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4화-N극이 S극에게(3)
집에 돌아왔더니 웬일로 슬기가 상을 차리고 있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오빠아. 보지만 말고 상 좀 옮겨 줘.”
슬기의 요청에 나는 가방을 벗어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의 저녁은 미역국. 건더기가 미역뿐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솜씨라면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우리는 TV를 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차리는 건 내가 했으니까 오빠가 치워야 돼. 알았지?”
밥공기와 국그릇을 말끔하게 비운 슬기가당부하듯이 말했다.
날 뭘로 보고.
“말 안 해도 그럴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내 대답이 흡족했는지 슬기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했다.
나는 상을 치우고 나서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방에서 이면지와 몬아미 볼펜 한 자루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면지에는 이런저런 활자들을 끼적거린 탓에 여백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뒤집으면,
“크으. 깔끔하다.”
나도 모르게 아끼고 싶을 만큼 깔끔한 뒷면이 제 살을 드러냈다.
볼펜의 노크를 누른 뒤 윤희가 제시한 조건을 상기해 보았다.
‘스터디드림’이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기.
괜히 스터디나 드림에 얽매여서 잘 안 떠오르는 것 같으니 아예 벗어나서 생각해 보자는 취지인데, 확실히 좋은 방법 같았다. 부담감도 덜하고.
하지만 막상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자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범위가 제한되지 않다 보니 또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이다.
망망대해 혹은 끝없는 사막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너무 공부 쪽으로만 굳어버렸군.
흰 여백만 계속 노려보고 있으려니 눈이 시려서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재들 사이에 꽂아둔 「모든 물음표」가 눈을 사로잡았다.
나를 참고해 보게, 친구!
왠지 환청도 들린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다고 해도 길라잡이가 될 것 같지 않으니까.
팔짱을 끼고 한숨을 토해냈다. 이렇게 해서는 평생 홍보 못 할 판인데.
그러던 중 문득 윤희는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나처럼 머리를 싸매고 있을까?
아니면 영감을 따라 수월하게 쓰고 있을까?
무얼 하든 나보다는 잘하고 있겠지. 시를 쓰는 애니까.
상념에 빠져있는 와중에 바닥에 놓아둔 휴대폰이 메시지가 왔다고 알렸다. 발신자는 무려 심윤희였다.
번호 교환한 지얼마나 됐다고 벌써 연락인 거지?
나는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잘 되고 있어?」
초성체나 이모티콘이 일절 들어가지 않은 단문.
내가 알고 있는 그 심윤희가 맞았다.
그나저나 참 또래들답지 않은 메시지네. 아니면, 상대방이 나라서 이렇게 보낸 걸까?
「아니… 잘 안돼 ㅜ」
윤희보다는 훨씬 10대다운 내용.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반응하려나?
궁금증을 품은 사이에 금방 답장이 왔다.
「그렇구나.」
잠시 말문이 막혔다. 고작 메시지 하나에 구두점까지 쓰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기대한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뭐라고 적어서 보내야 하지?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쓸 말을 고르는 와중에 슬기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오빠아!”
“왜 그래?”
고개를 홱 돌렸더니 슬기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영어 숙제 있는데…….”
“안 돼. 공부는 스스로 해야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으면 안 이러지!”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까 순간 내가 잘못 말한 건가 싶었다.
“딱 한 문제만! 하나만 도와주면 되니깐.”
슬기가 쪼르르 다가왔다.
나는 해주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하지만 슬기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잠깐 머리 식힐 겸 하나만 가르쳐주자.
“진짜로 하나만이야.”
나는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며 딱 한 문제만 풀어주었다.
“오빠, 오빠. 하나만 더 해 주라. 응?”
슬기가 간절한 표정을 한 채 검지를 세웠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애초에 약속은 한 문제만 풀어주는 거였으니까.
슬기는 하나만 더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강경하게 나갔다.
“나 이제 공부할 거야. 나머지는 스스로 열심히, 잘, 최선을 다해서. 알았지?”
그 말에 슬기가 시무룩한 얼굴로 내 방을 나갔다.
나는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어떻게 답장을 보낼지 고민했다. 그러다 가장 무난한 말을 골랐다.
「너는 어때?? 잘 돼 가??」
「그냥 그래.」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
자기전까지 고민한 끝에 홍보 문구 10개를 간신히 떠올렸다.
