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3화-N극이 S극에게(2)
윤희가 한 발언 때문에, 나는 부 활동을 마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서 간략하게 의논을 했다.
공통 의견은 부 홍보를 해야 할 테니 홍보물을 제작하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럴싸한 홍보 문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각자 생각해 오는 걸로 하자. 어때?”
“그러자.”
윤희가 담담한 어조로 내 뜻에 동의했고, 우리는 그제야 스터디부를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저녁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배고파 죽겠다며칭얼거리는 슬기를 달래면서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영양가가 풍부한 콩밥과 신 김치가 전부.
밥그릇을 깔끔하게 비우고 난 이후 상을 치우는 일은 슬기에게 맡겼다.
“오빠가 해 줘어.”
슬기가 아양을 떨었지만 나는 손을 내저었다.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거든.”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 뒤 쪽지 시험을 대비한 복습과 기타 공부를 시작했다.
한참 집중해서 문제 풀이를 하던 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엄마가 올 때가 되었나?
고개를 쳐들고 벽시계를 보았더니 이미 밤 11시였다.
거실로 나갔더니 슬기는 TV를 켜놓은 채 자고 있었다. 엄마는 이제 막 신발을 다 벗고 거실로 들어선 참이었다.
“엄마 잘 다녀왔어?”
“응, 그럼.”
엄마가 손에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내게 건넸다. 안을 확인해 보니 참치캔 두 개가 들어있었다.
“엄마. 잠깐만 기다려. 금방 상 차려 올게.”
엄마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나는 간단하게 저녁상을 차렸다. 엄마가 수저를 들자 나는 슬그머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할 얘기 있어?”
엄마가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해야 될 얘기가 있어서…….”
엄마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때가 아니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시피 하니 어쩔 수 없다.
“어떤 거? 시집에 대한 얘기니?”
“아, 그건 아니고.”
나는 여태 하지 못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사실 내가 3월 초부터 스터디부의 부장 노릇을 하고 있거든. 그래서 요즘은 항상 8시쯤에 집에 들어와.”
“그렇구나. 너에게 잘 어울리네.”
“근데 스터디부를 내가 직접 만든 게 아냐. 이사장님이 나에게 부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셔서 하는 거거든.”
“이사장님이? 왜?”
엄마가 의아하다는 눈을 했다.
“음. 그게,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싶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고작 이 정도 이유로 설명이 될까 싶은 의문이 생겼다.
“엄마가 듣기엔 꽤 어려울 거 같은데?”
“엄마 생각에도 그렇지?”
그러자 엄마가 수저를 내려놓고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래도 열심히 할 거지?”
“물론이지.”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하면 딸려오는 보수가 크니까.
물론 아직은 여기까지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공부를 마저 하겠다고 얘기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 충전기에 연결해 둔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화면에 도연이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여보세요.”
[영재야. 잠깐 통화해도 괜찮지?]
“응.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게, 문자를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어서 말야. 전화로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문자?”
하고 되물은 직후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쪽지 시험 관련으로 질문할 거리가 있다고 했었지 참.
“미안. 다른 일하느라 까먹고 있었어.”
[영 소식이 없길래 혹시나 했었거든.]
도연이가 열없이 웃었다.
[보나마나 공부하느라 그랬겠지?]
“응…….”
너무 정확한 예측이어서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구. 사실 이렇게 전화한 건 그냥 좀 헷갈리는 거 한두 가지만 물어보려고. 괜찮지?]
“물론이지.”
도연이가 한 질문은 두 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높새바람이 부는 이유와 펀치볼(Punchbowl)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나는 기억하는 내용을 토대로 알기 쉽게 풀이해서 설명했다.
[진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뭘, 이 정도 가지고. 낮에 도와주기도 했으니까 답례지.”
[그렇구나. 역시, 서로 돕고 살아야 하나 봐.]
우리는 한동안 실실 웃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 많이 늦었네. 이만 끊어야겠어. 내일 보자.]
“응. 잘 자.”
