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2)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윤희가 이럴 것이라고는 정말로 먼지 한 톨만큼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홍보물을 배부해야만 한다.
“어, 음. 파격, 적이다…….”
수습하려고 꺼낸 멘트인데 전혀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그만 쳐다봐.”
윤희가 내 눈길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웬일로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본인도 상당히 창피한 꼴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하얀 마스크의 입 부분이 막혀 있어서 목소리가 울리듯이 들리는 건 흠이었지만.
윤희의 우스꽝스런 모습 때문인지 학생들이 하나둘 관심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쟤 뭐야? 코스프레 같은 건가?”
“관심종자인가 봐.”
“…….”
아무 말도 못하는 윤희.
나는 윤희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훑어보았다. 얼굴을 완전히 뒤덮는 하얀마스크. 검은 테이프로 가린 명찰.
문제라면, 반드시 가렸어야 할 연보랏빛 머리칼은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는 점.
이 학교에서 연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윤희 말고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태반은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차라리 가발도 준비하지 그랬어.”
“시간이 모자랐어…….”
가면을 써도 여전히 부끄러운지 윤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학생들이 우리를 에워싼 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윤희가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다가,
”찍지 마세요!“
하고 외치며 양팔을 X자로교차시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윤희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들 찍고 있잖아!”
오히려 당당하게 정당성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소동이 커진 탓일까, 학생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둘이서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예상을 한참이나 웃도는 열렬한 반응.
마치 연예인의 스캔들에 떼거지로 몰려든 기자들과 같았다.
아마 여기 있는 애들 태반은 페이지북이나 트이따 같은 곳에 올려서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겠지.
부장으로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하지만 윤희의 우스꽝스런 변장을 언제 또 볼 수 있으리.
나는 홍보물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휴대폰을 꺼냈다.
심윤희. 딱 한 장만 찍자. 진짜로 딱 한 장만.
미리 카메라 기능을 실행해 놓은 뒤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치 백단인 윤희에게 그대로 걸리고 말았다.
“찍지 마.”
윤희가 손으로 내 휴대폰 액정을 감싼 채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는 와중에 어떻게 알아챈 거냐…….
“아, 알았어. 넣을게. 넣으면 되잖아.”
그제야 윤희가 휴대폰을 놓아주었다.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 이제 어떡해야 하냐?
난감함을 느끼던 찰나에,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 이 상황을 이용해 보자.”
“홍보물 배부하는 거?”
역시 척하면 척이구만.
“응.”
“그래. 어차피 사진도 찍혀버렸고.”
이미 자포자기한 어조였다. 나는 발 빠르게 행동을 개시했다.
“스터디드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게 뭐야?”
관심 어린 질문.
윤희가 이목을 끌어준 덕분이었다.
“저렇게 가면 쓰고 놀기도 하나요?”
“아뇨. 그건 절대 아니구요.”
스터디부에 약간 이상한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은 무시하는 걸로.
윤희의 동향을 살펴보니 내가 하는 것처럼 홍보물을 돌리고 있었다. 참고로 여전히 하얀 마스크를 쓴 상태였다.
하긴 이 상황에서 벗으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하겠지.
윤희는 이따금 스터디부예요, 라고 말하며 홍보물을 건넸다.
그러던 와중에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영재야!”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눈길을 돌려보니 도연이와연수가 있었다.
“심윤희만 있는 줄 알았더니 너도 있었구나.”
도연이가 반대편에서 홍보물을 돌리고 있는 윤희를 바라보았다.
“쟤는 왜 가면을 썼대? 어차피 알 사람은 다 눈치깠을 텐데.”
연수가 나에게 물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막 튀는 행동할 애처럼 안 봤는데. 오늘은 꽤 파격적이네.”
연수가 윤희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근데 둘이서 뭐 했어? 진짜로 쇼한 거야?”
“스터디드림 홍보 중이었어.”
나는 도연이에게 홍보물 한 장을 건네주었다.
“아, 스터디부……. 심윤희도 부원이었구나.”
“응. 맞아.”
