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1화-초년기의 첫 발(2)
말을 꺼낸 직후, 나는 아차 싶었다.
현재 스터디드림의 멤버 구성은 1학년 두 명.
그런데 2학년 선배가 여기에 끼어들면?
선배는 선배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어색해질 것이다. 어느 쪽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인 셈.
하지만 이미 내던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어떡하지…….
주현 선배는 당황한 듯 눈꺼풀을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입술을 우물거렸고, 손가락도 꼼지락거렸다.
“선배님?”
아무 말도 안 하며 계속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선배는 무척 긴장한 사람처럼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 주현아!”
그때 누군가가 명랑한 음성과 함께 맞은편 방향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제 스타박스에서 만났던 정지아 누나였다.
“아. 넌 어제 본 애네?”
지아 누나가 나에게 아는 척했다.
“안녕하세요.”
목을 살짝 기울이며 살갑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가슴팍에 붙어있는 명찰이 노란색인 것을 확인했다.
“존댓말은 안 해도 돼.”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는 지아 누나.
그것만으로도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워낙에 빼어난 미모를 지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제 잠깐 인사한 걸로 말 놓기는 좀, 그렇죠?”
“음. 듣고 보니 그렇겠네.”
지아 누나가 쉽사리 납득했다.
“그래서 둘이서무슨 얘기를 한 거야? 혹시 구면?”
“아, 아뇨. 이거에 관심을 보이시길래.”
나는 갖고 있던 홍보 포스터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스터디드림이라…….”
지아 누나가 엄지손으로 입술을 누르면서 홍보 포스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미, 미안!”
가만히 있던 주현 선배가 갑자기 돌아서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한 시선으로 선배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러자 지아 누나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너 혹시 주현이한테 이상한 말 했어?”
“아뇨. 그냥 관심을 보이시길래 입부해 달라고 권유한 것밖에 없어요.”
“진짜로?”
지아 누나가 이번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진짜에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세요?”
누나가 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아니네.”
휴. 다행히 오해를 사지는 않았군.
그나저나 주현 선배가 그런 식으로 자리를 피해버릴 줄이야…….
부원이 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때 등 뒤에서 윤희가 나를 불렀다.
“한영재.”
윤희는 발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같은 반 친구인 모양이네?”
호기심을 내비치는 지아 누나.
“네. 이름은 심윤희구요.”
본인을 대신하여 소개해 주자 지아 누나가 명랑한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난 정지아야. 너희들보다 한 학년 위고.”
“아, 네… 안녕하세요.”
윤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인사했다.
지아 누나가 우리들을 향해 성큼 다가와서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확하게는 윤희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잘 부탁해.”
누나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지었고, 윤희가 조심스레 그 손을 맞잡았다.
“네. 저도요.”
“그나저나 둘이 같은 부 활동하는 거야?”
이번엔 내게 질문 화살을 날렸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럼 너무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네. 먼저 가볼게.”
지아 누나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곳으로 가려다 말고 이쪽을 향해 홱 돌아섰다.
“참! 스터디부 괜찮은 데야?”
“어…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에요.”
“그렇구나. 그냥 한 번 물어봤어. 그럼 진짜로 갈게.”
지아 누나의 뒷모습이 멀어졌을 즈음, 윤희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알게 됐어?”
“어제 친구랑 스타박스 갔다가 알게 됐어.”
“내용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역시 눈치 백단.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규원과 같이 있었다는 정보를 추가했다.
“그랬구나.”
담담하게말하는 윤희. 하지만 묘하게 거슬린다는 얼굴이었다.
아마 ‘규원’이가 등장해서 그런 걸까.
나는 일단 윤희의 반응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제 두 장밖에 안 남았네. 더 붙일 데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학교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다. 이제 남은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스터디드림이 있는 별관뿐이다.
별관은 학생들의 통행량이 많은 곳은 아니다. 그러니 홍보 효과가 별로 없을 듯했다.
“별관 4층에 게시판이 하나 있으니까, 거기에 붙이자.”
“너무 외진 곳 아니야?”
