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24화-의지의 끈기는 닮은 꼴(3) (24/131)



〈 24화 〉24화-의지의 끈기는 닮은 꼴(3)


“왜 이리 늦었어?”

규원이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교실에서 매달리지 않기에 혹시나 하고 기대했건만 아무래도 헛된 기대였나 보다.
……생각해 보니 어제 전화로 자기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도 했고.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부장님. 이쯤하고 날 받아주시죠.”

그 말에 나는 한껏 인상을 썼다.

“죽어도 싫어!”

 번째인지 모를 거절. 이쯤 했으면 슬슬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하지만 규원이는 도무지 꺾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밀어내도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같다고나 할까.

“어허, 어젯밤에 은밀하게 나눈 뜨거운 대화를 벌써 잊은 건가?”
“어제 전화까지 했었구나.”

조용히 듣고 있던 윤희가 입을 열었다.

“응! 우린 전화 번호도 아는 사이지롱.”

네가 멋대로 알아낸 것뿐이지만.
경멸 어린 눈길을 보내도 규원이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예상보다 더 끈질기네.”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는 윤희. 규원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세웠다.

“후후. 계속 말했잖아. 들어갈 때까지 포기 안 한다구.”

찰거머리가 따로 없구만.
이대로 계속 거절해봤자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나는 오늘 낮에 윤희의 힌트에서 떠올린 수를 써먹기로 했다.

“이규원.”
“응?”

규원이가 눈을 끔뻑거렸다.

“이대로 계속 대립해 봤자 끝이 없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들어가면 끝인데.”

말허리를 자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내기를 하려고.”
“웬 내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관심을 보였으니 반은 넘어왔다.

“오늘이 화요일이잖아. 다음 주 수요일까지, 내가  명이라도 새로운 부원을 구하면 너의 입부는 없던 일로 하겠어. 대신 그때까지 신입 부원을 못 구하면 무조건 너를 받아들일게. 어때?”

규원이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신음성을 냈다.
막무가내로 우길지, 내기를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따지고 보면 규원이에게 불리한 조건이기는 하다.
나는 세 자리  한 자리라도 채우면 규원이를 부원으로 받지 않을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기간도 1주일. 설마  기간 동안 한 명도 안 오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 테고.
아마 내기를 받아들이기는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입부 가능성이 제로이지만, 내기를 받아들이면 미약하게나마 가능성이 오르니까.

대신 조건을 수정하려고 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득실을 분명하게 따지며 결정하니까.
규원이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하자.”

싱거울 만큼 빠른 승낙이었다.

“진짜?”

만일을 대비하여  번  물어보았다.

“응!”

규원이가 머리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럴 거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같은데 말이지.
뭐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뭐? 조건?”

내가 세운 검지로 시선을 모은 채 규원이가 반문했다.
나는 안경코를 추켜 올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부원 모집 활동을 하는 걸 절대로 방해하면 안 돼.”

이건 내가 생각해 놓은 보험 같은 것이다. 스터디부 홍보를 할 때마다 방해가 들어오면 홍보가 아무 쓸모도 없게 되어버릴 테니까.

“뭐어?”

규원이가 입을 쩍 벌렸다. 처음부터 그럴 속셈이었군.
장하다, 내 머리!

“그렇게 되면 내가 불리하잖아!”

규원이가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여기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럼 포기할래? 그러면 이번 건은 아예 없던 일로 하자.”

돌아서려고 하자 규원이가 옷자락을 붙잡았다.

“잠깐만! 포기한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이 정도면 열정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겠군.

“난 이 조건까지 포함해서 내기할 거야.  받아들이면 그걸로 끝.”
“그건 처음부터 얘기했어야지!”
“미리 물어봤었어야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치자,

“으으.”

규원이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반론을 하고 싶은데  말이 하나도 없는 기색이  꼴 좋았다.
사실 좀 치사했던 건 맞다. 하지만그만큼 부원으로 받아들이기 싫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게다가 본인이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됐을 일이기도 하고.
결국 다급했던 쪽이 진 게임인 셈이다.

