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7화-실 없는 마리오네트(1)
형준이가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형준이는 학원 갈 때를 제외하면, 이 시간에 돌아다닐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온 것은 모호한 답변.
나는 형준이가 메고 있는 배낭으로 눈길을 던졌다. 이것저것 쑤셔 넣은 건지 꽤나 부풀어 있었다.
“보따리 장사라도 하게?”
“일단 좀 들어가도 될까?”
들어오란 의미로 한 걸음 물러서자 녀석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어? 슬기는 어디 갔어?”
그 물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밥상머리에 앉아있었던 슬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문이 닫혀 있는 걸 보아하니 부리나케 들어간 모양이었다.
“좀 있으면 나올 걸.”
“그렇군. 그나저나 너네 집은 변한 게 없네.”
“바뀔 게 뭐 있겠어.”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형준이가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놀러온 지도 벌써 1년 가까이가 되었다. 1년이면 뭐 하나라도 바뀌었을 거라 기대할 만도 하지.
하지만 이런 낡은 집구석에 무얼 기대하리.
“배낭은 대충 던져 놔. 나중에 정리할 거니까.”
형준이가 배낭을 던져 놓는 동안 나는 상을 치우려고 했다.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준이에게 물어보았다.
“너저녁은?”
“아직.”
“저기 앉아. 밥 차려 줄게.”
밥상을 향해 턱짓을 했다.
“좀 미안한데…….”
형준이가 괜스레 뒷목을 문질러댔다.
“우리 사이에 미안할 게 뭐 있냐. 앉아있어.”
부엌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아! 내가 할게!”
슬기가 의욕 넘치게 팔을 걷어붙이는 꼴을 보니 방문 너머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슬기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방금 전 나와 밥을 먹을 때만 하더라도 잠옷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멀쩡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부스스하게 했던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돼 있고.
“오! 슬기야 오랜만이다.”
형준이가 태평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응! 오빠 안녕.”
슬기가 밝은 표정으로 형준이를 반긴 뒤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빠도 앉아있어. 내가 할 거니까.”
“그래. 네가 한다면야.”
슬기가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니 절로 아빠 미소가 그려졌다.
“슬기가 참 밝네. 언제봐도 귀엽다, 야.”
형준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게. 누구 때문인지.”
일부러 그렇게 내뱉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슬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 눈은 영락없이 귀여운 동생을 보는 눈이었다.
슬기야. 넌 아직 어려서 안 될 거야.
하지만 이 말을 직접 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오빠니까 그래도 응원하는 편이 낫지.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잠시 후 슬기가 조촐한 상차림을 차렸다. 형준이가 수저를 들어올렸다.
“슬기야, 잘 먹을게.”
“응!”
슬기가 나와 형준이 사이에 다소곳이 앉았다.
계속 관찰하고 있으니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 웃겼다. 살짝 놀려볼까.
“슬기야. 너 언제머리 정리한 거야?”
“아아냐! 나 평소에도 항상 정리하거든?”
되바라진 어조로 맞받아치는 슬기.
평소에는 귀찮다고 머리 정리 거의 안 하면서 무슨.
슬기가 주먹으로내 무릎을 가볍게 쳤다.
방해하지 말란 신호로군.
좀 더 놀려도 재밌지만 그랬다간 나중에 단단히 삐칠 게 분명하다.
그래, 이 오빠가 특별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형준이가 우리를 쳐다보면서 키득거렸다.
“너네는 언제 봐도 사이가좋구만.”
“다섯 살 차이 나잖아.”
옆에서 슬기가 고개를크게 움직이며 동조했다.
“그렇네. 연년생이나 두 살 차이면 많이 싸운다던데.”
“그건 걔네들 얘기고. 우리랑은 관계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형준이는 밥덩이를 삼키고는 제 감상을 말했다.
“흑미밥은 오랜만이다. 맛있네. 요새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별로 없거든.”
형준이의 숟가락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이윽고 형준이가 밥 공기를 깔끔하게 비웠다.
“잘 먹었다! 밥 맛있네.”
배를 두드리며 만족감을 표시하는 형준이.
“오, 오늘은 내가 설거지할게.”
슬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얘 좀 봐라?
“아냐, 놔 둬. 설거지는 항상 내가 해왔잖니.”
상냥한 어투를 가장한 빈정거림에 슬기가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나, 나도 자주 해!”
“잘 못하면서.”
“아니라구우.”
슬기가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오케이. 여기까지.
“그럼 부탁할게. 접시 깨지 말고.”
