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7화-엉킨 실은 하나씩 풀어야 한다(1)
텅 빈 교실.
나는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로 윤희를 스터디부에 입부 시킬 방법이 없는 걸까.
머릿속에서 질문이 홀로 메아리를 쳤다. 질문에 대한 답은 짙은 안개 너머에 있어서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앞뒤가 꽉 막힌 상황.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는 한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때 교실 뒷문이 무언가에 부딪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담임선생님이 교실 뒷문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너 아직 안 갔어?”
“아, 어쩌다 보니…….”
교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벌써 5시 반을 향해 달려가는 시곗바늘.
“뭔 일 있어? 답지 않게 멍때리고 말이야.”
“음, 별일은 아녜요.”
대답하면서 황급히 가방을 둘러멨다.
선생님이 핑거스냅을 하더니 곧장 운을 뗐다.
“아 맞다! 스터디부는 어찌됐냐? 부원 모집했어?”
“네?”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스터디부에 관한 얘기는 이사장님과 윤희 말고는 아직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선생님이 가볍게 웃음을터뜨렸다.
“내가 아직 얘기 안 했구나. 내가 스터디부 담당 교사거든.”
“진짜요?”
“응.”
놀랄 게 뭐 있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님.
“야. 명색이 선생님인데그런 일조차 모르고 있으면 되겠어?”
“아.”
나는 계면쩍게 웃었다.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 너네들 알아서 하는 활동이라 내가 관여할 일은 없겠지만.”
“네!”
내 대답을 들은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늘은 스터디부에 가지 않고 곧장 하굣길에 올랐다. 따로 들를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목적지는 바로 미래책방.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해가 저물지 않은 걸 보니 이제 진짜 봄이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3월 중순이라 여전히 쌀쌀하기는 하지만.
학교 정문을 지나서 완만한 경사로에 들어섰다. 내가 늦게 나와서 그런지 제일고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터벅터벅 걸어갔다.
사실 코앞까지 다가온 모의고사를 생각한다면, 오늘 스터디부를 빠져서는 안 됐다.
아직 언어 영역 문제집 풀이가 모자라니까. 거기에 과학 탐구 문제집은 그다지 신경 쓰지 못했다. 영어 듣기 문항도 손을 못 댄 상태고.
말고도 수학과 사회 탐구 과목도 확실하게 공부해야 한다.
다 챙겨야하는데 비해 시간이 촉박했다.
학교 수업 시간은 정말 중요한 시간이니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스터디부 활동으로 2시간.
집에서 밤 9시 이후로 하는 공부 시간.
이때는 보통 네댓 시간을 기본으로 보낸다. 그러면 하루에 개인 공부를 하는 시간은 7시간.
이틀이면 14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귀중한 2시간을 통째로 날려 먹고 있는 셈이다.
이유는 단 하나.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그 속을 뒤흔든 것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이 구절에 대한 힌트는 눈치껏 알아냈다.
오늘 윤희가 읽고 있었던 시집, 「모든 물음표」.
저자는 윌리엄 브렌더.
윤희는 그때 저 구절을 읊으면서 윌리엄 브렌더를 언급했다.
저기에 어떤 단서가 담겨있을 것이다.
사실 저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읽어낸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지 말지는 미지수이지만.
하지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사안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조금 전 윤희와 나눈 대화 덕분에, 윤희와 이사장님 간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사장님이 직접 나서지 않고 나를 통해서 심윤희를 스터디부에 가입시키려고 하는 행위는 여기서 기인했으리라.
덕분에 이쪽이 무척이나 골치 아파졌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은가, 이다.
이거 완전, 집안 문제에 끼어드는 격이잖아?
나는 지금 스터디부의 부장이고, 이사장님이 내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심윤희를 데려와야만 한다.
스터디부 활동을 통해 제일고 전체의 성적을 끌어올린다면, 나는 내년부로 한성고의 학생이 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목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내가 제3자라는 사실은 한 치도 변하지 않는다.
산 넘어 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동안 어느덧 경사로 끝까지 내려갔다.
