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화-의지의 끈기는 닮은 꼴(2)
우리는 각자 해야 할 공부에 열중했다.
아니다. 우리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나는 아까 이규원과 홍역을 치른 탓에 정신적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공부를 한 사람은 윤희밖에 없었다.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두고도 이 같은 추태를 보이다니…….
부장으로서의 체면도 안 서고, 무엇보다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으어어.”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앓는 소릴 내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7시 20분이었다.
“오늘은 이만하자.”
기력 빠진 목소리로 활동 종료를 알렸다.
우리는 짐을 챙긴 뒤 스터디부를 나섰다. 짙은 남색 물결이 하늘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자 펼쳐지는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걸어갔다. 서로 두 뼘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채.
“오늘따라 영 집중을 못하더라?”
윤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규원, 걔가 너무 정신 사납게 했어.”
내 응답에 윤희가 동감을 표했다.
“대신 집에서는 공부하려는 거지?”
“그렇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거, 부러워.”
윤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그래.”
“그래도 그런 모습 보면 부러워.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나는 윤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의 밝은 빛 아래에서도 윤희의 표정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너는 시를 열심히 쓰잖아.”
그러자 윤희가 이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 그건, 아직은 부끄러우니까얘기하지마…….”
낯간지러워하는 모습. 어쩌면 뺨이 달아올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윤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아까 이규원을 부실로 들이라고 했어?”
“네가 쓸데없이 힘을 빼고 있었으니까.”
윤희가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근데 여자애랑 힘이 막상막하일 줄은 몰랐어.”
크윽. 심장에다 비수를 꽂다니…….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부러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들어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길래, 한 번 얘기나 들어보자 싶었어.”
“들어보니 어땠어?”
윤희가 잠시 신음성을 흘린 뒤 목소리를 냈다.
“별로 들어줄 만한 가치가 없었지.”
당사자가있었으면 조금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발언.
하지만 나도 이 부분에 대해 동감하는 터라 별말은 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하던 얘기 나에게도 들렸거든. 스마트폰 때문이라며?”
“목표가 있는 건 괜찮아. 단지 문제라면 목표 점수가…….”
“90점이랬지? 모의고사 등급은 올 7등급이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균 90점을 노린다는 규원이의 포부.
너무나도 근본 없는 허무맹랑한 목표 의식이다. 개그 소재로도 못 써먹을 만큼.
“그런데 지금은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잖아.”
윤희가 담담하게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규원이 말고는 입부 문의를 하러 온 애들이 없다는 점.
“이제 시작이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이 말은 나의 결심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윤희가 머리를 가볍게 움직이며 동감을 표했다.
어느덧 경사로의 끝 지점에 다다랐다.
“오늘 고생 많았어.”
윤희의 눈매가 완만한 호를 그렸다. 같이 다니지 않았더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은근한 눈웃음.
“내일도 이규원한테 시달릴 것 같지만.”
“야, 그러지 마. 네가 그러면 진짜 현실이 될 것 같다고.”
윤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런 감정 표현을 반 애들 앞에서도 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윤희는 버스 정류장으로. 나는 집을 향해.
몇 발짝 나아가다가 멈춰 섰다. 뒤돌아보자 윤희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보다 더 먼 곳, 드높은 상공에서 홀로 붉은 빛을 내는 경보등이 보였다.
아직은 모든 것이 멀게만 보였다.
* * * *
8시를 조금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오빠 어서 와.”
슬기가 현관 앞까지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거실에는 웬일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슬기야. 오늘 무슨 일 있어?”
“후후후.”
슬기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만 냈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엄마 생일도 아니고, 나나 슬기 생일은 더더욱 아닌데.
“오빠 빨리 밥 먹자.”
슬기가 자신의 옆자리를 탕탕 두드렸다. 하도 재촉을 하니 가방만 벗고 밥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상 한가운데에 계란후라이 한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지난 주말에 엄마가 사온 계란이로군.
“오늘은 내가 실력 발휘를 좀 해봤지.”
슬기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우리동생이 웬일로 계란후라이까지…….
나는 감탄하면서 젓가락으로 계란후라이를 들어 올렸다.
“좀 탔네?”
한쪽 면이 갈색이었다. 그럼 그렇지.