“아 진짜!”
슬기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부린 다음에야 상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접시 깬 적 있어?”
형준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나는 씨익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니.”
“아주 그냥 동생 놀리기에 맛들렸구만.”
“왜? 부러워?”
되묻자 형준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외동이라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해.”
“음, 그렇겠네.”
오늘은 슬기가 뒷정리를 하는 덕에 몸이 편했다.
나는 형준이의 배낭을 내 방으로 옮겼다. 뭘 집어넣은 건지 상당히 묵직했다.
“영재야. 우리 편의점 갈래?”
“편의점은 왜?”
벽시계를 확인해보니 곧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필요한 것 좀 사려고. 게다가 얻어먹기만 하면 또 미안하니까.”
이건 형준이 나름의 배려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배려를 했더라면 조금 불쾌했을 텐데, 오랜 친구 사이라 괜찮았다.
“그런 생각 말라니깐.”
손사래를 쳐도 형준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녀석은 슬기에게 슬쩍 눈길을 던지면서 말했다.
“같이 먹을 과자라도 사자는 거지.”
“그런 거라면야, 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슬기에게 잠시 편의점에 갔다 오겠다고 알렸다.
“응. 맛있는 거 사와!”
슬기의 배웅을받은 우리는 현관을 나섰다.
* * * *
1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편의점.
“마트가 더 싼데.”
편의점에 들어선 직후 형준이에게 건넨 말이었다.
형준이는 진열된 상품을 두리번거리며 대꾸했다.
“난 마트보다 편의점이 더 좋더라.”
하긴 이런 건 물주 마음이지.
오랜만에 온 김에 나도 대충 둘러보았다.
마트에 없는 과자나 음료가 많았다. 그리고 편의점답게 당연히 마트보다 비쌌다.
“영재야. 바구니 좀 가져와봐.”
형준이의 주문에 나는 출입구에 있는 바구니 하나를 챙겨왔다.
그때부터 형준이가 본격적으로 쇼핑을 했다.
핫바와 소시지 서너 개를 담는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팝콘에 감자칩, 크릴깡, 스트링 치즈, 1.5L 밀키수와 콜라, 졸지마커피, 오렌지주스 10병들이 선물세트 등등.
바구니를 묵직하게 채우고서야 우리는 계산대로 향했다.
“야. 너무 많이 산 거 아냐?”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올라가는 금액을 보니 내 심장이 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형준이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35,720원입니다.”
형준이는 지갑에서 5만원권 지폐를 꺼냈다.
역시 잘 사는 녀석답구만.
나는 빵빵하게 부푼 비닐봉지를, 형준이는 음료 선물 세트를 챙겼다.
“여기서 캔커피나 마시고 들어가자.”
형준이가 편의점 앞에 비치된 탁자를 가리켰다. 그렇게 우리는 빈자리에 앉아서 졸지마커피 두 캔을 꺼냈다.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
“자.”
캔커피를 건네자 형준이가 재빨리 낚아챘다.
“고마워.”
캔을 따고 한 모금 들이켜자 믹스커피보다 진한 단맛이 입 안을 적혔다.
나는 형준이의 음울해 보이는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가출한, 거지?”
늦은 시간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친구 집에 온 이유라면 뻔하다.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고.
“눈치 챘네. 맞아. 학원 갈 시간에 맞춰서 나왔어.”
형준이가 시원스레 인정했다.
“근데 너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 잊었어?”
“응? 갑자기 일 생겨서 못 가게 됐다고 문자 보냈잖아.”
“언제?”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한 7시 넘어서.”
“아.”
형준이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을 했다.
“내가 어제 학교에서 몰래 폰 쓰다가 걸렸거든.”
그래서 내 답장을 못 읽었던 거로군.
“그래서, 그건 무슨 일이었냐?”
형준이가 관심을 보였다.
솔직하게 여자애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놀러 갔다고 하면, 이 녀석 분명히 난리 칠 거다.
이럴 때는 사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서 말하면 된다.
“사실 내가 3월 초부터 스터디부 활동을 시작했거든. 오늘도 모임이 잡혀서 학교 도서관에 갔다 왔지.”
“뭐야, 너 스터디부해? 왜? 혼자서도 충분히 하잖아.”
“그런 게 있어.”
자세한 사정을 말하기는 어려워서 대충 얼버무렸다.
“뭔가 신경 쓰이는데.”
“그나저나, 너는 왜 갑자기 가출했어?”
