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25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1) (25/131)



〈 25화 〉25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1)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결전이 서막을 올렸다.
사실 결전이라고 해봤자 직접 부딪칠 경우는 없어서 긴장감이 그다지 안 느껴지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와 윤희는 스터디부의 신입 부원을 모집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한다.
규원이는 아무런 방해 공작도 하지 않고 그저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일견 나와 윤희가 불리해 보이는 대결.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신입 부원을 한 명만 받아도 이기는 내기니까.
나는 오늘부터 등교 시간을 10분 정도 앞당겼는데, 확실히 평소보다 여유가 생긴 기분이었다.
도연이가 나를 반겨주었다.

“안녕. 오늘은 좀 일찍 왔네?”

내 자리로 향하려다 말고 도연이의 책상 앞에서 멈춰 섰다.

“일찍 오니까 확실히 마음이 편하더라고.”

사실은 규원이와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것 때문이지만.

“아침에 눈뜨기 힘들지 않아? 막 5분만  자고 싶어지고.”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느낀다. 늦은 새벽까지 공부를  날에는 특히 더 그렇고.
하지만 5분  자봤자 개운한 느낌은 전혀 없다.
내 꼬리표에 지각이라는 딱지를 달면  되기도 하고.

“그래도 눈 떠야지. 지각을 할 수는 없잖아. 무엇보다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고.”

그러자 도연이와 주변에 있던 애들이 오오, 하고 감탄했다.

“저게 바로 올 1등급의 클라스…….”

도연이 바로 뒷자리에 앉은 연수의 음성이었다.
 1등급과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에 무슨 상관 관계가 있다는 건지.

“대단하다. 난 그렇게 못하거든.”

도연이가 부러움을 표시하더니 곧장 화제를돌렸다.

“그나저나 스터디부는 어떻게 됐어? 신입 부원 들어왔어?”

근처에 있던 애들은 다 들을 정도의 성량이었다.

“아직. 홍보도 이제야 시작했으니까.”

그때 왼편에서 우당탕탕,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나나나! 나, 스터디부 들어가! 다음 주에!”

소음의 주인공은 바로 규원이. 왼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채 나와 도연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관심 키워드라고 귀신같이 반응하네.
도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규원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길이 금세 나에게로 돌아왔다.

“영재야. 규원이가 들어온다는데? 잘 된 거 아냐?”

나는 규원이를 흘겨보았지만, 그런 눈치를 전혀 탑재하지 못한 규원이는 눈치 없이 떠벌렸다.

“아. 그게, 영재가 아직은 나를 들일 마음이 없대. 그래서 다음 주에들어가려고.”

마치 다음 주만 되면 무조건 들어갈  있다는 듯한 어투다.
당사자가 아닌 도연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건 말이지…….”

얘는 입에 잠금 기능이란  존재하지 않는 건가.
더 이상 두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황급히 규원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자, 여기까지.”
“뭔데, 뭔데?”
“아, 아냐. 얘가 또 헛소리하려고 해서.”

도연이에게 대답하는 동안 규원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나는 젓 먹던 힘까지 다해서 규원이를 원래 자리로 끌고 갔다.

“우와! 스킨십!”
“영재 대담해!”

여기저기서 야유가 날아와 박혔다.
이건 스킨십이 아니라 제지하려는 행동인데.
너희들이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해명을 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다.

저항하는 힘이만만치 않으니까. 아니면 내가 약골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사력을 다한 덕분에 간신히 규원이를제자리에 앉힐 있었다. 주변에 있던 애들이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표명했다.
별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소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야. 갑자기 왜 입을 틀어 막어?”

진짜 더럽게 눈치 없네.

“그걸 그렇게 말하려고 하면 어떡하냐.”
“그러면 문제 있는 거야?”

정말로 궁금하다는 양 질문하는 규원이를 향해 나는 매서운 눈초리를 쏘았다. 그러자 규원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근처에 있던 애들이 장작을 집어넣었다.

“와. 둘이서 밀담도 나눈 거야? 혹시 썸?”

얘들은 뭐만 하면 연애로 연결 지어버리네. 머릿속이 너무 꽃밭인 거 아냐?

“그런  아냐!”

