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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12화-N극이 S극에게(1) (12/131)



〈 12화 〉12화-N극이 S극에게(1)

방과 후 우리는 지체없이 스터디부로 향했다.
오늘은 윤희가 스터디부에 입부한 지 3일째가 되는 날이다. 날짜로는 3월 18일.
이제는 해가 저물어도 날씨가 온화하여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에 비해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사장님이 제안한 스터디드림의 부장 자리.
그것을 수락하면서 따라온 심윤희 입부시키기 미션.
윤희가 말한 아리송한 구절을 해석하느라 머리 싸매기.
그리고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동분서주했던 일.

조용히 공부만 하려고 했던 나는 정말로 정신없이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래도 다 해결했으니 이젠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저번 주에 모의고사도 끝났고.
이제는 중간고사를 대비하여 공부에 몰입하면 된다.

열쇠로 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왼쪽을 기준으로 네 번째 책상을, 윤희는 두 번째 책상을 선택했다.
윤희는 스터디부에 입부한 이후에도 여전히 교실에서 홀로 지냈다.
얌전하게 앉아서 시집을 읽었고, 가끔 이어폰을 낀  창밖을 구경했다.
하긴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변하던가.

윤희가 친구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이유는 삼자대면 때에도 말했듯, 왕따를 당했던 기억 때문이리라.
어쩌면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도 같지만 더 파고들지는 않을 작정이다.
지금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때이다. 나와 윤희 사이에 놓인 책상 하나만큼의 거리를.
윤희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

이따금 자세를 바꿀 때 뒤척이는 소리.
볼펜 노크를 달칵거리는 소리.
천국이 멀리 있는  아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지.

스터디부의 분위기는 공부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책상이 큼직하고 의자도 편안한 데다 비치된 물건들도 전부 공부와 관련된 것뿐.
최근에는 이사장님에게 부탁하여 CD플레이어도 갖다 놓았다.
덕분에 영어 듣기 문제도 수월하게 풀 수 있게 되었다.

할 말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은 윤희의 성격도 스터디부의 부원으로서 적격이다.
남들에게는 지루한 지옥이겠지.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나는 몬아미 볼펜을 멈추고 눈동자만 슬쩍 돌렸다.

윤희는 언어 영역 책을 펼쳐놓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쯤 공부를 하면 반드시 5분 간 휴식을 취했다.
그나저나 얘, 수학 공부는 한 번도 안 했던 거 같은데?

“저기, 심윤희. 영어나 국어, 사탐, 과탐은 하면서 정작 수학은 안 하는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어려워서. 별로 재미도 없고.”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어투에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설마, 가르쳐 줘야 한다거나 그런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공부는 어디까지나스스로 해야 한다.

이건  평소 지론이다.
슬기를 가르치는 거면 모를까, 동급생을 가르치는 일은 사양이다. 나는 내 공부만으로도 바쁜 사람이니까.


* * * *

수요일 3교시는 지리 수업이다.
사실 3교시는 기력을 많이 앗아가는 시간이다.
1~2교시는 아침밥이 소화가 덜 된 시점이고, 4교시는 점심시간을 바라보며 버틸 수 있다.

반면 3교시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마디로 애매모호한 시간대.
그것을 증명하듯이 책상과 한 몸이 된 애들이 태반이었다. 심지어 웬만해서는 졸지 않는 윤희마저도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사람은 나와 맨 앞줄에 있는 도연이.  외 몇몇 애들 정도였다.

지리 수업 시간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
곧 정년인 지리 선생님 특유의 높낮이가 없는 저음 때문이다.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절로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하니까.
집중력을 최대 장점으로 꼽는  귀에도 그렇게 들리는 마당에 다른 애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그게 선생님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이놈들!”

선생님이 출석부로 교탁을 내려치자 교탁이 부서질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몇몇 애들이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다.

“요즘 들어 너무 자는 거 아니냐.”

수업 때와 다르게 목소리의 억양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긴장한 기색이었다.

