부를 하는 중간중간에 윤희를 곁눈질로 살폈다.

윤희는 시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더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어정쩡하고 불편했던 부활동이 끝났다.
우리는 별관 건물을 나섰다.

저녁인데도 날씨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4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나란히 선 채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갔다. 어깨와 어깨 사이의 간격은  하나만큼 벌린 채.
대화가 오가지 않으니 우리 둘의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이내 주저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침체된 공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덧 경사로의 끝에 다다랐다. 이제 헤어져야  때.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희가 눈썹을 움찔하더니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잘 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윤희가 평소보다 낮은 톤으로 말했다.

“오늘 일은, 미안해.”

이것으로 벌써 3번째 사과였다.
생활지도부에서 한 번, 스터디부에서 한 번, 그리고 방금 전 사과까지.

“아냐. 마음 쓰지 마. 불이익당한 거 없잖아.”
“그래도…….”
“괜찮대두.”

윤희의 말허리를 잘랐다.

“……알겠어.”

마지못해대답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봐.”

나는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윤희가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윤희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집까지 앞으로 30분.

원래 이때에 집에서 할 공부계획을 세우곤 한다. 최근에는 규원이와의 내기 때문에 스터디부 홍보 계획을 구상하는 중이기도 하고.
하지만 오늘은 나에게 사과하던 윤희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아마 본인 딴에는 내게 민폐를 끼쳤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니 괜찮다고 해도 몇 번이고 사과한 거겠지.

나는 윤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용기를 내어 내 부탁을 들어주었을 테지만 여전히 긴장이 해소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면을 써서라도 창피함을 덜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결국 그것이 생활지도부실에 불려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원 내용조차도 교내에 가면을 쓴 이상한 애가 나타났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윤희는 책임감을 크게 느낀 모양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책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윤희가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에 되레 신선한 느낌을 주기까지 해서 나쁘지 않았다.
사진으로  남긴  아쉬울 따름.

그러니까 윤희가 너무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마음 쓰지 말라는 나의 말이 과연 윤희의 마음에 와닿았을까?
나의 진심을 윤희가  치의 오해도 없이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반대로 윤희의 진심을 나는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사람 마음을 움직일 줄은 모르는구나.

언젠가 윤희에게 들었던 말.
그때 나는 반문했다. 너는 알고 있냐고.
윤희는 자신도 모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밖에.
서로가 진심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속이 가득 찬 달 주위로 희뿌연 구름 떼가 몰려들고 있었다.
폐부에서부터 올라온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세상사 참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 * * *



8시가 되어 집에 도착했다.

“나 왔어.”
“오빠 어서 와.”

슬기가 부엌에서 후다닥 달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TV나 보고 있을 애가 웬일이지?

“슬기야. 오늘은 웬일이야?”

혹시나 이번에도 쪽지시험을 잘 봤다거나?
만약 그런 이유라면 당장에 마트로 달려가서 슬기가 가장 좋아하는 크릴깡을 사올 것이다.

“계란프라이 연습하려구 그랬어!”

슬기가 배시시 웃었다.
쪽지시험이 아니었다니……. 나는 속으로 아쉬운 마음을 삼켰다.

“저번에 소금 안 넣었던 것 때문에?”
“응!”

대수롭지 않게 했던 말이 슬기에게는 여러모로 자극제가  모양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때 가르쳐 주겠다고 했었지. 스터디부 홍보에 정신이 팔려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나 오늘, 4개나 구웠다.”

슬기가 손가락 네 개를 펼쳐보였다.

“그리고 하나밖에 안 태웠구!”

슬기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잠깐, 4개?
오늘 아침에 확인했을  4개가 남아있었는데, 그걸 한 번에 다 써버리다니.

“슬기야.”
“응?”
“연습이라고 해도 4개를 쓰면 어떡하냐. 계란 반찬은 3일에 한  먹는 건데…….  2개 정도로 끝냈어야지.”
“그, 그게……. 하다 보니까 재미가 들려서…….”

슬기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다시피 했다.
큰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식재료는 아껴 먹는 것이 좋으니까  마디 한 것이다.

“오, 오늘만이니까.”
“그래. 다음부터 주의해.”
“응. 알았어…….”

뒤집개를 든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슬기.
나는 가방을 벗은 다음 부엌으로 향했다.
밥상 위에 계란 프라이를 담은 접시가 3개 놓여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프라이팬 위에서 거의 다 익은 참이고.

“이 정도면 됐네.”

나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나서 확인차 한 번  물었다.

“소금은 다 쳤지?”
“응. 확실하게 쳤어.”

머리를 크게 움직이는 슬기. 슬기의 눈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 있었다.
시식단의 평가를 목전에 둔 식당 사장님 같은 모습이었다.

“뒤집개 줘 봐.”

슬기가 나에게 얌전히 뒤집개를 건넸다.
나는 프라이팬에 누워있는 계란프라이를 뒤집어 보았다. 갈색으로 변한 부분이 있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맛이다.
하지만 맛을 보기에 앞서 접시에 담겨 있는 계란프라이를 먼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뒤집개를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나 갑자기 엄청 떨려…….”

슬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남매는 그만큼 진지했다.
고작 계란프라이 하나를 가지고!
첫 번째 계란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춰보았다.
윗면과 아랫면 전부 하얗게 익은 상태였다. 갈색빛깔은 보이지 않았다.
노른자를 터뜨리지도 않았고.
완벽한 반숙. 참고로 반숙은 내 취향이다.

“1번은 합격.”

