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20화-초년기의 첫 발(1) (20/131)



〈 20화 〉20화-초년기의 첫 발(1)

형준이의 가출 소동이 일단락되자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돌아왔다.
나와 슬기는 밥과 김치뿐인 저녁상을 먹었다.
치우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릇을 개수대에 놓은 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슬기가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오빠. 나 할 얘기가 있는데…….”

우물쭈물거리는 모습.
나는 얼른 말해보라며 턱짓을 했다.

“사실은, 내일까지 해야 하는 숙제가 있어서.”
“응? 너 어제 숙제 없다고 했잖아.”

슬기가 고개를 내리깐 채 꼼지락거렸다.

“형준 오빠 왔는데 어떻게 숙제를 하고 있겠어.”
“어휴.”

이유야뻔하다. 나한테 공부로 구박받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겠지.

“수학이랑 과학, 이렇게 두 갠데…….”

심지어 두 개나 있었던 거냐?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오빠. 도와주면, 안 돼?”

슬기가 조심스레 내뱉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지금의 슬기에게는 내가형준이보다  믿음직한 오빠일 테지. 그러므로 나는  신뢰에 보답하기로 마음 었다.
“슬기야.”

부르면서 슬기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화이팅.”
“오, 오빠?”

슬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오직 하나.  또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일이란?
당연히 공부지.

“두, 둘 중 하나만이라도 도와주면 안 돼? 응?”

나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우리 슬기, 화이팅!”

기운을 받으라는 의미에서 힘내라는 손동작까지 실시했다.
그러자 슬기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조금 과장하면 바닥과 맞닿을 정도로.

“오빠 안 돼.  머리로는, 무리야…….”

슬기가  옷깃을 부여잡았다. 이보다도 절박한 의사 표현이 있을까.

“슬기야. 무리라는 말은 사람이나 동물, 사물이 한데 뭉쳐있을  쓰는 표현이야.”
“나 혼자 힘들어. 못해애.”

이제는 떼쓰기 작전으로 노선 변경.
하지만 오빠된 자로서 이런 것에 휘둘리면 안 된다.

“슬기야. 이럴 시간에 어서 숙제를 시작하는 좋지 않을까?”

벽시계를 가리키자 슬기가 고개를  돌렸다.
 9시를 넘은 시각.

“으으으.”

슬기가 앓는 소릴 내며 내 옷깃을 놓아주었다. 그런 뒤 밥상과 숙제할 거리들을 챙겨왔다.

“힘내. 할 수 있어.”

몽당연필을 쥔 슬기가울상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니. 다 네 업보인 걸.
게다가 계속 내 도움을 받았다간, 스스로 하는 습관을 평생 들일 수 없을 테니까.

슬기가 힘겹게 숙제를 해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책상에 앉자마자 몬아미 볼펜을 손에 쥐었다.
한국사 문제 풀이에 심취해 있는 동안 문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엄마가 퇴근할 시간이 것이다.

거실로 나갔더니 숙제와 씨름을 벌이는 슬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통 이맘때쯤이면 골아떨어지고도 남을 때인데.
엄마는 그런 슬기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엄마. 지금 저녁상 차려올게.”

슬기에게 다가가려는 나를 엄마가 붙잡았다.

“슬기 공부하는데 밥상을 가져가면  그렇잖니.”
“아.”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
우리들의 배려 덕분에 슬기는 마음 놓고 숙제를  수 있었다. 아주 그냥 죽을 상을 하고 있었지만.

* * * *



방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공부를 재개했다. 한참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중, 바닥에 누워있던 휴대폰이 강하게 진동했다.
누구야,  늦은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나는 액정을 확인했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윤희.

어째서 새벽 1시에 전화를 한 거지?
나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러다가 순간 멈칫했다.
어제 내가 윤희에게 저지른 만행이 떠올랐기 때문에
‘왜 왕따를 당했냐?’ 같은 질문을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지.

고민의 늪에 빠진 사이 휴대폰의 진동이멎었다.
부재중 통화 아이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걸까?
그런데 걸고 나서 뭐라고 말을 꺼내지?

그런 나의 망설임을 날려버리려는 양, 휴대폰이 다시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심윤희.
나는 무슨 말이든 들을 각오를 다지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혹시 통화 괜찮아?]