“요새 1학년 애들은 왜 하나같이 이래!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그러더니 선생님이 칠판 지우개를 들고 칠판을 거친 동작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칠판에 그려져 있던 동북아 지도와 태평양이 금세 사라졌다.
무얼 하려고 저러는 걸까.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다들 입을 다문 채 선생님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하얀 분필을 손에 쥐더니 무언가를 휘갈겼다.

‘쪽지 시험’

선생님이 분필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고는 우리들을 향해 선언했다.

“내일 1교시에도 수업 있지? 그때 볼 거야. 총 15문제 내겠다.”

쪽지 시험의 범위는 오늘배운 내용까지고, 5문제 이상 틀리는 애들은 전부 벌점을 부여하겠다는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자 무섭게 모두가 아우성을 질렀지만, 선생님은 전혀 아랑곳 않고 수업을 재개했다.
벌점 5점의 위력 덕분인지 자는 애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예외는 존재하는 법.
규원이는 잠에서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팔자가 편한 건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뭐 저 녀석이 벌점을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이래.
나는 규원이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시 칠판을 바라보았다.
다른 애들과 달리 나는 쪽지시험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 * * *



3교시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인사도 받지 않고 곧장 교실을 나섰다.
나는 쉬는 시간 짬을 이용하여 지리책을 첫 페이지부터 천천히 살펴보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에 모인 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의문을 표했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러고 보니, 우리 반에 구세주가 한 명 있잖아?”

라고 하며 혜진이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영문을 몰라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혜진이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영재야, 너 입학식 때 1학년 수석 대표였잖아.”
“응. 그랬지.”
“우리이.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이번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구세주라고 했지?

그렇다면 얘네가 내게 부탁할 내용은…….
“노트 필기한  좀 공유해 주면 안 돼?”

예측한 그대로였다.
“너네 다?”

둘러보니  7명이었다.
7명 전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책 채로 빌려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필기한 부분만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면 되는데.”
“상부상조라잖아. 어려운 처지끼리 서로 돕는 거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상부상조라니. 그냥 적선해 달라는 거네?”

내 지적에 그 애가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중학생  이런 경우를 몇 번 겪어봤다.
평소에는 인사도 안 하던 여자애들이 시험 기간이 임박하면 나에게 달라붙곤 했던 경우를.
처음엔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니까 그저 좋다고 원하는 대로 다 알려주었다. 하지만 시험 기간을 넘기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두세 번 그런 경우를 겪고  뒤로 나는 아예 그런 부류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있는 7명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노력은 전혀 하지도 않고서, 위기가 닥쳐오니 그저 편하게 넘길 생각뿐.
이렇게 약아빠진 애들에게  노력의 대가를 나눌 생각은 1도 없다.

“안타깝지만  공유  할 거야.”

여지를 주지 않는 것만큼 확실한 거절은 없다.
모르는 부분을 물어본다면 얼마든지 가르쳐줄 의향이 있지만, 거저먹으려는 심보는 질색이다.

“허! 공부만 잘하면 다야?”

혜진이가 기가 찬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반응인데 말이지.

“완전 이기적이네. 남자가 뭐 그리 쪼잔해?”

옆에서 다른 애가 거들었다.
아마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몰아세우면 결국 항복해 버릴거라고.
그건 정말로 오산이자 오판이다. 내가 폼으로 수석하는 게 아니란  보여주지.

“응. 공부 잘하면 다지.”

내 대답에 여자애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참고로 평소에는 공부에 대한 자랑을 하고 다니지 않는다.
나의 노력을 구태여 드러내면 괜히 재수 없게 비칠까 봐.
하지만 이런 기싸움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내가 얼굴은 못 생겼어도, 자존심은 있다.

“나도 노력해서 하는 건데, 그렇게 쉽게 얻어가려고 하면 돼?”

입학 직후에는 남자가 나뿐이었으니까 기를 죽이고 있었지만, 3주나 지났으니 적응도 충분히 되었다.

