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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16화-N극이 S극에게(5) (16/131)



〈 16화 〉16화-N극이 S극에게(5)

인생 최초로 또래 여자애의 방에 입장한다고 생각하니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진정해라, 내 심장.
윤희는 반쯤 닫힌 문을 가로 막고 서 있었다.

“정리는 얼추 했는데…….”

약간 굳어있는 표정.
윤희가 자신의 귀밑머리를 배배 꼬았다. 나처럼 윤희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 나도 여자애 방을 구경하기는 처음이라…….”

씩씩하게 말하려 했지만 결국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잠시  윤희가 줄곧 바닥에 박혀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거 없으니까…….”

그러면서 윤희가 문을 슬쩍 밀었다.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던 윤희의 방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윤희가 먼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그 뒤를 따랐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는 책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책장에는 다양한 두께를 지닌 서적들이 책장에 진열되어 있었다.
시집만 읽는 건 아니었군.
더블사이즈의 침대 위에 놓인이불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활짝 열어젖힌 커튼 너머로 보이는 발코니. 따스한 봄볕이 방 안에 온전히 내려앉았다.
흠집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한 원목 책상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나무로 만든 보관함이 놓여 있었다.

“의자 가져올게. 편하게 있어.”

윤희가 나를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여자애의 방 치고는 다소 심심한 풍경이었다. 적어도 침대 위에 인형 한두 개 정도는 있을 줄 알았으니까.
나는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나무 보관함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집중해서 내려다보던 중에 윤희가 의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궁금해?”

윤희가 의자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응.”

그러자 윤희가 나무 보관함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길쭉한 막대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이게, 뭐야?”
“만년필.”

윤희가 뚜껑을 열고 펜촉을 보여주었다. 얼핏 보기에도 비싸 보여서 차마 손으로 만지지는 못했다.

“써볼래?”
“아냐. 괜찮아.”

윤희가 만년필을 도로 집어넣었고 우리는 홍보물 제작을 위해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어제 정리한 내용 토대로 간단하게 만들어 봤어.”

윤희가 마우스를 조작해서 홍보물을 화면에 띄웠다.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대충 훑어봐도 어제 의논한 내용들이 대부분 반영되어 있었다.

“좀 마음에 안 들어서. 마무리가 덜된 느낌도 들고.”
“그래?”

내가 놓친 부분이 있는 건가.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더니, 이번에는 아쉬운 부분들이 보였다.
첨부된 이미지를  더 꾸몄으면 한다든가.
폰트를 더 보기 좋은 것으로 바꾼다든가.
글자 크기를  키운다거나.

윤희는 내가 제시한 의견을 토대로, 홍보물을  군데씩 수정해 나갔다.
한참 작업을 하던 중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윤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피식 웃었다.

“배 많이 고프구나?”

들렸구만…….
나는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가 지났네. 같이 밥 먹자.”
“미안…….”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방금  소리, 좀 귀여웠거든.”
“그 말은 취소해줘.”
“싫어.”

명료하게 대답한 윤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 * * *

모니터를 꺼놓은 뒤 식당으로 왔다.
식당이라고 한 이유는, 부엌과 칸막이로 구분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식당 정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 6인용 식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편한 데 앉아있어.”

윤희가 그렇게 말한 뒤 칸막이 너머에 있는 부엌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건 눈치 보이는데…….
윤희를 따라 칸막이 너머로 갔더니, 윤희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옆에 쌓아놓은 양을 보니 혼자 옮기기에 버거워 보였다.

“도와줄게.”
“아냐. 손님인데.”

나는 물러나지 않고 윤희 곁으로 다가가서, 반찬통 몇 개를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식탁에 놓으면 되지?”

윤희가 살짝 벙찐 표정을 내비쳤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반찬과 밥, 수저를 세팅하고 나니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홍보물을 만드는 동안에 사라진  알았던 어색함이 다시금 우리들을 에워싼 것이다.

“맛있게, 먹어. 별 거 없지만…….”

윤희가 나와 시선을 비꼈다.

“아냐. 진짜 잘 먹을게.”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 시선을  채 수저를 들었다.
새삼 식탁을 바라보니 엄청났다. 빛깔 좋게 익은 김치에 시금치 무침, 계란말이, 고추장멸치볶음, 두부구이, 불고기 등등.
우리 집 상차림에는 절대로 올라오지 못하는 반찬들뿐이었다.
처음에는 눈치가 보여서 깨작깨작 먹었는데, 죄다 맛있어서 나중에는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이 불고기 진짜 맛있네.”

기분 좋은 포만감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말문이 열렸다.

“아주머니 솜씨가 좋거든.”
“아주머니라니? 네 어머니께서 하신 게 아니고?”

 질문에 윤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집에 오시는 가정부이셔.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가정부는 드라마나 만화 속에만 있는 것 아니었나.
평생 놀랄 오늘 다 놀라는 기분이었다.

“이건 확실히 놀랄 만했을 것 같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놀라 자빠질 뻔했다고.”

윤희는 그런 내 얘기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이제 식탁 정리하자.”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도 식탁 정리를 돕기 위해 일어섰다. 둘이서 힘을 합친 덕에 식탁 정리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윤희가 식탁 위를 행주로 닦고 나서 내게 시선을 보냈다.

“디저트 먹을래?”
“에이, 밥도 얻어먹었는데 무슨.”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윤희가 눈웃음을 그렸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해주는데 거절하면 오히려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
“잘 부탁하고 자시고가 어딨어. 편하게 있어.”