윤희의 목소리는 평상시 그대로였다. 나는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어제 만든 홍보포스터, 20장 정도 인쇄해서 들고 가려고.]
“USB째로 들고 가기로 했잖아.”
[생각해 보니까 학교에서 인쇄하면 눈치 보일 것 같더라구.]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교무실 것을 사적으로 쓰기에는 좀 그렇지.

“아하.”
[문자로는 답장이 안 오길래 직접 전화했어.]

내가 한참 문제 풀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보낸 모양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사소한 소음은 귀에 들어오지 않다 보니, 이런 경우가 왕왕 발생했다.

“미안해. 공부하고 있었거든.”
[지금도 하고 있나 보네.]
“응.”
[공부에 방해될까봐 전화하지 말까 싶다가, 그래도 부장으로서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거든.]

부장 취급이 은근히 기분 좋게 다가왔다.
한때는 스터디부의 시옷 자만 꺼내도 질색하더니.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에게  말도 있을 것 같고.]
“아…….”

윤희가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또 겪게 되니 소름이 돋았다.

[아마 너도 마음에 걸렸을 것 같거든.]

윤희는 지금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어차피 꺼내려고 했던 말이다. 하지만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이렇게 전화상으로 해도 괜찮은 거야?”
[괜찮지 않다면 지금 얘기를 꺼내지 않았겠지.]

윤희의 시원스런 즉답.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말 미안해. 너무 눈치 없게 그런 얘기를 꺼내서. 너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주제였을 텐데. 내가 배려심이 부족했어.”
[…….]

윤희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혹시, 사죄가 너무 미흡했던 걸까.
다시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차에 윤희가 말했다.

[사실, 언젠가는 하게 될 얘기라고 생각했어. 삼자대면  언급하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내 예상보다 일렀지만.]
“진짜로 미안해… 머리 박으라고 하면 박을 테니까.”

스피커 너머로 윤희가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그보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
“아냐. 어차피 나 늦게 자니까.”
[방해, 했으려나?]

윤희가 눈치를 살피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아냐. 좀만 더 하고  생각이었어.”

나는 밝게 대답했다. 실제로 방해받았다는 느낌도 전혀 안 들었고.

[그럼 다행이고. 나는 이만 자려고. 내일 봐.]
“그래. 내일 보자.”

10분 남짓한 통과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척 알찬 대화를 나누었다는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스터디부의 남은 자리를 빠른 시일 내에 채우리라고 다짐했다.

* * * *


월요일이 밝았다.
이제 3월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교실로 들어서자 몇몇 여자애들이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응. 다들 안녕.”

나도 반갑게 화답했다.
이제는 다들 2반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새였다.입학 직후에는 도연이 말고 인사를 나누는 애들이 없었으니까.
매일 얼굴을 마주한 덕분에 이래저래 정이 든 것일 테지.
제일고등학교의 유일한 남학생이라는 점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여기는 듯하고.

아마 내가 아니라 형준이가 여기에 왔더라면 벌써 여자친구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구만.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일랑 조금도 안 하고 있다.
바로 돈, 머니(Money) 때문이다.

윤희는 저번 주와는 다른 시집을 읽는 중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푼 다음 윤희에게 눈길을 돌렸다. 시집에 집중하고 있는지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터디부에서 저렇게 공부하면 성적 많이 오를 것 같은데 말이지.

그때 윤희가 슬쩍 곁눈질을 하고는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도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손을 들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 * * *

어느새 찾아온 점심 시간.
교실이 순식간에 텅텅 비었고, 자연스레 나와 윤희만이 교실에 남게 되었다.

“한영재.”

노트 필기를 읽고 있던 나에게 윤희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스터디부 홍보 포스터였다.
그런데 토요일에 만들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글자 포인트라든가, 사진 배치라든가.

“네가 가고 나서 한 번 더 건드려 봤어.”

토요일에 같이 만들었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깔끔하니 보기 좋았다.

“더 좋아진 것 같아.”
“맘에 들어 해서 다행이네.”

포스터를 윤희에게 돌려주었다.

“이사장님께는 보여드렸어?”

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직도 말 걸기가 좀 거북해서. 그리고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말하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따지고 보면 우리도 아직 어린애이긴 한데 말이지.
하지만 윤희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아서 사족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제 이걸 붙이면 되는 건가?”
“아냐. 게시하기 전에 담당 선생님께 허가받아야 해.”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의아하게 여기고 있자 윤희가 보충 설명을 했다.