“나는 그때 너 혼자 홍보하길래 부원이 너뿐인 줄 알았거든.”
확실히 그런 오해를 살 만했다. 윤희가 그런 걸 떠벌릴 성격이 아니니까.
“허얼, 둘이 그런 사이였음?”
연수가 머릿속으로 꽃밭을 떠올리는 듯하여 얼른 해명했다.
“거기에도 깊은 사정이 있거든.”
“은근히 비밀이 많네, 너.”
도연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연수는 옆에서 옳소,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변에 모여있던 인파가 어느새 다 사라졌다.
윤희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가면을 쓴 상태로.
“윤희 안녕?”
“아……. 응. 안녕.”
도연이의 정다운 인사에 윤희가 어색하게 손을 들고 화답했다.
윤희의 수중에는 홍보물이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아마 가면의 효과 때문인 듯했다.
반면 내 손에는 홍보물 3장이 남아있었다.
도연이가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짧게 소리쳤다.
“아, 우린 이만 가봐야겠다. 너희들도 수고해. 신입 부원 많이 모집하길 바랄게.”
그런 뒤 도연이가 파이팅을 외쳤다. 연수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나서도 윤희는 가면을 벗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면은 언제 벗을 거야?”
“좀 있다가…….”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여학생 두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곧장 우리에게 쇄도했다.
노란색 명찰. 둘 다 2학년이었다.
키가 큰 선배가 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가면 쓴…… 이름을 가렸네?”
“심윤희예요.”
“음. 심윤희…….”
그 선배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기입했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따라와 줄 수 있을까? 우리 생활지도부로 민원이 들어와서 그래.”
“민원요?”
내가 되물었다.
“가면을 쓴 이상한 애가 정문에 나타났다고 그러더라고. 거기 너도 같이 따라와 줘.안 그러면 우리가 좀, 많이 곤란하거든.”
거의 부탁에 가까운 어조였다.
“얘는 관계없어요.”
윤희가 선배들에게 딱 잘라말했다.
의외의 모습에 나는 순간 놀랐다. 하지만 선배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두 명이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다고 하더라고. 마침 쟤는 전단지를 들고 있고.”
키가 작은 선배가 손가락을 들어서 나를 가리켰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일단 따라가자.”
내 말에 윤희는 입술을 다문 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학생회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생활지도부실이었다.
“들어와. 나쁜 짓은 안 할 테니까.”
키 작은 선배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딱히 거리낄 것은 없었다. 나는 허가증을 소지하고 있으니까.
생활지도부실은 학생회실의 절반밖에 안 되는 공간이었는데, 책상 하나와 소파 4개가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에는 ‘생활부장 2학년 주신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뭐, 딱히험악한 분위기는 아니네.
소파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자못 심각해보이는 표정으로 턱을 괸 채.
통통한 체형과 그에 걸맞은 푸짐한 볼살. 한눈에 봐도 순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서 명찰을 확인했고, 생활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파에 앉아. 편하게.”
키 큰 선배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권했다.
우리는 생활부장과 마주 보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생활부장이 입술을 모아 숨을 불었다.
“명진아.”
“응?”
생활부장의 부름에 키 작은 선배가 대답했다.
“일단 사진부터 찍어.”
윤희는 아직도 가면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설마 이 사람들도…….
“저기요.”
윤희가 항변을 하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면은 벗는 게 어떨까.
명진 선배는 이미 스마트폰 카메라로 우리를 찍었고, 생활부장이 오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활동일지에 기록해야 돼서 그래. 사적인 뜻은 전혀 없어.”
납득할 만한 설명에 윤희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가면은 벗는 게 어때?”
나를 대신하여 생활부장이 권유했다.
윤희가 조심스레 가면을 벗고, 명찰에 붙여 놓은 테이프도 제거했다.
갑갑했는지 이마에 땀 몇 방울이 맺혀 있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민원이 들어왔는데 안 움직일 수는 없었으니까.”