“그래도 안 붙이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나는 일리 있는 말이라고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에 붙이는 대로 공부하러 가자.”
윤희가 알겠다며 짧게 응답했다.
* * * *
포스터 작업이 끝내고 부실로 되돌아왔다.
시곗바늘이 저녁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포스터 붙이기 작업에 30분 이상은 소요한 셈.
우리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앉았다.
“남김없이 다 붙여서 다행이다.”
“그러게.”
윤희가 내 말에 동조했다.
나는 텅텅 비어버린 압정통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았다. 선생님이 꼭 반납하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까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윤희에게도 이 점을 강조했다.
“빈 통이라고 절대로 내다 버리면 안 돼. 알았지?”
“알겠어.”
윤희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 난 뒤 아침부터 보던 시집을 펼쳤다.
나는 가방에서 공부할 교재를 꺼내다가 모의고사 성적표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윤희에게 등급을 물어봤을 때 비밀이라고 했지?
하지만 나는 꼭 알아내고 싶었다.
“심윤희. 모의고사 성적 어때?”
직구를 던졌다.
“좀 전에 비밀이라고 했잖아.”
윤희가 가드를 올렸다.
“우리, 같은 스터디드림 소속이잖아. 점수 공유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나 성적 별로 안 좋은데…….”
그러면서 윤희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땐 나도 잘 못했다며 위로하는 게 정석이겠지.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 과목 1등급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양심이 없는 거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볼게. 넌 전 과목 1등급이지?”
“응.”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대답.
“괴물.”
윤희가 시집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 보관해놓은 성적표를 꺼냈다.
“네가 부장이니까 보여주는 거야.”
윤희가 내민 성적표를 곱게 받아들었다.
그래도 평소에 시집을 읽으니까 어느 정도는 나왔겠지?
기대감을 품은 채 성적표를 펼쳤다.
언어
수리
영어
사탐
과탐
2
4
3
2
3
이 정도 등급이면 평균치보다 약간 괜찮은 수준이었다.
문과 기질이 강한지 언어와 사탐 등급이 좋은 편이었다.
1등급이 없는 게 아쉬움으로 남지만.
수학은 저번에 재미없다고 하더니 성적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언어 1등급은 충분히 노릴 만하다고 보는데. 수리는 좀 더 끌어올려야겠고…….”
“한영재.”
“왜?”
“다 들려서.”
“응? 나 혼잣말했어?”
윤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니.
나는 얼른 윤희에게 성적표를 돌려주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아냐. 그냥 혼잣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그랬어.”
다음에는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겠군.
“그러니까 문제는 수리라는 거지?”
“문제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좀만 노력하면 3등급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는 점 잊지 말고.”
“포스터에는 ‘우리 함께 나아가요’, 라고 했잖아?”
“공부는 원래 스스로 하는 거니까.”
“부장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윤희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번에는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부장이기 이전에 일개 학생이지.”
지극히 정론으로 받아치자 윤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말야, 우리 총 18군데에 붙였잖아. 그러면 한 장이 남아야 할 텐데.”
상당한 기억력인데.
나는 속으로 감탄하고 나서, 윤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그럼 그 김주현이라는 선배는 포스터만 들고 간 거야?”
“응. 지아 누나랑 얘기하는 중에, 갑자기 미안하다고 하더니 쌩 가버리더라고.”
“숫기 없는 사람이네.”
윤희의 한 줄 평가였다.
“음.”
나는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주현 선배가 보인 모습은 단순하게 ‘숫기 없다’ 정도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매우 심하게’라는 부사가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남은 한 장은 어떻게 할래?”
윤희가 빈 책상에 놓아둔 포스터를 가리켰다.
“내일 반에서 홍보할 때 쓸까?”
“좋은 생각이네.”
“그럼 홍보는 누가 하지?”
내질문에,
“당연히 부장인 네가 해야지.”
윤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같이 하면 안 돼?”
윤희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오해 사게 될 거야. 그리고 애들이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정작 본인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이럴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반 애들과 가까워지려면, 윤희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그리하여 홍보 담당은 내가 맡게 되었다.