윤희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소릴 내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가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사이 윤희가 쟁반을 들고 왔다. 기품 있게 생긴 찻잔 두 개와 쿠키가 담긴 접시가 쟁반에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찻잔에 담긴 진한 붉은색 액체를 손가락질했다.

“얼그레이(Earl Grey). 홍차의 한 종류야.”

윤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도 마주 보는 구도였지만, 식사 전보다는 어색함이 덜했다.
윤희가 찻잔을 들고 천천히 향을 음미했다.

차에 대해 무지한 터라 나는 윤희가 하는 양을 그대로 흉내 냈다.
그동안 맡아본 없는 은은하고 화사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기대를 품고 한 모금 머금었다. 향과는 달리 쌉싸름한 맛이 나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원래 간식이랑 곁들여 먹는 거야.”

윤희가 원하는 쿠키를 입에 넣은 채 홍차를 한 모금 마셨더니 궁합이 좋았다.

“완전 좋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음에 들어?”
“진짜 맛있어!”

나는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은근한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지면서 한결 편안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고마워. 쿠키는 오랜만에 만드는 거라 자신 없었거든. 맛있게 먹어주니 다행이야.”

근심을 날려 보내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윤희.
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그냥 가끔씩 취미로 만들어.”

가정부가 있어서 요리 쪽으로는 전혀 소양이 없을 줄 알았더니, 지레짐작이었구만.

“진짜 대단하다. 다시 봤어.”

들고 있던 쿠키를 입에 넣었다.
윤희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밝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덮어 놓았던 의문이 다시 피어올랐다.
왜 이런 애가 왕따를 당했던 걸까, 하고.



* * *


오랜 시간 끝에 홍보물 제작이 완료되었다. 최종 완성본은 윤희가 만들었던 초안과 많이 달랐다.
윤희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네.”
“그러네. 딱 좋아.”

확실히  마음에도 들었다.
윤희는 USB로 파일을 저장한  컴퓨터를 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담임선생님에게 확인받는 것과 스터디부 홍보뿐.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5시를 넘긴 참이었다.

“아. 슬슬 돌아가야겠는데.”
“벌써 가려고?”

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실례잖아.”
“…….”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윤희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
“응?”

윤희는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저기… 내가 쓴 시 한 번만, 봐줄래?”

갑작스러운 부탁에 순간 당황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읽을 줄 모르는데?”

완곡한 거절 의사가 아니라 진짜로 볼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러자 윤희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냥 읽어주기만 해도 좋으니까…….”

 세상에서 윤희가 시를 쓴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이사장님뿐.

“이사장님이 감상을 들려주셨어?”
“그런 것도 있고…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읽힐지도 궁금해서.”

윤희가 남 앞에서 이토록 수줍게 행동한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번도 없었다.

“너무 감상을 기대하지는 마.  진짜로 교과서 시 말고는 모르니까.”
“그래도 괜찮아.”

윤희가 책상 서랍에서 꺼낸 베이지색 시집 노트를 내밀었다.

“첫 페이지부터 보면 돼…….”

기어들어가는 음성.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  글자씩 찬찬히 읽어보았다.
윤희는 긴장되는지 연신 심호흡을 했고, 나는 그녀에게 옆에서 쳐다보고 있으면 조금 부담스럽다고 얘기했다.

“앗, 미안해.”

윤희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시에 집중했다.
시는 총 15편이었는데 다행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는 한 편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장까지 다 읽은  노트를 윤희에게 돌려주었다.

“어땠, 어?”

긴장감이 얼굴 전체에 서려 있었다.

“음…….”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작품을 공부한 적은 있어도 직접 평가하는 일은 처음이니까.

“무슨 말이든, 괜찮아. 각오했거든.”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어. 이해하기 쉬웠고.그렇지만  교과서 같은 느낌? 평범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랬어. 뭔가 더 얘기해 주고 싶은데  수 있는 말이 이런 거뿐이라…….”
“아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진짜로.”

윤희가 시집 노트를 소중한 인형인 양 끌어안았다.

“솔직한 평, 고마워.”

그러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쩐지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심윤희.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어떤 걸?”

윤희의 투명한 눈망울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다른 의도는 없어.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갑갑함을, 이 의문을 지금 풀어야겠다는 열망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이상 좁힐 수 없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내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챈 윤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이유로, 왕따를 당한 거야?”

폭탄이 터진 자리에 남은 것은 침묵이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엎질러진 물.
윤희가 고르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담담한 눈과 표정.

“다르니까.”

무심한 그 한 마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윤희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주변에서  정도로 잘 사는 애들 본 적 있어?”
“아니.”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을 한 번 초대한 적이 있다고 얘기했잖아.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같아?”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윤희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소문이 났어. 내가 뒤에서 애들 깔보고 다닌다고. 나는 그런   번도 없었는데.”

그 뒤로 이어진이야기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돈을 빌려달라고 매달리는 애들.
부자면서 왜 반에 피자나 햄버거를 돌리지 않느냐는 등의 강압적인 말들.
빌붙어서 뜯어먹으려고 했던 녀석들.
그것을 2년 가까이 겪었다고 했다.

“평범한 자기들과는 다르게 보였겠지. 그래서 중학교에 와서는 아예 친구를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친구를 만들게 되면, 결국 내가 어떤 애인지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아직,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윤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덤덤하게 고백했다.
사실은 전혀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하려는 태도가 심장을 아리게 했다.

“미안…….”

내가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슬기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윤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다르다’는  말.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그럼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가난하다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겪었으니까.

우리는 대척점에 서 있었지만, 서로 이해할  있는 지점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렵구만…….
그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을 열어준 나는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 안녕.”

형준이가 커다란 배낭을  채로 서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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