여기서부터는 대로가 뻗어있다.
나는 우리 집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다른 의문 부호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제일고를 되살리겠다는 계획에 꼭 윤희가 있어야 할까?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나.
‘나’라는 구심점이 잡혀있다면 나머지는 꼭 윤희가 아니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사장님은 윤희를 콕 집어서 부원으로 삼으라고 하는 거지?
단지 손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아니면 이면에 또 다른이유가 있는 걸까.
이사장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도 답안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 * * *
그로부터 한참을 걸어서야목적지인 미래책방에 도착했다.
우리 집에서 도보로 대략 5분 거리에 위치한 곳.
여기는 언제 방문해도 한결같았다.
오래된 철제 미닫이문과 유리창에 붙어 있는 ‘미래책방’이라고 쓰인 파란 글자.
‘ㅁ’의 귀퉁이가 살짝 떨어져 나가있는 것도 예전부터 그랬다.
출입문 양쪽에 놓아둔 평상은 켜를 이룬 책 묶음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표지에 누런 때가 묻었거나 색이 바래거나 한 상태였다.
주인아저씨는 가게 안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아저씨가 의자에서 일어나 웃는 낯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영재 오랜만에 왔구나.”
“고등학교 들어가서 여러모로 바빴거든요.”
“이제 막 1학년 된 거지?”
“네.”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시간도 참 빠르다. 너 처음 왔을 때는 요만했잖아.”
아저씨가 내 허리 언저리까지 손을 들어 올렸다.
끽해야 1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높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것보단 컸어요.”
“그랬었나? 내 기억엔 그 정도였는데.”
아저씨가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그래도 1m는 넘었다구요.”
“아유, 그래. 알았어 알았어.”
항변을 계속 이어가자 아저씨가 귀찮은 티를 내며 기권했다. 다행히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들어온 문제집이 없는데 어쩌지. 저번에 들어온 거라도 볼래?”
지금 내 방과 가방에 있는 문제집들은 전부 여기서 산 것들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저씨가 나에게 오히려 먼저 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뇨. 오늘은 다른 책 찾아보려고요.”
“그래? 네가 웬일로?”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그런 일이 있어요.”
비즈니스적(?)인 대화를 공공연하게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 찾는 게 뭐냐?”
“혹시, 「모든 물음표」라는 책 있어요?”
“윌리엄 브렌더 시집 말이냐?”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으로 물어보았는데 희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게 그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거든. 벌써 30년도 다 됐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란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하죠?”
그러자 아저씨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오오. 요새 시에 관심 있는 애를 본 적이 없는데… 네가 원래 이쪽에 관심이 많았던가?”
“아. 저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
고맙다 형준아.
나는 슬며시 웃었다.
“요새 애들은 책을 너무 안 봐서 탈이야. 기껏 좋은 작품을 들여놔도 찾지를 않으니 원. 어쨌거나 「모든 물음표」 하나만 있으면 되지? 잠깐 기다려라. 내 기억으론 창고에 갖다 놓았거든.”
아저씨가 책방 구석에 있는 쪽문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평소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문학 코너를 기웃거렸다. 하단에 설치된 책장에는 시집이 가득 꽂혀 있었다.
안도현, 최승자, 남진우, 전동균, 황인숙, 김수영, 정지용, 기형도, 오규원 등등.
교과서에서 본 시인과 생전 처음 보는 시인 이름이 뒤섞여 있었다.
윤희는 이런 시집도 읽은 걸까?
왠지 느낌이 오는 시집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무도 펼쳐본 적이 없는지 무척 깔끔한 상태였다.
중간 부분을 펼치자 시 한 편이 눈앞에 드러났다.
한 글자씩 읽어보니 교과서에서 흔히 봐온 시 작품과는 느낌이 달랐다.
마지막 연까지 다 읽고 나서 든 처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혹시나 싶어서 다른 페이지도 펼쳐보았지만, 무슨 내용인지 쉽사리 파악되지 않았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는 그래도 해석이 되던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시집을 제자리에 도로 꽂았다.