슬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체 없이 2번째 접시에 있는 것을 살짝 집어 들었다.
노른자를 터뜨려서 흰색과 노란색이 마치 태극 문양처럼 섞여 있었다.
완숙도 괜찮지.
다만 좀 진한 갈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2번은, 불합격!”
“으으, 저건 나도 불안했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마지막인 만큼 나는 평가에 더더욱 신중을 기했다.
2번과 마찬가지로 노른자를 터뜨린 완숙.
그러나 뒤집는 과정에서 실수가 나왔는지 가장자리 모양이 좋지 않았다.
나는 슬기의 기색을 힐끔 살펴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계란 프라이를 살짝 들춰보니 적당하게  익은 상태였다.

“프라이팬에 있는 것까지 해서 합격!”

무려 75%의 합격률을 달성했다!

“와아아!”

슬기는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
비록 맛을 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외관이면 문제없을 것이다.
슬기를 거실로 보내놓고, 나머지 준비는 내가 했다.
밥과 김치, 계란국. 그리고 계란프라이가 4접시. 덕분에 밥상이 여백 없이 가득찼다.

우리는 거실에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밥을 먹기에 앞서 가장 좋아하는 반숙 프라이를 잘라서 입에 넣었다.
무(無).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슬기야. 소금   아니었어?”
“응. 전부 다 간했는데.”

이번에는 완숙을 먹어 보았다. 입 안에서 깊고 진한 바다의 풍미가 느껴졌다.
모양이 좋지 않은 계란프라이도 마찬가지로 짭쪼름했다.
나는 얼른 밥 한 숟갈을 욱여넣었다.
마지막으로 시식할 것은 약간 태운 계란프라이.
그때 슬기가 숨을 삼키며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오빠가 프라이팬에서 꺼낸 건 소금 안 쳤어.”

합격률 75%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슬기야. 아직 계란 프라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것 같구나.”
“아깐 하나 빼고 합격이랬잖아?”

나는 반숙 계란프라이를 가리키며 먹어보라고 했다. 슬기가 한 조각을 삼켰다.

“아무 맛도 안 나.”

나는 바로 완숙 계란프라이를 먹어보라고 했다. 슬기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든 음식은 적당한 간이 중요하다고.”

숟가락으로 엄마가 해준 계란국을 떠먹었다.
알맞은 소금 간. 부드럽게 삶긴 계란 덩어리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래. 바로 이 계란국처럼.”

 말에 슬기가 계란국  숟갈을 후루룩 삼켰고 대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엄마의 손맛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폭풍 같았던 계란프라이 테스트가 지나가고 우리는 밥공기에 집중했다.
그러던  슬기가 말문을 열었다.

“오빠. 오늘 친구가 얘기해 주던데, 자기네 오빠는 학원을 하루에 두 군데나 가는데도 자기보다 공부를 못한대.”
“그래?”

중학생 때 주변에서 그런 애들을 꽤 많이 봐서 전혀 놀랄  없는 얘기였다.

“근데 어제는 학원  빼먹고 PC방을 갔다는 거야. 나중에 아빠한테 죽도록 맞아서 손이 닳도록 싹싹 빌고 난리도 아니었대.”
“그렇구나.”
“걔 오빠는 오빠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부러워할까?”

아마 자기랑은 인종이 다르다고 여길 것이다. 아니면 시샘을 하거나.
하지만  생각을 굳이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난한 대답을 택했다.

“글쎄다?”

* * * *



방으로 들어왔다.
교복을 벗던 중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쪽지가 생각났다. 바로 윤희가 작성한 홍보 멘트 쪽지였다.
나는 쪽지를 꺼내서책상에 올려두었다. 그런 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등을 켜고 쪽지를 펼쳐서 홍보 멘트를 한  더 읽어보았다.

We Go Together!
혼자서는 하기 힘든 공부, 같이 하면 수월해져요.
영재 중의 영재, 스터디부의 부장 한영재가 당신의 공부를 책임져 드립니다.
다양하게 구비된 교재, 편안한 책상과 의자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걸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
함께 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은 참 좋다.
우리가 홍보물에 내건 표어, ‘헤매지 말아요. 망설이지 말아요. 우리 함께 나아가요’ 와 일맥상통하고.
다만 전체적으로 너무 무난했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듯한 뉘앙스도 마음에 들지 않고.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유희도 미안한 말이지만, 그닥 재미가 없다.

이대로는 부족하다.
 더 강렬한 문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윤희에게 마냥 맡길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노트를 펼치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멘트에 담겨야 할 내용 자체가 스터디부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까?
편안한 책상,  구비된 교재, 그리고, 조용하여 집중이 잘 되는 환경?
아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약하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집중 잘 되는 환경이라면 독서실이 최고봉이고.

하지만 이런 것 말고는 생각 나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규원이와의 내기가 쉽지 않을지도…….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 들어왔지만 얼른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다고.
어쩌면  홍보 문구를 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실전에서는 즉흥적인 애드리브가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말발을  번 믿어봐야 하는 건가…….

나는 노트를 치우고 수학 모의고사 문제집을 펼쳤다. 2회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산  보름도  됐는데. 내일 미래 책방에 가서 새 문제집을 사야겠구만.
가볍게 1회만 풀고 나서 바닥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 오늘 윤희가 보인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전화나 해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참견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으니까.
문자메시지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자판을 꾹꾹 눌러가며 메시지를 작성했다.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말아 ㅎㅎ 난 진짜루 괜찮으니깐!」

경박해 보이려나?
그래도 별일 아니라는 식의 어필을 하고 싶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후 잠자리에  때까지 윤희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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