인사를 나눈 뒤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풀다가 만 문제집을 바라보다가 윤희와 약속한 일이 떠올라서 문제집을 덮고, 깔끔한 이면지를 책상 위에 올렸다.
“홍보문구라…….”
가만히 중얼거리면서 볼펜으로 이면지를 두드렸다. 하얀 것은 여백이고, 머릿속은 텅텅 비었고…….
“망할.”
새삼 깨닫고 말았다. 나는 창의력 따위 1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약속한 건 지켜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한 단어라도 써놓아야 한다.
그렇게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볼펜으로 이면지를 두드리길 수십 분.
무언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놓쳐선 안 된다는 일념으로 그것을 곧장 이면지에 옮겨 적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 내일 또 의논하면 되니까.
* * * *
다음날 1교시에 지리 선생님은 미리 예고한 대로 쪽지 시험지를 배부했다. 총 15문항이었고, 이 중 서술형이 4문제였다. 시험 시간은 단 20분.
“5문제 이상 틀리면 벌점 부여할 테니 그리들 알아.”
선생님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그 정도면 많이 배려해준 셈이다. 서술형 4문제를 다 틀려도 객관식 11문항을 다 맞추면 되니까.
수업 때 나온 내용뿐이라서 문제들이 하나같이 쉬웠다.
시간이 다 되자 선생님이 시험지를 거둬들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채점 결과표 줄 거고, 누차 강조했듯이 점수 미달자는 벌점 5점 들어간다.”
“네…….”
대답들이 시원찮았다.
하긴 시험에 벌점이 걸린 판에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험난했던 1교시와 나머지 수업 시간이 지나 어느덧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애들이 순식간에 급식실로 뛰어가면서 교실이 금세 텅텅 비었다.
나는 오늘 필기한 내용을 복습하기 위해 노트를 펼치려 하는데 도연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영재야. 어제 물어본 거 나왔더라.”
“그러게. 시험 쉽게 쳤겠다.”
“응!”
도연이가 내 책상에 손을 얹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뭘 그런 거 가지고. 점수는 어떨 거 같아?”
“잘하면 만점일 걸?”
도연이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네 노트 참 탐나게 생겼다.”
그러면서 도연이가 노트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오늘 배운 내용들 복습하려던 참이었어.”
나는 도연이가 보기 편하도록 노트를 앞으로 약간 밀었다. 도연이가 고개를 수그린 채 노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글씨 되게 작게 쓰네. 빈 여백도 없고.”
“습관이라서.”
“글씨만 크면 알아보기 쉬울 거 같아.”
그러더니 도연이는 다른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윤희야. 오늘 쪽지 시험 어땠어?”
시집을 보고 있던 윤희가 한쪽 이어폰을 빼내고는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렸다. 도연이는 방금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냥 그랬어.”
무심한 어조로 답한 윤희가 다시 이어폰을 끼려고 했다.
“윤희 너는 왠지 공부 잘할 거 같다. 영재만큼은 아니겠지만.”
윤희가 손을 멈칫했다.
“맞지?”
“아니야. 잘 못해.”
대답을 마친 윤희가 곧바로 이어폰을 꼈다.
도연이는 나름 친해져 보려고 한 것 같은데 다소 쌀쌀 맞은 반응이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네. 너희도 빨리 와. 안 그러면 반찬 거의 안 남을 걸?”
“괜찮아. 좀 있으면 갈 거거든.”
“그래. 나중에 봐.”
도연이가 손을 흔든 뒤 교실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나와 윤희만 남아있었다.
도연이가 말한대로 슬슬 밥을 먹으러 가야겠구만.
나는 노트를 덮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영재.”
고개를 돌리자 윤희가 이어폰을 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얘기한 거 해왔어?”
“어. 일단은…….”
나는 가방에서 이면지를 꺼냈다. 펼쳐서 건네주자 윤희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공부에서 꿈을 찾자, 스터디드림.”
윤희가 나와 이면지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보니 무안해졌다.
“지, 진짜 이런 것 말곤 안 떠올라서…….”
나는 괜히 뒷목을 주물러댔다.
“별로다, 너무.”
윤희의 감상에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창의력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다 보니…….