생활부장이 자신의 스마트폰 깨톡 대화창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신영아! 정문에서 웬 가면 쓴 여자애랑 남자애가 이상한 짓 하고 있음!」
이것과 비슷한 내용의 깨톡이 몇 개 더 있었다.
“일단 허가증은 갖고 있는데요…….”
나는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허가증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알고 있어. 미현 선배가 옆에서 어찌나 네 얘기를 많이 하던지……. 너 우리 학교에서는 유명인이잖아.”
생활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하긴 우리 학교에서 남학생이라곤 나뿐이니 모를 리가 없지. 막상 그런 유명세를 체감해본 적은 없지만.
“솔직히 민원 한두 건 정도였으면 너네를 불러들이지도 않았어. 네가 허가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신영아. 활동일지 만들까?”
키 큰 선배였다.
“아냐. 이따가 해.”
생활부장이 손을 휘휘 저었다.
“여하간, 이렇게 불러들이게 된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도 체면이 있는지라…….”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나는 가능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각자의 입장이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이해하고 있으니까.
“벌점 부여나 이런 건 전혀 없으니까 걱정 말고.”
“네.”
생활부장은 이대로 우리 둘을 돌려보낼 모양이었다.
윤희의 말마따나 허가증을 받아두길 잘했군.
그런데 갑자기 생활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생활부장은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갑자기 분위기 신세타령?
“학생들에게 벌점 부여할 권한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럼 뭐 해? 3학년 선배한테 ‘선배님.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럴 수도 없고. 동급생들한테 그랬다가는 반발만 엄청나게 사버리고. 1학년은 괜히 건드렸다간 문제될 수도 있고…….”
나와 윤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체 어쩌다 이런 흐름으로 빠진 것일까.
생활부장은 아랑곳않고 하소연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니 담당쌤은 여기 놀러 왔냐고 핀잔이나 주고. 학생회에서도 탱자탱자 놀 시간에 일이나 거들어달라 하고. 그래서 우리는 허구한 날 미현 선배가 미루는 서류 작업이나 하고 있지.”
그 와중에 은근히 학생회장 뒷담화도 하네.
“그러면서 맨날 생활 일지는 써야 하고 말야. 아니, 쓸 말이 서류 작업 보조나 가끔씩 하는 순찰 말곤 쓸 거리가 없는데 왜애……. 내가 이럴려고 생활부장 맡았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신영아아아아.”
민영 선배가 와서 생활부장을 끌어안았다.
“힘들 때일수록 씩씩해야지 우리 신영이! 보고 있는 내 맘이 얼마나 아픈지 아니!”
“민영아아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즉석 신파극에 나와 윤희는 할 말을 잃었다.
“아휴. 쟤네 또 저러네.”
뒤를 돌아보니 키 큰 선배가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주, 저래요?”
“신영이 쟤가 가끔 저래. 맘고생 많이 하거든.”
“그렇군요.”
“이제 가봐. 볼일은 이걸로 끝이니까.”
키 큰 선배가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나가기 직전에 선배들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한 몸인 양 뒤엉켜 있었다.
우리는 키 큰 선배에게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뒤따라 나온 윤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희는 한 손에 가면을 들고 있었다.
왜 윤희는 가면을 쓸 생각을 했던 걸까.
긴장을 덜기 위해 그랬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 치고는 꽤 어설픈 변장이었다.
자신의 머리칼이 상당히 튄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머리칼을 가리지 못하면변장 자체가 소용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럼에도 윤희는 어설픈 변장을 한다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나는 윤희를 향해 돌아섰다.
“심윤희.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명찰을 가리고 가면을 쓴 거야?”
가능한 진중한 얼굴을 한 채 질문했다.
윤희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자신 없어 하는 태도에서 윤희가 느끼는 불안과 긴장의 편린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랬구나.”
어쩌면 이번에도 괜한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머쓱해진 나는 얼른 돌아섰다.
“이제 가방 챙겨서 부실 가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다시 발을 멈췄다.
돌아보니 윤희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을 바닥에 내리깐 자세로.
“미안해. 나 때문에…….”
윤희답지 않은 목소리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