“왜 그렇게까지 안 받으려고 하는 건데…….”
“그건 내 맘 아니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규원이가 확인을 위해 재차 질문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부원이 한 명도 안 들어오면, 내가 들어가는 거 맞지?”
“맞아. 여기 있는 심윤희가 증인이 되어줄 거야.”

나는 엄지손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아마 승낙했을 것이다.
규원이가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움직였다.
다소 불합리한 내기를 걸었으니 결과에는 무조건 승복할 생각이다. 설령 내가 진다고 해도.

“…… 알았어.”

규원이가 뚱한 얼굴로 내기를 받아들였다.

“벌써 5시 40분이야.”

윤희가 뒤에서 시간을 알려 주었다.
오늘도  활동을 늦게 하는구만.
규원이가 양손으로 가방끈을 쥐었다.

“정말이지?”
“걱정 마. 내 입으로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주의거든”

호기롭게 단언하자 규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규원이가 비장한 얼굴을 한  우리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절대로 방해하면  된다! 알았냐?”

멀어져 가는 규원이를 향해 소리치자 규원이가 OK사인을 보냈다.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진 규원이. 계단을 성큼성큼 밟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우리는 부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

규원이에게 별로 안 시달린 덕분인지 오늘은 집중이 잘 되었다.
윤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문제집을 펼쳤다.
모의고사 성적에 대한 지적이 나름대로 자극제가 된  같았다. 절대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좋은 일이다. 스터디부의 본래 취지에 가장 가까운 행위니까.

담소 한 마디 없이 공부에 매진하다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슬슬 부 활동을 마감할 타이밍.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한참 집중이 잘 되고 있을 때 끊겨버리면 기분이  찝찝하니까.
윤희가 문제집을 덮고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네가 그런 내기를 생각해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어.”
윤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간 네가 꽉 막힌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

평온한 표정으로 비수를 꽂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냐?”
“오늘 하는 걸 보고 평가가 바뀌었어.”

윤희가 빙그레 웃었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눈길을 슬쩍 피했다.
다른 건 몰라도 ‘꽉 막힌 사람’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난 일은 긍정적이다.

“그래서 내기에서 이길 방법은 생각했어?”

윤희의물음에 나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일단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다른 반에도 홍보할 거야. 그  관심 있다고 하는 애들은 따로불러서 부실 견학도 시켜줄 거고. 2학년 선배들에게도 홍보해야지.”
“다른  없고?”
“일단 생각해 본 건 이 정도야.”
“흐음.”

윤희가 턱을  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내가 생각한 방안이 별로인가?
저런 모습을 보이면 괜스레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내 속을 알 길 없는 윤희는 이따금 턱을 매만지면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히 합격 통보였다.

“사실 그것 말고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렇구나. 한동안 네가 고생 좀 하겠네.”
“이미 각오한 바야…….”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없었다. 내가 공부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기는 거니까.
윤희도 같이 했으면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윤희에게는 남 앞에 서는 일이 무척 어려울 테니까.

“그러면 네가 홍보 멘트를 만들어 줘.”

그러니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하기로 했다.

“내일까지 해주면 되지?”
“응. 부탁할게. 누가 들어도 오고 싶어질 만큼 멋들어지게.”

그래.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어느덧 활동을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천천히 가방을 꾸렸다. 그러던 중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했다.
나는 곧바로 윤희를 불렀다.

“이것도 해보자. 정문 앞에서 홍보물 배부하기.”

윤희가 눈을 치떴다.

“혼자 그것까지 하게?”

나는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아니. 이건 같이 해야지.”
“그러니까 홍보물을 인쇄해 와달라는 거지?”

나는 입을 다물고 윤희를 빤히 쳐다봤다. 윤희가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다른 건 내가 다 할게. 그치만 이것만큼은 같이 했으면 좋겠어.”
“나, 나는, 자신 없는데.”

