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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15화-N극이 S극에게(4) (15/131)



〈 15화 〉15화-N극이 S극에게(4)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정신을 놓고 말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가출했던 제정신을 되찾았지만, 얼빠진 반문밖에 할 수 없었다.

“뭐라고?”

진짜로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일, 우리 집에, 올 수 있는지…….”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니.
나는 당황해서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으음.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이해는 돼.”

윤희도 쑥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지금 윤희는 알게 된 지 불과 3주도 안 된 남자애를 초대하는 셈이니까.

“저기, 왜 갑자기 네 집으로 부르는, 거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줄 알았는데 아니었는지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잠깐만.  설명해 줄게.”

윤희의 설명은 이랬다.
자신과 이사장님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풀어준 일에 대해 보답한다는 의미로 이사장님이 초대한 것이라고.
거기에 홍보물 제작도 겸하자고 했다.

“아! 그래서.”

덕분에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윤희가 스스로 나서서 나를 초대할 리가 없지.
나는 삼자대면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윤희가 말하길,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난 이후 왕따를 당했다고 했으니 아직도 그에 대한트라우마가 남아있을 것이다.

“내일 12시까지 올  있어?”

평소보다 들뜬 음성에 나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가능할 것 같은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 형준이가 내일 놀자고 했는데.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냐, 이사장님의 손녀이자 같은 부의 부원인 여자애냐.

둘  무엇이 중요한가?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응. 좋아. 홍보물 제작도 혼자서 하는 것보단 둘이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고.”

앞으로의 내 인생 목표를 고려한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지!
형준아 미안하다. 인생이 걸린 문제라 어쩔  없었어.

“그러면 12시까지 스이첸 아파트로 오면 돼.”
“알았어. 근데 어떻게 가야 돼?”
“어? 모르는구나.”

윤희가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하기에 곧장 반박했다.

“모를 수도 있지.”
“아, 응.생각해보니 그렇네. 스이첸 1503동 307호야. 나중에 깨톡으로……. 미안. 스마트폰 아니었지.”
“너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실눈으로 윤희를 쳐다봤다.

“미안. 잠깐 깜빡했어.”

살짝 당황한 것 같은 반응이어서 나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윤희가 치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 집 주소 불러줄래? 네 집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경로로 길 찾기 하려고.”

나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주소를 모르는  아니다. 단지 알려주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끝에서야 대답했다.

“강성아파트야.”

참고로 강성아파트는 우리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윤희는 내가 머뭇거린 일에 대해서는 별말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버스로 25분 거리네. 생각보다 좀 멀구나.”

윤희가 그렇게 중얼거린 직후,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도 스크린샷으로 찍은 거 문자로 보내줄게.”

이윽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윤희가 말한 대로 경로가 그려진 스크린샷이 첨부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서 가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리겠군.

“미남 빌라 정류장에서 하차한 뒤에 걸어서 5분이면 우리 집이야.그런데 꼭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지도를 보내줘 놓고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될 거라니?
선뜻 이해가  가는 발언이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할 얘기는 이걸로 끝.”

윤희가 대화를 매듭지었다.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얘기가 길어져서 7시보다 15분이나 지난 상태였다.
우리는 가방을 메고 부실을 나섰다. 여전히불이 켜진 교사(校舍)와 달리 바깥은 완전히 해가 저물어 있었다.

나와 윤희는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나란히, 라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세 뼘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오가는 잡담은 없었다. 오로지 발소리만이 우리의 주변을 채우고 있을 뿐.
처음에 같이 돌아갈 때는 이 침묵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는데.

하지만 며칠째하다 보니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애초에 우리가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화기애애해질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고.
침묵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완만한 내리막길도 다 내려왔다. 여기서부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그럼 내일 봐.”

윤희가 인사말을 하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런 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위로 들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서 빨간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반지하에 사는 나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뱉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형준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담에ㅠㅠㅠ」

답장은 오지 않았다.




* * * *



다음날, 나는 작은 옷장을 활짝 열어놓은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입을 게 없었으니까.
나의 짧다면 짧은 16년 인생에서 또래 여자애의 집으로 가는 일은 처음이니까, 너무 후줄근한 차림은 사양이다.

하지만 갖고 있는 옷들은 죄다 후줄근하기 짝이 없었다.
전부 다 엄마가 시장에서 사온 옷들이다 보니 어쩔 수 없긴 하지.
그나마 여기서 덜 후줄근해 보이는 것으로 골라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교복보다는 나아야 할 거 아냐.
근데 아무리 봐도 그 옷이 그  같다. 내가 옷을 보는 눈이 전혀 없기도 하고.

한참 고민한 끝에 무난한 조합으로 깔맞춤을 했다. 시꺼먼 후드티와 작년에 산 회색 트레이닝 바지.
문득 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라면 한참 공부에 몰두하고 있을 시간이니까.
매무새를 점검한  방을 나오면서 말했다.

“슬기야. 오빠   봐주라.”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낙서를 하다가 잠든 탓이었다.
저러다 종이에 침이나 흘리지 말아야 할 텐데.
나는 슬기의 뺨에 깔려 있는 종이를 구출해 주었다. 나중에 어떻게든 써먹을 테니까.
슬기의 머리를 가볍게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집을 나섰다.
현재 10시 30분이니, 여유롭게 걸어가면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 윤희가 보내준 지도를 상기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고등학교 정류장까지는 항상 다니는 길이라 지도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모르는 길이라서 휴대폰으로 지도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대로를 따라 쭉 이어지는 파란색 경로선.