“그, 그래도 같은  애들인데…….”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면 시간 내서 가르쳐 줄 수는 있어. 하지만 필기한 내용을 그대로 공유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내가 노력해서  거니까.”

여기서 가르쳐 달라고 하는 애가 있다면 그렇게  셈이다.
하지만 막상 생각을 실천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트 필기만 보여 달라고 부탁하는 애들은, 내가 이렇게 나오면 도리어 역정을 내기 바빴으니까.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그때 도연이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네  해?”

아무래도 정황을 살피다가 온 모양이었다.
그러자 여자애 한 명이  됐다는 듯이 도연이에게 이러쿵저러쿵 사정을 얘기했다.

“음… 그치만 영재는 공유할 마음이 없는 거지?”
“맞아. 대신 물어보는 내용은 알려줄 생각이야.”

좀 귀찮긴 하겠지만.
도연이가 애들을 빙 둘러보고 나서 손뼉을 쳤다.

“어쨌든 본인이 싫다고 하니까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영재가 완전히 거절하는 것도 아니잖아?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면 가르쳐주겠다고 하니까.”

도연이가 정리하자 애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도연아. 넌 생각보다 믿음직한 반장이구나.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고마워.”
“아니 뭘. 반장이니까.”

도연이가 방긋 웃었다.

“아, 영재야. 이참에 번호 알려줘.”

그러면서 도연이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응?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도연이가 약간 쑥스러워했다.
반장님 번호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해지겠지.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 않지만, 형준이덕분에 다룰 줄 알고 있다. 나는 흔쾌히 번호를 입력하고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도연이가 문자로 자신의 번호를 보내주었다.
이로써 번호 교환 끝.

“영재 넌 2G폰 쓰는구나.”
“스마트폰은 공부에 방해되잖아.”

사실은 통신비가 부담스러워서 계속 쓰는 거지만.
그러는 사이 4교시 수업 종이 울렸고 도연이는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꽤 완고하네.”

고개를 돌려보니 윤희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긋기는 잘하거든.”
“그렇구나.”

윤희는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리고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 * * *

결국 정규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질문하러 찾아온 애는  한 명도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나와 윤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스터디부로 향했다.

우리는 책상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감.
나는 노트를 꺼내서 지리 수업 시간에 필기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면 윤희는 교재가 아닌 시집을 꺼내 들었다.

“공부는? 내일 쪽지시험도 있잖아.”
“나한테는 이것도 공부야.”

윤희가 시집 제목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왜 하필…….”
“시는 소재를 가리지 않거든. 그리고 제목에 이끌리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시를 쓴다고 했지?
스터디부에 온 이상 공부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내가 부장이라고 해서 무언가를 강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것만 보지는 말고 다른 공부도 해.”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했더니 윤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우리는 한 마디 대화 없이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기상 알람과 시계  때 외에는  데가 없는 휴대폰이 웬일로?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작은 화면에 문자 메시지 알람. 발신자는 도연이였다.

혹시… 지리 필기한거 조금만 가르쳐주면 안될까???
내용이 좀 빠져있어서ㅜㅜㅜ
미안~  좀 부탁할게

너도 그랬던 거냐? 낮에 받았던 내 감동은…….

“누구길래?”
“도연이. 우리 반 반장.”
“그 정돈 알아.”

윤희가 언짢아했다.

“오늘 지리 수업 필기한  조금만 가르쳐 달라고 그러네.”
“거절할 거 아냐? 오늘 낮에 그랬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한 윤희가 다시 시집으로 눈을 돌렸다.
걔네들처럼 일방적으로 부탁만 해왔더라면 무조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연이는 나를 도와주었다.

“음, 오늘 낮에 도와줬으니까 가르쳐 줘야지.”

다시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7시 반이 되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책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부실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윤희가 불렀다.

“왜?”

고개를 돌리자 윤희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근데 이제 부원 모집해야 하지 않을까?”

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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