우리는 홍보 전략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렇지만 특별한 아이디어 같은 건 없었다.
홍보란 게 대체로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에 집중하니까.
입부를 하고 싶게 유도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스터디부에는 그럴 만한 특색이 없다.
“믿을 거라곤 여기 적힌 캐치프레이즈뿐인가.”
포스터에 적힌 글귀를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윤희가 부담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진짜로 이것말고는 홍보할 거리가 없었다.
“부원이 올까?”
윤희가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오지 않겠어?”
그렇게 말한 나도 사실은 반신반의 상태였다. 구름다리에서 이미 한 번 실패했으니까.
“너의 역량에 달렸다고 봐야겠네.”
윤희의 한 마디에 나의 어깨가 절로 무거워졌다.
* * * *
다음날.
나는 평소보다 10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홍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 바로 등교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HR시간에는 떠들거나 자리를 이동할 수가 없고, 점심시간에는 절반 이상이 교실에 없으니까. 방과 후에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갈 생각들뿐이니 홍보를 들어줄 리도 없고.
“영재야, 안녕. 웬일로 일찍 왔네?”
도연이가 해맑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뭘.”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내 자리에 왔다. 그리고 가방에서 홍보 포스터 한 장을 꺼냈다.
막상 하려고 하니 긴장감이 몰려왔다. 심호흡을 여러 차례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거치고.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나서 교탁 앞에 섰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잡담 하모니가 수그러들더니, 모두들 나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무슨 일이야?”
왼편에서 기대감에 가득 찬 이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홍보 포스터를 들어 올렸다.
“내가 최근에 스터디부의 부장을 맡게 되었어. 여기 보이지?”
나는 포스터에 적힌 ‘StudyDream' 글자를 검지로 톡톡 쳤다.
“스터디드림! 공부가 어렵거나 잘 안 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문의해 줘!”
“네가 가르쳐 주는 거야?”
세 번째 줄에 앉아있는 여진이가 물었다.
공부는 원래 스스로 하는 것. 이것이 나의 지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원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
“물론! 모르는 건 다 나한테 물어보라고. 대신 스터디드림에 들어와서.”
“이름 좀 촌스러운데.”
제일 앞에 앉아있는 윤지의 한 마디에 몇몇이 동의를 표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애초에 내가 지은 명칭이 아니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행세했다.
“혹시 궁금한 사항 있어?”
애들을 둘러보며 물음표를 던졌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체로 아이스버킷이라도 한 마냥 싸한 분위기.
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
교탁에 섰을 때의 자신감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제 윤희가 내비쳤던 의구심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구원자가 등장했다.
바로 우리 반 반장인 도연이었다!
도연이가 박수 두 번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나에게서 홍보 포스터를 빼앗았다.
“자, 여기. 우리 반 최고 범생이 영재가 공부를 직접 가르쳐 주겠다고 하네. 이런 기회 흔치 않을 걸? 공짜 과외라고 생각해 봐. 얼마나 이득이야?”
도연이가 그런 식으로 몇 마디 더 이어가자 반 애들이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입부하겠다고 손을 드는 애들은 없었다.
“이럴 때는 무엇이 이득이 되는지를 어필해야지.”
도연이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얘기하면서 홍보 포스터를 돌려주었다.
도연아. 너는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구나.
“아무튼,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나한테 얘기해 줘!”
마무리 멘트를 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뺨이 화끈거려서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반에서 할 수 있는 홍보는 끝났다.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방과 후가 될 때까지, 나에게 문의하러 오는 애들은 한 명도 없었다.
윤희는 너무 실망하지 말라며 위로했지만 실망감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홍보를 어지간히도 못한 모양이다.
폐부에서 터져 나오는 깊은 한숨.
윤희가 그런 나를 이끌고 스터디드림으로 향했다.
다행히 널찍한 책상에 앉아서 교재를 펼치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윤희도 오늘은 교재를 꺼내서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굴까?
주현 선배일까? 아니면 지아 누나?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반 친구 중 한 명?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안고서 문을 활짝 열었다.
“안뇽?”
이규원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