“안 죽어! 먹어도 돼.”
슬기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떼쓰는 어린애 같아서 나는 짧게 웃었다.
“근데 진짜 웬일이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본데.”
계란후라이를 반으로 가르면서 물어보았다.
슬기가 의미심장한 웃음 소릴 내더니 방에 가서 웬 종이를 들고 왔다.
“짠!”
슬기가 내 눈앞에 그것을 펼쳐 보였다.
영어 쪽지 시험지였다. 총 10문제.
그중 다섯 문제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슬기야…….”
“후후, 나 이렇게 잘 받아보긴 처음이다.”
슬기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슬기가, 50점을 받는 날이 오다니!
“잘했다! 잘했어!”
나는 슬기를 부둥켜안고 머리를 세차게 쓰다듬었다.
“으앙. 오빠아. 머리 엉켜어.”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슬기는 내 사랑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슬기의 머리칼이 정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슬기가 툴툴대면서 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야. 그래도 오늘처럼 기쁜 날이 또 어딨겠어? 응?”
나의 칭찬에 슬기가 금세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내 동생. 단순하다. 그러니까 귀여운 거지만.
나는 계란후라이를 한 입 크기로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음? 이 맛은…….
“슬기야. 이거, 소금 안 쳤지?”
“아 맞다!”
자신의 이마를 때리는슬기.
다음에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구만.
기분 좋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서 저녁상을 치웠다. 그런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문제집을 펼쳐놓고 몬아미 볼펜을 손에 쥐었다.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윤희인가?
막상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가 액정에 표시되어 있었다.
대체 누구지?
“여보세요?”
[호옥시, 한영재 씨 번호인가요?]
코맹맹이 소리에는 장난치려는 의도가 다분이 느껴졌다.
“누구신데요?”
[맞춰보시죵.]
“저는 바쁘니까 이만.”
귀에서 스피커를 때려는데 상대편이 다급한 목소릴 냈다.
[아아아 잠깐만! 나야, 나. 이규원.]
다시 스피커를 귀에 댔다.
[안 끊었지? 안 끊은 거 맞지?]
“어.”
퉁명스레 대꾸했다.
[휴. 다행이다.]
“뭐 때문에 전화했는데?”
스터디부에서 그 난리를 치고 아직 3시간밖에 안 지난 시점에 전화를 걸어올 줄이야.
윤희의 예언이 정말로 현실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놀라기도 했고, 짜증도 났으니까.
[스터디부 때문에! 근데 내가 어떻게 번호 알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니 전혀. 난 공부해야 하니까 이만.”
규원이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지, 사람 질리게 하는 데 재주가 있는 녀석이로군.
하지만 금세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진짜 쓸데없이 끈질기네.
나는 한숨을 내뱉은 뒤 전화를 받았다.
[야야. 너무 매정한 거 아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추천하지.”
잠시 정적.
규원이가 내 지시대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근데 진짜로 내가 어떻게 번호 알아냈는지 안 궁금해?]
“누구한테 물어봤겠지.”
[오. 역시 수재는 다르네!]
그러면서 내가 묻지도 않은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네 번호를 꼭 알아내고 싶은데, 내가 스마트폰이 아니라서 애들한테 물어보기가 불편한 거야. 그러다가 딱 도연이가 떠올랐지. 내가 도연이 번호는 저장해 놨걸랑. 우리 도연이 참 착하지. 물어보니까 곧장 알려주더라구.]
“아, 그러셔?”
시큰둥하게 답해도 규원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번호를 알아내자마자 곧장 전화를 거는 행동력에는 조금 놀랐지만.
“그래서 전화한 용건은?”
[아까 말했잖아.]
“진짜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기 작전에 돌입했지만 규원이는 다시스터디부를 입에 올렸다.
[스터디부에 가입하려구.]
수화기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앞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상담 시간은 6시까지다. 오늘 영업 끝났어.”
[어허! 고객 대응 태도가 불량하구나.]
너는 블랙컨슈머라서.
[아직 마음 안 바뀌었어?]
“응. 평생 안 바뀔 거야.”
여지가 없도록 단언했다.
[크으, 매정하구나.]