역시 오래 버티고 있으면 뭐라도 나오는 법이다.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문제이지만.
등교를 하는 중에도 홍보문구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나는 역시 창의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만 곱씹을 뿐이었다.
2반 교실로 들어갔더니 도연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웃으며 화답한 뒤 자리로 향했다.
윤희는 바른 자세로 시집을 읽고 있었다.
손을 살짝 흔들자 윤희가 기척을 느꼈는지 시선을 들었다. 그러더니 손을 살짝 흔들고는 다시 시집에 집중했다.
그냥 무시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반응해 줘서 기분이 좋았다. 조금은 가까워진 것이려나.
HR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늘 해왔듯이 수업을 대비한 예습을 시작했다.
서너 페이지쯤 읽었을 때 무언가가 왼쪽 어깨를 쿡쿡 찔렀다.
“저기, 한영재?”
아주 가늘고 작은 윤희의 목소리.
나는 입모양으로 왜? 하고 물었다.
윤희는 입을 우물거릴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 아냐.”
결국 말은 않고 눈길을 피하는 윤희.
“뭔데 그래?”
“나중에.”
윤희는 내려놓았던 시집을 다시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
대체 뭐길래?
나는 나중을 기대하기로 하고 교과서를 내려다보았다.
* * * *
5교시 수업 종료와 함께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어깨가 뻐근해서 기지개를 켜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낼 토요일인데 올만에 놀자 ㅋㅋ」
절친인 형준이의 연락이었다.
제일고는 따로 휴대폰을 걷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쉬는 시간에 마음껏 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수업 중에 쓰면 가차 없이 압수 조치에 벌점 폭탄까지 받게 되지만.
절친이 오랜만에 놀자고 하는데 못 갈 일이 있을까. 나는 얼른 좋다고 답장을 보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윤희 쪽을 보았다.
HR시간 이후로 윤희는 여태 내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냐.
설마, 스터디부를 그만둔다거나?
나는 황급히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홍보 문구를 같이 고민하는 시점에서 그럴 리가 없지.
다만 추측해볼 만한 힌트가 없으니 아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뭐, 그래도 스터디부 활동 시간에는 얘기해 주겠지?
“오오! 그윽한 시선.”
머리 위에서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들어보니 이규원이였다.
“또 뭔 소리야.”
나는 툭 던지듯이 말했다.
“아직 미련이 남은 거지? 그렇지?”
규원이가 흥분한 채로 내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보브컷 스타일의 새까만 단발의 끄트머리가 그 동작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규원이의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태도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이래저래 안 좋은 전적들이 있다 보니 기분 좋게 대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제 그런 거 없는데.”
“허얼, 열정이 너무 빨리 식은 거 아냐?”
참자. 참아야 한다.
내가 뿌린 씨니까.
“윤희야. 넌 영재의 레이저를 못 느꼈어?”
규원이가 타깃을 변경했다.
“아니.”
냉랭한 음성.
상대할 마음이 1도 없는 듯 윤희의 눈은 시집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규원이는 다시 나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지인짜로 미련 없어?”
살짝 옆으로 찢어진 눈이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없다니까. 너 할 말 다했지? 나 공부해야 하니까 저리 좀 가라.”
필기 노트로 눈을 내리깐 채 손을 공중에서 휘휘 내저어도 규원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요새 둘이 좀 가까워 보인단 말야.”
보기보다 끈질긴 녀석이네.
“그래서?”
“아이, 궁금하잖아. 어떻게 됐을지.”
수업 시간에는 졸기 바쁜 애가 쉬는 시간만 되면 활력이 넘쳤다. 그 활력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는 게 문제지.
“이게 말로만 듣던 오지라퍼인가?”
일부러 비꼬아 말해도 규원이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머릿속이 아주 그냥 꽃밭이구만.
“의외다. 영재 넌 유행어 같은 거 하나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나도 10대거든.”
퉁명스럽게 쏘았다.
“그래서 무슨 볼일인데?”
“그냐앙. 심심해서.”
히히 웃으면서 규원이가 몸을 홱 돌렸다.
풍선을 문지른 마냥 부스스 일어난 규원이의 윗머리가 나풀거렸다.
두어 발짝 걸어가던 규원이가 갑자기 멈추더니 뒤돌아보았다.
“그래도 둘이 가까워진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말을 끝으로 규원이가 자신의 자리를 향해 뛰어갔다.