책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동안 아저씨가 쪽문 밖으로 나왔다. 손에 얇은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이게 구석에 있더라고. 찾느라 애먹었다.”
아저씨가 책을 내밀었다. 약간 더러워진 표지에 ‘모든 물음표’라는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얼마예요?”
“뒤에 봐봐.”
아저씨의 말대로 뒷면을 살펴보니 가격이 적혀있었다.
정가는 10,000원. 여기서는 3,200원.
현재 내 지갑에 모인 돈은 5,630원. 이것조차도 오늘 아침에 엄마가 용돈으로 1,000원을 줘서 모인 금액이다.
살 수는 있다.
살 수는 있지만… 한 번에 70%에 달하는 금액이 빠져나가 버린다.
어떡하지?
돈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가 내 인생의 기본 철칙이지만, 때로는 용단(勇斷)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 시집이 필요한 상황이고.
무엇보다 아저씨가 창고에서 먼지를 쐬어가며 어렵사리 찾아온 책이 아니던가.
현재 나를 막아 세우고 있는 것은 심리적 저항선이다. 이 허들만 넘어가면, 3,200원을 지불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허들이 태산 같아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집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자 아저씨가 한 마디 보탰다.
“상태에 비하면 그리 비싼 값도 아닌데.”
“그, 그렇죠…….”
손에서 잔떨림 증상이 나타났다.
여기까지 와서 다음에 사야겠네요, 같은 말을 할 수도 없고.
아저씨가 구레나룻을 벅벅 긁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래도, 영재가 우리 책방 단골이지. 음, 오늘은 기분이다. 그냥 들고 가.”
“진짜요!?”
나도 모르게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다음엔 이런 거 없어.”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책방을 나섰다.
아직 세상은 살 만하구나!
규원이와 윤희를 상대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
나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에 PC방으로 향했다.
어디까지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지, 놀려는 목적이 아니다.
아저씨의 통 큰 배려 덕분에 이용요금 2천원이 아프게 다가오지 않았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스터디부에서 하지 못한 영어 듣기 문제를 풀었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거의 9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슬기가 엎드린 자세로 TV를 보고 있었다.
“오빠아. 오늘도 형준 오빠 만난 거야?”
“아니. 다른 용무 보느라 늦었어. 저녁은?”
“아직.”
대답을 끝낸 슬기가 옆으로 뒹굴뒹굴거렸다.
나는 방에 가방을 갖다 놓고 바로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오늘자 저녁 메뉴는 콩자반과참치가 들어간 김치찌개였다.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저녁거리지.
한창 밥을 먹는 중에 슬기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오빤 스터디부라는 게 재밌나 봐?”
“재밌긴. 학생이면 당연히 공부해야지.”
“당연하니까 하기 싫어.”
나는 슬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는 그냥 머리 아픈 것 자체가 싫은 거잖아.”
슬기가 나를 흘깃 째려보더니 머리에 얹은 손을 톡 쳐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정리하던 중에 「모든 물음표」가 손에 잡혔다.
당장에 닥쳐온 모의고사도 중요하지만, 강렬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시집을 펼쳤다.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다. 살다 살다 시집을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이따금 자세를 바꿔가며 한 페이지씩 읽어갔다.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는 거의 2시간 가까이가 흐른 뒤였다.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그 속을 뒤흔든것은?’
이 문구는 초반부에 수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집의 그 어디에도 여기에 대한 해석은 적혀있지 않았다.
희망이 다시금 멀어졌다.
나는 시집을 책상에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이걸 처음 말한 사람은 윤희.
형준이는 어제 이 구절을 듣자마자 마그마를 연상했다. 이 연상 작용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화산이 분출하는 것이 바로 마그마니까.
마그마는 지하에 파묻힌 암석이 녹아서 생성된 것.
불현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에서 스스로 납득할 만한 어떤 해답이 도출되었다.
짜릿한 기분마저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고도 시원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래, 이거라면 분명 윤희라고 해도 꽤 놀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