드물게 약한 소리를 내뱉은 윤희는 시선을 여기저기로 부산스레 움직였다.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내기에서 이겨야 한다. 이용할  있는 건 뭐든 해야만 한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야. 솔직히 우리 반에서 할 때도 꽤 긴장되더라고. 그래도 부원을 모으려면 해야 하는 일이니까 용기를 냈어.”

윤희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홍보물 배부는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까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아. 그래서  도움이 필요해.”

윤희가 양손을 그러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조금만, 용기를 내어주면 안 될까?”

나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윤희라면 이 눈빛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윤희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너무 부담스럽게 해 버렸나.
부탁을 철회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찰나에 윤희가 촛불을 불 듯 가느다란 한숨을 흘려보냈다.

“……딱 한 번만이야.”
“진짜로? 고마워!”

마음 같아서는 양손을 맞잡고 붕붕 흔들어대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서 활짝 웃는 걸로 대신했다.

“내일, 바로 하는 거야?”
“가능한 빨리 하려구.”
“그렇구나. 그럼 당장 준비를 해둬야겠네.”
“준비라니?”

의아함을 느낀 나는 윤희에게 되물었다.

“그냥. 그런  있어.”

윤희는 대답을 하자마자 재빨리 부실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긴장을 풀기 위한 준비를 해오겠다는 의미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부실에서 나왔다.



* * *


밤 11시를 넘기자 엄마가 퇴근했다.
나는 하던 공부를 멈추고 거실로 나왔다.
슬기는 이부자리에 엎드린 자세로 친구에게 빌려온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먹을 밥상을 빠르게 차렸다. 그런 뒤에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아직 아무 연락도 없었다.
내가 연락을 기다리는 상대는 바로 심윤희.
……오해는 금물이다. 어디까지나 홍보 멘트를 완성하는 대로 보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사실은 공부를 하면서도, 스터디부 홍보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는 노트 한켠에 적어놓은 홍보 계획표를 살펴보았다. 계획표라고 부르기에는 매우 간소한 것이지만.
내일은 1반과 3반.
모레는 4반과 5반.
글피는 2학년 1반과 2반 등등.
우리 반에서도 최대한 애들을 설득해보기로 하고.

견학은  명이라도 희망자가 있는 대로.
견학이라고 해봤자 채 5분도 안 걸릴 듯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시설이 괜찮으니까 분명 한두 명쯤은 혹하고 넘어올 것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스터디부의 부장을 맡고부터 이래저래 고생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도 아직 3월 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중학생 때는 공부만 하느라딴 데에 정신을 팔 새가 없었는데.
잠잠하던 휴대폰이 드디어 소리를 내었다. 확인해 보니 윤희가 보낸메시지였다.

「저녁 먹고 나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잘  떠올라.」

아쉽게도 비보(悲報)였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러면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재촉하면 윤희가 부담을 느끼고  것이다.

「정 안 되면 내일 아침까지라도 될까? ㅎㅎ」

‘ㅎ’ 초성을 붙여서 괜찮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이 정도면 매너 있는 사람이지, 암.

「노력해볼게.」

이제 윤희의 마침표 메시지에는 완전히 적응이 되었다. 이것도 나름 본인만의 아이덴티티겠지.
나는 ‘화이팅’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을 답장으로 보냈다.
금세 답장이 날아왔다.

「알아봤는데, 야외 홍보 활동은 담당 선생님과 학생회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해.」

그렇게 되면 내가  일이 더 늘어나는 격이다.
그 정도는 자율에 맡겼으면 싶은데.
그러나 게시판에 홍보 포스터를 붙이는 일도 담당 선생님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정해진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지.
나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USB를 챙겨와 달라는 내용을 적어서 답신을 보냈다.

「알겠어.」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펜을 잡기에 앞서 다짐을 했다.
이번 내기에서 반드시 승리하자고. 그러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감수하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