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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11화-엉킨 실은 하나씩 풀어야 한다(5) (11/131)



〈 11화 〉11화-엉킨 실은 하나씩 풀어야 한다(5)

내 대답을 들은 윤희가 턱을 들고 연붉은빛으로 하늘을 태우는 석양을 올려다보았다.
강렬하지만, 찰나의 순간밖에 지속되지 않을 빛깔.

“돌아가자, 이사장실로.”

나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희는 조금 전 울음을 그쳤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진정된 모습.
그러나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두 손을 말아쥔 채.
나는 윤희에게 다가갔다. 결심이 서지 않았다고 해서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알아. 알고 있어.”

내지르는 대답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윤희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너도 이대로 서 있기만 하는 건 싫잖아.”

윤희가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여전히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삼자대면이니까.”

윤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젠 괜찮아. 갈 수 있어.”

내민 손을 지나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윤희.
나는 손을 거두고 그 뒤를 따라갔다.
딱히 무안하지는 않았다.
윤희는 눈치가 빠르니까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 손을 잡고 따라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 표명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나보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것 역시도 그렇다.
데리러 온 것은 나였지만 거기에 응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
윤희는 자신의 의지로 이사장님과 대화하는 일을 택했다.
희망이 보였다.


* * * *


우리는 아무 말하지 않고 이사장실 문 앞에 섰다.
참고로 윤희는 여기에 오기  미리 세수를 했다. 덕분에 울었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윤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천천히 오므라드는 손가락.
막상 여기까지 오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윤희가 결심을 굳힐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윤희가 눈을 힘주어  채 노크를 하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우리는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움직여서 이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장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윤희의 시작 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왔구나.”
“네.”

대답은 내가 대신했다.

“여기 앉으렴.”

우리는 이사장님의 권유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윤희를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에서 나의 역할은 사실상 끝났다.
이제부터는 윤희와 이사장님의 무대다.

“윤희야.”

자상한 부름.
윤희는 소파에 앉은 직후부터 계속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 노트가 닿아 있었지만 선뜻 가져가지는 않았다.

“내 잘못이다. 미안하구나.”

이사장님이 노트를 윤희 앞으로 천천히 밀었다.

“기분이 안 좋다면 다음에 얘기하자꾸나.”

윤희가 다시 돌아온 이상 이사장님은 알고 있을 것이다.
윤희에게는 대화를 나눌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저렇게 말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배려겠지.
윤희는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쥔 채 무릎 위에 올려두고만 있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윤희가 시선을 살짝 들었다.
이사장님이 침묵을 지키다가 신중하게 운을 뗐다.

“나를, 가족들 전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를 들려줬으면 한다. 정말로 솔직하게.”

이사장님은 현재 짐작하는 바가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질문은 그게 맞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일 터.
윤희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학생 때의 일이 이유예요.”

이사장님의 짐작대로였다.

윤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사정은 대충 들었겠지.”
“응.”

윤희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이사장님과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주먹  손을 서서히 펼쳤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개미 만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들을  있었다.
이사장님이 상체를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속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집에 혼자 있었으니까.”

나는 이사장님을 쳐다봤다. 이사장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사장님이 한 얘기와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었다.

“엄마 아빠는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나한테 신경 써주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항상 일이 있었고… 그게 꼭 나쁘다고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가정을 위해서 그랬던 거니까.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요.”

윤희가 잠깐 말을 끊었다.

“하지만 마음이 꼭 그렇게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이사장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쓸쓸했던 거죠.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있으니까그나마 나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제가 늦게 들어가면 모두가 걱정할 테니 항상 집에 일찍 들어갔죠.”

나는 이사장님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분명 초등학생 때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고 했었지.
지금의 윤희밖에 모르는 내게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기억해요? 4학년 때  한 번 친구들 데리고집에 왔던 일요.”
“물론.”

이사장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 아빠는 친구들이 오는 걸 싫어했고, 사실 저도 내키지않았어요. 그치만 그날은 데려왔죠. 걔네들이 꼭 와보고 싶다고 계속 성화를 부렸거든요. 그리고 저도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고요.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데려오지 않았죠. 왜인지 알아요?”

이사장님은 눈만 끔뻑거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듣고 있던 나도 자못 궁금해졌다.
“그 날 이후로 따돌려졌기 때문이에요.”

말에 담긴 내용에 비해 담담한 어조였다.
이사장님의 눈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윤희에게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이사장님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집에 놀러 온 이후로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 때만 그랬어요. 중학교에 올라가고부터는 그러지 않았죠. 처음부터 친구를 만들지 않았으니까.”
“이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그랬니.”
“얘기했어요.”

이사장님이 말문을 닫고 턱을 매만졌다.

“굳이 기억해내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미안하구나.”

가족이니까 알아챈 거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눈치가  빠르다.

“한두 번밖에 했으니까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요. 게다가 그땐 할아버지가 바쁘기도 했으니까.”
“진로 문제에 대한 상담이라면 기억이 난다만…….”
“그나마 얘기할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윤희의 말에서 유추해 본다면, 이사장님에게마저 실망했다는 것이 된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서 고민이라고 했을 때, 먼저 다가가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하셨죠? 하지만 먼저 다가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민 상담을 했던 거예요. 먼저 다가가는 노력을 할 수 있었다면 애초부터 상담 자체를 하지도 않았겠죠.”