한 차례 쏘아붙이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래서 혼자 남학생인  안 좋다니까.
뭘 하든 눈에 띄어버리니까.
가방을 정리하고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더니 옆에서 윤희가  왼쪽 어깨를 쿡쿡 찔렀다.

“나 힘들어. 좀만 쉬자.”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윤희에게 말했다.

“어제 얘기한  준비했어.”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윤희에게로 향했다. 오른손에 종이쪽지와 USB메모리를 쥐고 있었다.

“이거 아니었으면 나한테 관심도 안 줬겠네?”

윤희가 가는 눈으로 나를 타박했다.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아까 힘을 너무 빼서.”
“알아. 그냥 농담 한  해본 거야.”

윤희가 눈웃음을  번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내게 넘겼다.
나는 USB메모리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종이쪽지를 책상 위에 펼쳤다. 홍보 문구가 거기에 적혀 있었다.
그때 윤희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지수가 허리를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와, 너네 그새 친해진 거야?”
“아니야.”

윤희가 빠르게 부정했고, 나는 종이쪽지를 손으로 가렸다.

“그냥  친구끼리 한두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능청을 떨자 지수는 대충 납득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가렸던 쪽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심윤희.”

작은 목소리로 불렀더니  들었는지 윤희는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윤희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더니 윤희가 책을 내려놓고 시선을돌렸다.

“이게 다야?”

쪽지를 가리키며 묻자 윤희가 고개로 긍정을 표시했다.

“혹시, 별로야?”
“아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사실은 별로였지만, 차마 대놓고 말하기는 좀 꺼려졌다.
아마 윤희라면 내 반응에서 이미 눈치챘을 테지만.
일단 다른 반에서 홍보하는 계획은 하루쯤 미뤄야겠네.
나는 쪽지를 곱게 접어서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


오늘 3교시는 지리 수업이었다.
역시나 선생님의 수면제 탄 목소리를 버텨내는 애들은 없다시피 했다. 대부분이 KO패를 당한 가운데, 나는 꿋꿋하게 버텨냈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USB메모리를 확인하고 나서 교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일이냐?”

담임선생님이 의자의 목받이에 목을 기댔다.

“수업 끝나면 정문에서 홍보물 배부하려고 해서요.”
“아. 그거였어?”
“그리고 홍보물도 여기서 뽑으려고요.”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USB메모리를 담임선생님에게 건넸다.
원래라면 집에서 준비해 와야 했다. 하지만 그 많은 걸 윤희 혼자 인쇄해서 들고 오게 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

“어디 보자.”

담임선생님이 USB메모리를 받아서 컴퓨터에 연결했다. 지난번에 우리가 교내 게시판에 부착한 홍보물이 화면에 나타났다.

“몇 장 뽑게?”
“음……. 100장, 정도요?”
“다 돌릴 수 있겠어?”

재차 확인하는 질문에 나는 얼른 대답을 고쳤다.

“그럼, 80장요.”
“그래 알았어.”

잠시 후 복사기가 종이를 한 장씩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선생님이 서랍에서 ‘외부 활동 허가증’이라고 적힌 종이를 꺼내더니 도장을 찍었다.

“이런 거 일일이 허가받으러 다니기 참 귀찮지 않냐? 안전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말이지.”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서요.”

나는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얼 못하리.
4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담임선생님이 출석부와 영어 교과서를 챙겼다.

“일단 교실로 들어가. 저건 내 책상에 올려둘 테니까 점심시간에 찾아가고.”
“네.”

나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허가증을 살펴보니 윤희가말한 대로 ‘학생회장 확인란’도 있었다.
참 바빠졌구만.
나는 허가증을 주머니에 넣고 교실로 향했다.


* * * *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윤희에게 허가증을 보여주었다.

“이제 학생회실만 갔다 오면 끝나.”

허가증을 바라보는 윤희의 표정이 복잡미묘했다.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오늘  번만 할 거니까. 응?”
“알고 있어. 걱정마.”

윤희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올려놓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혼자 마음을 다독일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학생회 선배들도 점심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

조금은 여유를 갖자고 생각하며 필기 노트에 적힌 글씨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본관 건물 4층에 위치한 학생회실을 찾아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학생회실 문패를 확인한 뒤 노크를 하자 노란색 명찰을  선배가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로?”
“이것 때문에요.”