* * * *
우리는 스터디부에 왔다. 오늘의 활동은 어제 매듭짓지 못한 홍보문구 회의를 완전히 끝내는 것.
윤희는 오늘도 바로 내 옆에 앉았다. 물론 회의를 하기 위해서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개 적어왔어?”
“20개.”
윤희의 대답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는?”
이번엔 윤희가 반문했다.
“10개…….”
계면쩍은 대답. 부장으로서의 체면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체면이랄 것도 없긴 하지만.
“우선 서로 바꿔서 보자.”
나의 제안으로 우리는 쓴 것을 교환했다.
윤희는 내가 넘겨준 종이를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이거 어제도 쓴 거 아냐?”
“재활용할 수 있는 건 재활용해야지.”
“음. 그렇긴 하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하더니, 윤희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우리는 입을 다문 채 홍보 문구에 집중했다.
윤희가 써온 문구들은 잔잔한 느낌을 주거나 무언가에 호소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홍보에 걸맞은 느낌을 주는 건 없었다.
“한영재. 너는, 진짜 공부벌레구나.”
윤희가 한숨을 내쉬면서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고생해서 쓴 문구들이 모조리 차여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내가 아니지.
“그, 그래도 하나는 괜찮지 않아? ‘공부가 즐거워진다! 모르는 건 뭐든 물어보세요!’ 라든가.”
나는 써온 것들 중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한 구절을 들이밀어 보았다.
윤희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홍보문으로서 괜찮을지 몰라도 홍보 효과가 있을까? 공부를 즐겁다고 여기는 학생들이 얼마나 있겠어.”
그렇게 내 히든카드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럼 너는 네가 쓴것 중에서 뭐가 제일 괜찮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내가 질문했다.
“잠깐 공책 좀 줄래?”
그러면서 윤희는 내가 들고 있던 노트를 도로 가져갔다.
“따로 생각 안 해둔 거야?”
“일단 후보군을 최대한 만들어놓자고 생각했거든. 그러면 그 중 하나쯤은 건질 수 있을 테니까.”
윤희가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나는 읽은 평을 들려주었다. 홍보로 쓰기에는 잔잔하거나 들어와 달라고 호소만 하는 느낌이 드는 구절이 대부분이라고.
“음, 뭔가 시를 쓰는 사람 같기도 했고.”
“그말은 하지 마.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개인적인 느낌이야.”
윤희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이 중에서 하나만 고르면 되는 거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가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헤매지 말아요. 망설이지 말아요. 우리 함께 나아가요.”
말을 마친 윤희가 나와 마주 보았다.
“어때?”
주어가 빠진, 매우 간단한 문장들.
홍보 문구로 쓰기에는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시적이군.”
이라고 감평을 했다.
“그러지 말라니까.”
“나름 칭찬인데?”
윤희의 시선이 살짝 비껴 나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별로면 말고. 또 생각하면 되니까.”
“이걸로 하자.”
나의 결정에 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이 힘내자고 북돋아주는 기분이 들거든. 좋은 것 같아.”
“진짜 별 생각 없이 쓴 건데…….”
윤희가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심플 이즈 베스트라잖아. 하나 얻어 걸린 거지 뭘. 어쨌거나 이걸로 결정. 넌?”
평소보다 크게 고갯짓을 하는 윤희.
역시 칭찬은 고래, 아니 사람을 춤추게 한다.
문구가 결정되자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떤 사진을 넣을까 하는 의견에는 부실의 사진과 인터넷에서 괜찮은 그림을 뽑기로 했고.부 이름인 ‘스터디드림’을 영어로 적을지 한글로 적을지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다.
홍보 문구를 어디쯤에 위치하게 만들지도.
그 외에도 이런저런 내용으로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덧 7시가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걸 토대로 내가주말 동안 만들어 볼게.”
PC방 비용이 내 자금의 몇 퍼센트를 까먹을지 생각하며 짐을 챙겼다.
“한영재. 나 잠깐 할 말이 있는데…….”
나는 가방 지퍼를 닫는 동작을 멈췄다.
“그래. 뭔데? 혹시 아침부터 하려고 했던 말이야?”
“맞아. 그래서 말인데…….”
웬일로 윤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대체 뭐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내일 토요일이잖아. 그러니까… 내일, 우리 집에, 올래?”
모든 추측을 뛰어넘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