윤희가 잠깐 말을 멈추고는 손가락을 살짝 오므렸다.

“물론,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어요.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마음을 먹고 행동하는 건 어려웠어요. 따돌려졌던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또 그렇게  것이라는 두려움이 항상 존재했어요. 상담을 했던 건, 그런 두려움이나 부담을 줄여보고 싶어서였죠. 결과는 아시다시피.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탓하지는 않아요. 제가 처한 상황을 전부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이사장님이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근데 그거 알아요? 할아버지는 항상 그랬어요. 정론, 원론. 물론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한 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한테는 꼭 그게 들어맞지 않았어요. 아빠랑 진로 문제로 다퉜을 때도 그랬죠. 너의 꿈을 찾아라, 작은 목표부터 세우고 나아가라. 솔직하게 말하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내가 무슨 꿈을 꿀 수 있는지, 어떤 목표를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는 해준 적이 없으니까.”

이사장님은 나처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것이 윤희의 진심이었다. 아마 여기로 다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듣지 못했을 속마음.

“…이 문제도 결국 내가 혼자서 해결해야 하겠죠. 하지만 누구든, 저에게 조금만 더 신경 써 주길 바랐어요. 엄마 아빠나 할아버지나. 근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어요. 정말 이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할까?”
“윤희야…….”

이사장님은 도중에 말을 삼켰다.
윤희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저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결국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거라고도 생각했고. 그래서 가능한 피하려고 했죠. 그게 쌓이고 쌓여서… 지금까지 온 거에요.”

후.

윤희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갈등의 불씨는, 가족 간에 흔히 있을  있는 사소한 오해 때문이었다. 오해가 쌓이고 쌓여 불신을 낳고 벽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다 쏟아내고 나니좀 낫네요. 조금은 후련해진 기분이에요.”
윤희는 자신의시작 노트를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말해 줘서.”

이사장님이 무거운 음성으로 한 마디 했다.
윤희가 노트를 가져가더니 자신의 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엉망이었을 거예요. 시작한 지 얼마  됐으니까.”
“시인을 꿈꾸니?”

이사장님의 물음에 윤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읽기만 하는  넘어서 직접 써보고 싶어진 거예요. 엄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물론.”

계속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던 윤희가 그제야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면서 나도 간신히 등을 기댈 수 있었다.

“근데 한편으론 분해요. 결국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아서. 이 노트로 저를 유인한 거나 이 애, 한영재를 끌어들인 거나.”
“그건 아니란다 윤희야. 너에게 그럴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겠지.”
“이대로 계속 지내도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요.”
“아무튼 고맙구나.”

이사장님의 눈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윤희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질 테니까.

“목마르겠구나. 뭣 좀 마시겠어?”
“저는 커피요.”

내가 먼저 선수를치자 윤희도 커피를 주문했다.

“아무래도 애들한테 녹차는 인기가 없나 보구나.”

이사장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종이컵 세 개에 커피 믹스를 부었다.
녹차가 인기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만.
잠시 후 이사장님이 커피 세 잔을 가져왔다.
문득 창밖을 보니 석양이 물러가고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깔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 가지물어봐도 돼요?”

그러자 이사장님이종이컵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왜 저를 스터디부에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학교에서마저 계속 혼자 지내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단다.”
“그것뿐만이 아니겠죠.”

나는 커피를 마시던 동작을 멈췄다.
분위기가 어째 급변하는 것 같은데.

“학교 전체에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려는목적도 있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학교 애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잖니.”
“다른 학교들처럼 야자를 시키면 되죠.”
“강제적인 방법은 그다지 효과를  본단다. 그보다는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니까.”

윤희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들이켰다.

“할아버지는, 제가 혼자 지내는 걸 두고 볼 수 없다고 했죠?”
“그렇단다.”
“그건 자기만족, 아니 진심인 거죠?”
“물론.”

윤희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들어갈게요.”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하는 윤희.
뭐, 동아리에 들어가는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나나 이사장님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입장이니까.
실제로 이사장님의 얼굴이 무척 환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옆을 돌아보던 윤희가 물었다.

“그렇게 매달리더니 별로 기뻐하지 않네?”
“그럴 리가. 엄청 기뻐.”

단지 이렇게  걸 알고 있었으니까 놀라지 않았을 뿐.

* * * *



우리는 이사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윤희가 스터디부의 부실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윤희는 스터디부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내부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내일 들어와서 구경해도 되지만 본인이 희망하니까 흔쾌히 그러기로 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윤희는 문턱에 서서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책상 배치가 반원 형태구나.”
“옮겨보려고 했는데  되더라고.”

윤희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책상 표면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말하는 윤희.

“그게 뭐야?”

윤희가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자 연보랏빛 머리칼이 함께 치렁거렸다.

“그건 비밀.”

나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윤희가 나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를 필요로 하는 부장님.”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화단에서 나는 윤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를 필요로 한다고.

그것은 스터디부의 부원으로서 필요하다는 의미였지만, 윤희는 그런 의미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을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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