나는 허가증을 선배 앞에 펼쳐 보였다.
그녀가 문을 활짝 열고 나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학생회실은 책상이 ㄷ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리마다 이름과 직급이 적힌 명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학생회장의 자리는 당연히 한가운데. 출입문과 바로 마주 보는 위치였다.
볼펜을 들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학생회장이 고개를 번쩍들었다.

“아! 우리 학교의 유일한 남학생!”

회장이 검지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인상은 귀여운 편인데 뿔테 안경과 땋은 머리의 조합이 미묘했다. 왼쪽 가슴 부근에 3학년을 의미하는 흰색 명찰이 있었다.
명패에는 ‘이미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거지?”

회장이 팔짱을 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외부 활동 허가증을 내밀었다.

“여기에 도장을 받으려고요.”
“이게 무슨 활동인데?”
“스터디부 홍보를 위해서 정문에서 홍보물을 돌리려고 하거든요.”
“스터디부? 그런 부가 있었던가?”

회장이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차에,

“있어요, 선배.”

돌아보니 아까 문을 열어 준 선배였다. 명패를 보니 부회장이었다.

“아, 맞네. 그런 부가 있었지. 근데  아깝단 말이야.”

회장이 양손을 모아서 자신의 턱을 받친 내게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그나저나 대체 뭐가 아깝다는 거지?

“너 입학식 때 수석 대표로 발표했지?”
“네. 맞아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 같은 수재를 놓치다니, 학생회장으로서 참 안타깝단 말이지.”

상당히 마이페이스한 사람이구만.
뭐라 응대해야 좋을지 몰라서 애매하게 웃었다.

“너. 학생회 들어올래?”
“네?”

이건 무슨 경우지?

“일 시키면 엄청 잘할 것 같은데 말야. 음, 힘쓰는 일은 어렵겠고, 나 대신에 서류 업무를 봐준다면…….”
“선배. 아직 할 일 많이 있어요.”

부회장이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마디했다.

“그리고 영재는 스터디부 부장이고요.”

추가 설명까지 나오자 회장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 알고 있어. 그냥 농담 좀  거야.”

……내 귀에는 진심처럼 들렸는데.
아무튼 부회장 덕에 빠르게  처리가 끝났다. 나는 허가증을 챙겨서 학생회실을 나왔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 * * *

“차렷. 경례.”

도연이의 지시를 필두로 모두가 담임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서 교실을 나섰다.
홍보물 80장은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미리 챙겨두었다. 지금 각자의 가방에 40장씩 넣어둔 상태.

애들이 하나둘 가방을 메고 교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홍보물을 가방에서 꺼낸  윤희에게 어서 나가자고 손짓을 했다.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한 장이라도 나눠줄 수 있으니까.

“자, 잠깐만.  준비할 게 있어서.”

그러고 보니 어제도 준비할 게 있다고 했었지.
이쯤 하니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지금은 접어두었다. 어차피 잠시 후면 무슨 준비를 한 건지알게 될 테고.

“그래.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와줘.”

 이상 지체했다가는 정말로 배부할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달렸다.
드디어 목적지인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곧바로 홍보물을 돌리기 시작했다.

“스터디드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때마침 나를 지나쳐가려던 동급생이 얼결에 홍보물을 받아들었다.
목을 가다듬고 목청껏 외치며 홍보물을 나눠주었다.
무심한 손길로 받아 가는 학생도 있고, 그냥 지나쳐 가버리는 학생도 있었다.

비율로는 확실히 후자가 더 많았다. 슬프게도.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같구만.
간신히 홍보물 10장을 나눠줬을 즈음 윤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그게 무슨 꼴이야?”

지붕 뚫고 하이킥 하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질문했다.
윤기가 흐르는 연보랏빛 머리칼.
명찰에 덕지덕지 발라놓은 까만 절연테이프.
그리고 새하얀 마스크를 쓴 얼굴!

“나름 준비해 온 건데…….”

윤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네가 말하던 준비가 이런 기상천외한 것일 줄이야…….
나는 벌어진 턱을 다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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