“오고 싶게 할 만한 요소가 안 보여.”
“그, 그만. 나도 아니까…….”
쥐구멍이 있으면 머리만이라도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다.
“어려웠어?”
윤희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나는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너무 어렵더라고. 계속 생각해 봤는데.”
“혹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한 거 아닐까?”
윤희의 반문에 나는 어젯밤 일을 반추해 보았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후우. 나머진 부실에서 생각해 보자.”
윤희가 이면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방에 다시 집어넣은 뒤 급식실로 향했다.
* * * *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습관처럼 스터디부로 향했다.
오늘은 개인 공부가 아닌, 홍보문구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간격을 좁혀서 앉았다.
“스터디드림이니까…….”
윤희가 자신의 노트에 ‘Study Dream’을 적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역시 스터디에 중점을 둬야 하지 않아?”
“그래서 ‘공부에서 꿈을 찾자’ 같은 문구를 적었구나?”
“응…….”
정곡이라서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드림을 포인트로 잡을 때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
윤희가 물었다.
“꿈, 인생의 목표, 성공…….”
되는 대로 내뱉자 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거창하게 가잖아. 특색도 없고.”
“너 진짜 가차 없구나?”
나는 이렇게나 열심히 고민하고, 의견을내고 있는데.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
거리끼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시원스런 대답이었다.
“아, 머리 아파.”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새하얀 천장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꿈을 만드는 자리?”
“공부는!”
나는 홱 돌아보면서 지적했다.
스터디부의 최우선 목적은 공부. 다른 건 몰라도 그 점은 꼭 강조해야만 한다.
“그래. 내가 말했지만 아닌 것 같아. 애초에 스터디드림이라니, 이름부터가 너무 촌스럽다고.”
“동감이야.”
나는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휴, 영감탱이. 작명 센스하고는.”
윤희가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공부가 만들어내는 꿈은?”
“공부에 너무 집착하잖아.”
“하지만 이건 꼭 강조해야 한다고.”
선생님도 수업할 때 중요한 내용은 꼭 강조를 하듯이 말이다.
“아예 스터디드림이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말아볼까?”
윤희가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스터디라는 이름에서 이미 공부하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잖아. 그러니까 아예 눈길을 사로잡는 방향으로 문구를 작성해보자는 거지.”
“음. 듣고 보니…….”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윤희가 제안한 대로 하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그래. 그렇게 해 보자.”
“웬일로 고집을 다 꺾네?”
“스터디드림에 얽매였다간 식상한 것만 나올 듯해서. 그나저나 너 생각보다 의욕 있네.”
“그냥 궁금해졌어. 이 스터디부가 어디까지 갈지. 과연 영감탱이, 아니 할아버지의 목적은 무엇일지.”
그러더니 윤희가 나와 눈을 마주했다.
“넌 왜 스터디부의 부장을 맡았어?”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카운터.
이럴 때의 윤희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하고서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니까.
여기서 말을 흐리면 무조건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3년 내내 전액 장학금이 걸렸거든.”
전부터 미리 준비해 둔 멘트를 읊었다.
“흐음.”
윤희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탐색하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일단은 이렇게 넘겼구만.
우리는 다시 토론을 이어갔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문구는 나오지 않았고,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집에서 각자 문구를 더 생각해 보자고 하며 오늘자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전화번호 좀 알려줄래?”
나는 짐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윤희를 바라보았다.
“같은 부니까. 그리고 홍보 문구 아이디어 공유도 하고. 깨톡으로 하면 편하잖아.”
얘가 깨톡을 한다고 하니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이네.
물론 이런 감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내 거 스마트폰 아냐.”
나는 주머니에서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휴대폰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완전 유물이네.”
신기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윤희.
“스마트폰은 공부에 방해되니까. 아무튼 번호 불러줄게.”
우리는 번호교환을 마치고 나서 스터디부를 나왔다. 문을 잠그는 동안 윤희가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걸이에 맞춰 찰랑거리는 연보랏빛 머리칼.
…이 오묘한 기분은 대체 뭘까.
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 나서 윤희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