“학교 규정에 있어. 대부분은 관심 없어서 모를 거야.”
“너는 학교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도 이것저것 알고 있네?”
“일단은, 할아버지 학교니까.”
“그렇구나.”

윤희가 가방 안에서 클리어 파일을 꺼냈다. 어제 말한 홍보 포스터 묶음이 들어 있었다.

“이거 받아.”

윤희가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왜?”
“확인 도장도 다 받아야 해.”
“내가 하라고?”

검지로 나를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거리는 윤희.

“부장이잖아? 그리고 마지막 수정이랑 인쇄는 내가 해왔고.”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서 일언반구도 할 수 없었다.

“쩝. 알았어.”

나는 클리어 파일을 받아서 책상 서랍에 넣었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
이후로는 각자 할 일을 했고, 따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교실로 돌아온  나는 곧장 홍보 포스터를 챙겨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마침 담임선생님은 손에 머그컵을 쥔 채로 자리에 편하게 앉아있었다.

“어, 영재. 무슨 일이야?”

선생님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생님. 이거 확인 좀 해주세요.”

나는 선생님에게 클리어 파일을 건넸다.선생님은 홍보 포스터 한 장을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도장 찍어달라고?”
“네.”
“그래. 그나저나  만들었네. 윤희가 만들었어?”
“같이 만들기는 했는데… 마무리는 윤희가 다 했죠.”

선생님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장씩 도장을 찍어주었다. 스무 장밖에 없어서 작업이 금세 마무리되었다.

“이제 학교 게시판에다가 붙이면 된다. 참, 압정 없지?”

선생님이 서랍에서 압정이 든 통을 꺼내서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중에 갖고 와.”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
남은 건 본격적인 홍보뿐.



* * *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이 모의고사 성적표를 배부했다. 모의고사가 끝난 지 근 2주 만이었다.
 성적표에는 전 과목 1등급이 적혀 있었다. 역시 꾸준한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구만.
종례가 끝나자 나와 윤희는 천천히 가방을 챙긴  스터디부로 향했다.

“너는  등급 나왔어?”

도중에 물어보았지만,

“그건 비밀.”

라고 하며 윤희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부실에 가방을 벗어두고 복도로 나왔다. 오늘 스터디부 활동은 홍보 포스터 부착하기.

“반씩 나눠 들고 게시판마다 붙이고 오는 게 빠르겠지?”

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같이 다니면서 하는  낫지 않아? 무엇보다  명은 압정을 손에 계속 들고 다녀야 되서 불편할 테고.”

윤희의 말마따나 압정을 손에 들고 다니려면 여간 불편한  아닐 듯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

나는 그렇게 윤희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학교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초록색 게시판이 있는 곳마다 홍보 포스터를 붙였다.

학교 정문 앞에 있는 게시판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새 몇 장밖에 남지 않은 홍보 포스터.
우리는 3층에 있는 구름다리로 향했다. 목표는 구름다리 중간 지점에 세워진 게시판.

“한영재.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계단을 올라가던  윤희가 압정통을 내게 맡긴 채 어딘가로 향했다.
화장실이려나?
나는 홀로 구름다리로 향했다.
그런 뒤 게시판의 빈자리에 홍보 포스터를 부착했다.

남은 건 4장.
문득 여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발짝떨어진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둥그런 빨간테 안경을 쓰고 있는 여학생.
나는 명찰을 확인해 보았다. 노란색 명찰에 ‘김주현’이라는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노란색이면 2학년이네.
참고로 1학년은 초록색, 3학년은 흰색이다.

“저기, 저한테 할 말이라도?”

말을 걸었더니선배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

돌아오지 않는 대답.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저 그렇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선배가 조심스레 검지를 올리더니무언가를 가리켰다.

“그, 그 홍보물…….”
“이거요?”

포스터 한 장을 들어 올리자 선배가 고개를 아주 살짝 움직였다.

“한 장만, 주실, 래요?”
“저 1학년이에요.”
“그, 그래도…….”

선배가 우물쭈물거리며 눈치만 살폈다.
어쨌거나 원하는 걸 주면 되겠지?
나는 홍보 포스터  장을 선뜻 건넸다. 선배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잠깐만. 주는 걸로 끝내면  되지. 나는 여기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선배.”
“네?”
“저희 스터디부에 오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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