나는 얼른 화살을 형준이에게 돌렸다.
형준이는 쥐고 있던 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녀석의 삼백안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점점 아래로 향했다.
“엄마하고 좀, 싸웠어.”
내뱉고 나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가출하면 흔히 꼽는 사유.
하지만 그게 형준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외였다.
내가 아는 형준이는 매우 성실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싹싹하기도 하고.
그래서 부모님과도 큰 다툼 없이 원만하게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의외네. 네가 가출했다는 게. 무슨 일로 그랬던 거야?”
“그게…….”
고민이 되는지 형준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는 갑갑함을 몰아내려는 듯 연거푸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녀석이 얘기해 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동안 만화책 모으는 것 때문에 종종 다퉜거든. 근데 이번에 학원에서 치른 시험 점수가 떨어져서 엄마가 다 갖다버리겠다고하길래… 나도 참다가 터진 거지.”
“몇 점?”
“10점. 총 30문항이었어.”
그 정도면 가벼운 컨디션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로군.
“실수 좀 했네.”
“그날 두통이 좀 있었거든. 근데 그걸 얘기해도 막무가내로 그러니 원. 그 순간에 너무 속이 상했지.”
형준이가 캔커피를 입 안에 털어 넣고는 탁자에 캔을 세차게 내려놓았다.
“우리 엄만 항상 그래. 공부 빡시게 하고 나면 숨 돌리고 싶잖아. 그때 잠깐 만화책 보는데 꼭 그걸 가지고 잔소리하는 거야. 네가 그래 가지고 인서울은 하겠냐고. 아니, 막말로 한성고입학도 했고,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 왜 날 못 믿어주는 거지?”
마지막 문장에서 형준이는 밤하늘을 향해 불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린 응어리였다.
나는 형준이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부모님과 고작 한두 번 다퉜다는 이유만으로 냅다 가출하는, 충동적인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솔직히 학원 딱 째고 PC방 갔을 때 좀 짜릿했다? 나 그동안 그런 적 없었으니까.”
형준이가 빈 캔을 만지작거렸다.
“네, 지금 심정 한 마디 인터뷰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캔커피를 집어 들고 형준이에게 들이댔다.
“아… 가출. 생각보다 별 거 없습니다. 쉬워요. 완-전 쉬워요!”
“이상 김형준 군의 소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준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방금 뭐냐?”
“그냥.”
우리는 한동안 서로 마주 본 채로 웃었다.
나는 남아있던 캔커피를 마저 다 마시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슬슬갈까?”
“그러자. 슬기 기다리겠다.”
“누가 들으면 네 동생인 줄 알겠네.”
우리는 또 마주보고 한바탕 웃었다.
* * * *
집으로 돌아오자 슬기가 현관 앞까지 쪼르르 달려왔다.
“우와아. 저게 다 뭐야?”
빵빵한 비닐봉지를 보더니 행복에 겨운 표정을 했다.행복하다 정도를 넘어서 황홀함마저 엿보였다.
“우리 물주께서 힘 좀 쓰셨지.”
“에헴.”
형준이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나는 깔끔한 신문지를 가져와서 바닥에 펼쳤다. 그런 뒤 형준이와 같이 그 위에 과자를 쏟아 부었다.
슬기는 찬장에서 종이컵 3개를 챙겨왔다. 밀키수를 컵에 채우는 것으로 과자 파티를 할 준비가 끝났다.
슬기가 막 과자를 입에 넣으려고 할 때에 나는 기습 공격을 했다.
“너 오늘 숙제 있다지 않았어?”
슬기의 손이 멈칫했다.
“오, 오늘은 없어.”
“진짜로?”
“진짜의 진짜로.”
그렇게 우리는 거의 2시간 가까이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11시가 넘어서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엄마에게 형준이가 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 하루 편하게 머물다 가렴.”
엄마가형준이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머니. 저, 이거라도…….”
형준이가 음료 선물 세트를 건네자 엄마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늘은 엄마와 슬기가 거실에서, 나와 형준이가 방에서 자기로 했다.
“침대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신세 지는 입장인데.”
나는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밤에 커피를 마신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영재야 고맙다.”
“뭘 이거 가지고.”
나는 천장의 곰팡이가 핀 자리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잠에 들려고 했다. 하지만 형준이가 나를 불러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영재야.”
“왜 그래?”
“나 사실 좀, 불안해.”
“그렇구나.”
가출을 해본 적이 없으니 이보다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야… 학교에는 가야 할 것 같아.”
예상 밖의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