하지만 규원이에게는 그다지 먹히지 않는 듯했다.
[영재야.]
갑자기 규원이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나 쉽게 포기 안 할 거야.]
“그 마음가짐으로 지금 당장, 스스로 공부하길 바랄게.”
수화기 너머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 혼자선 안 되거등. 여튼 내일 보자!]
규원이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번호를 확 그냥 차단을 해버릴까?
그런 생각이 솟아올랐지만 곧장 털어냈다. 그건 약간 너무한 처사 같으니까.
“쉽게 포기 안 한다, 라…….”
혼잣말을 흘려보내고 나자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일이면 더 끈덕지게 매달릴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 * **
다음 날,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 각오를 다졌다.
이규원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도 어떻게든 떼어내고 말리라!
하지만 나의 각오를 비웃기라도 하는 양, 이규원은 특별히 눈에 띌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쉬는 시간에는 웃고 떠들며 놀다가 수업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곯아떨어졌다.
저런 상태로 스터디드림에 들어오겠다고?
어림없는 소리지.
공부 습관이 잡혀 있어야 내가 뭘 도와주든가 말든가 하지.
이규원을 받지 않으려면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부실에 남아 있는 세 자리를 채우는 것.
그래서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터디드림 홍보에 열을 올렸다.
대신 어제와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쉬는 시간마다 비교적 수업 태도가 괜찮은 애들에게 개인적으로 권하는 방식으로 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단 한 명도 스카우트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자리에 앉아있는 도연이에게 다가갔다.
“도연아. 혹시 스터디드림에 들어올 생각 없어?”
“아 게시판에 붙어 있는 거?”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수 차례 움직였다.
“솔직히,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최근에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해서…….”
“아. 그렇구나.”
도연이마저 실패했다.
“저기 영재야. 너무 실망한 티를 내면 좀…….”
“응? 왜?”
“아니, 너무 시무룩한 표정을 짓길래.”
나는 오른손으로 양쪽 볼을 문질렀다.
“아냐. 실망한 거 아냐. 다들 사정이 있는 거니까.”
“왠지 미안한데.”
“아냐 아냐. 마음 쓰지 마.”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왔더니 옆에서 윤희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살짝 찔렀다.
“잠깐 들어볼래?”
이제 막 필기한 내용을 살펴보려던 나는 노트를 펼쳐놓은 채 눈만 돌렸다.
“그냥 생각해 본 건데 말이야. 아마 그냥 거절하기만 해서는 포기하지 않을 것 같거든. 포기하게 할 만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게 뭔데?”
“그건 부장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어?”
“우리 한배 탄 사이잖아. 가르쳐 주라.”
나는 윤희에게 애걸했다. 윤희가 고개를 한 번 기웃거렸다.
“나도 방법까지는 생각 안 해 봤어. 아쉽게도.”
“그렇구나.”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윤희는 시집에, 나는 노트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어떤 아이디어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이거라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
“오늘 종례는 여기까지.”
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애들이 일제히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재야. 잠깐 교무실 좀 따라와.”
무슨 일이지?
나는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선생님을 따라갔다.
교무실에 들어가자 퇴근 준비를 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담임선생님이 근처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
그러더니 선생님은 모니터에 무언가를 띄웠다.
“이게 뭐예요?”
“우리 반 모의고사 성적 통계지. 여길 보면, 몇몇 애들은 특정과목에서 1등급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평균치거나 그 아래야.”
왜 갑자기 다른 애들 성적 얘기를 하는 걸까?
나는 의문을 표했다.
“이사장님께 자초지종을 들어서 말야.”
선생님이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 애들 성적 보면 말이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그냥 경험 삼아 쳐보는 시험이었다는 걸 감안해도 주변 학교에 비하면 확실히 성적이 낮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난 현실을 마주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노력여하에 따라 개선될 여지는 있어. 다만 너무…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최대한 해볼게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래. 심윤희랑은 어떻니?”
“열심히 부 활동하고 있어요.”
“알았다. 이제 가봐.”
선생님에게 인사하고 나서 교무실을 나섰다.
윤희는 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여태 기다린 거겠지.
우리는 스터디부로 향했고, 부실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규원이 반색을 표했다.
“하이루! 나 또 왔어!”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