윤희가 말한 미남 빌라 정류장은 제일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미남 빌라 정류장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11시 40분이었다. 여기서부터 5분만 더 걸으면 도착이랬지?
나는 지도를 확인한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꼭대기에 ‘스이첸’의 영어 스펠링이 적혀있는 건물에 시선이 꽂혔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높이 솟아있는 건물.
어찌나 높은지 주변의건물들이 난쟁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설마…….”

나는 어제 윤희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미남 빌라 정류장 근처에 오면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될 거라고.
앞뒤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틀린 건 바로 나였다.

이거 실화냐?

정말 혹시나 해서 한 번만 더 지도를 확인해 보았지만 정답이었다.
윤희가 그 정도로 잘 사는 애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윤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조금 일찍 도착할거 같은데 괜찮아??」

금세 답장이 도착했다.

「상관없어.」

 마침표. 이쯤 하면 윤희의 아이덴티티라고 해도 되려나?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일이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 한편으로 편하기도 했다.



* * * *


스이첸 아파트단지는 입구에서부터 엄청나게 웅장한 곳이었다.  같은 놈들은 감히 발도 들이밀지 못할 성역같은 곳이랄까.
이사장님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근처에도 못 와봤을 테지.
1503동 307호 문앞에 있는 인터폰 호출 버튼을 앞에 두고 나는 굵은 침을 삼켰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음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먼저 들어가면 윤희와 인사하고, 이사장님에게도 인사를 하고.
그런 뒤에 윤희와 같이 스터디부 홍보물 작업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얻어먹지는 말도록 하자. 염치없는 놈으로 보일 테니까.

좋아. 준비  됐어.
호출 버튼을누르자 윤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누구세요?]
“나야. 한영재.”
[잠깐만 기다려.]

나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리 늦지?
노크를 두  했더니 그제야 문이 열렸다.

“어서 와. 오느라 힘들었지?”
“아냐. 아파트가 높아서 길 찾기도 수월했어.”

나는 윤희의 모습을 보았다.
항상 머리를 늘어뜨렸는데 오늘은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회색 홈원피스에 그것만으로는 허전한지 위에 베이지색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진흙 속에서 홀로 핀 연꽃처럼 고고하고 차가운 인상인데 지금은 한결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옷만으로도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뭐 해? 어서 들어와.”

윤희가 손짓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안으로 들어왔다.
현관이 넓었다. 예닐곱 사람이 한꺼번에 신발을 신어도 공간이 남을 만큼.
여태 가본 친구 집 중 가장 평수가 넓은 형준이네 집 현관도,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심지어 현관 바닥은 새하얀 대리석.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신발은 적당한  놔둬.”

윤희는 그러면서 유리문에 장치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유리문이 양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우와…….”

가정집에 자동문이 있다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재벌집 아들딸은 드라마나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더니만.
나랑 같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거 맞아?

“거기에  거 없어. 어서 들어와.”
“자동문 있는 집은 처음 봐서…….”
“자동문 자체는 어딜 가나 다 있잖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윤희.

“그, 그렇기야 한데…….”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나랑 감각이 완전히 다른  같아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는 윤희의 안내를 받으며 집 안 복도를 걸었다.
복도가 무척 길었다. 왜 윤희가 현관문을 열어줄 때 오래 걸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장에 있는 할로겐 전등의 노란 빛깔이 기다란 복도를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양옆 벽면에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앞장서서 걷는 윤희를 보고 있자니 ‘너 혹시 재벌집 딸이니?’,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참기로 했다.
복도를 지나자 드넓은 거실이 펼쳐졌다. 살짝 과장을 더하자면 축구 경기를 해도 될 정도로.

“부, 부모님이  하셔?”

결국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그냥. 좀 잘 나가는 중소기업 사장이래. 무슨 기업인지까지는 묻지 마.”

윤희는 담담하게 말하고는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지금 방 정리를 덜 해서… 잠시만 기다리면 되니까.”
“아하. 그런데 이사장님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나갔어. 원래 토요일에는 항상 집에서 쉬던 사람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원.”

윤희가 건너편 방문을 보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잠깐만. 그럼 지금 여기에는 나와 윤희뿐이라는 얘기잖아?

“금방 끝내고 올게.”

윤희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
소파의 푹신함이 무척 좋았지만 온전히즐길 수가 없었다.

단둘이라니.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의식하면 더 어색해지니까 아예 의식 자체를 하지 말자.

괜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눈이 닿는 곳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영화관을 방불케 하는 벽걸이형 TV.
양주를 잔뜩 진열해 놓은 유리 진열장.
진갈색 원목 탁자와 거실 한가운데에 깔아놓은, 비싸 보이는 융단.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의문이 솟구쳐 올랐다.
이렇게  사는 애가 무슨 이유로 왕따를 당했던 걸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점점 불어났다.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으니까.
생각을 하는 와중에 윤희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와도 돼.”
“응.”

나는 윤희에게 다가갔다.
지금 떠오른 의문은 나중에 해소하자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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