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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4화-고르디우스의 매듭(2) (4/131)



〈 4화 〉4화-고르디우스의 매듭(2)

나는 멀어지는 심윤희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적의마저 느껴지는 어조로 칼날을 내뱉었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붙잡겠는가.

“그만 생각하고, 공부나 하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털고 나서 스터디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까 겪었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되어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라도 공부를 재개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됐다.
결국 오늘은 평소 공부하던 양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말았다.

“후우.”

나는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 * * *

그날 밤, 이부자리에 누운 지 꽤 지났지만 눈은 여전히 멀뚱멀뚱했다.  옆에 누워 있는 엄마와 슬기는 간헐적으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앞으로 말 걸지 마…….”

심윤희에게 들었던 말을 되뇌었다.
솔직히 말해서 충격이었다.
고작  정도 정황 증거만을 가지고 눈치채버릴 줄이야. 내 예상보다 더한 거부 반응을 나타낼 줄도 미처 몰랐고.

그래도 말 걸지 말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내가 뭐,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스터디부의 부원이 되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이런저런 잡념들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돌다 보니 당연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부자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저 누워 있기만 하려니 너무 갑갑했던 것이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서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러고 나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렵겠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
나는 다시 이부자리로 돌아와서 눈을 질끈 감았다.
결심한 것을 해내기에 앞서 지금은 숙면이 필요하니까.


* * *

하지만 나는 동이 틀 때까지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덕분에 등교하는 내내 하품이 계속 올라왔다.
이대로는 학교 수업에 지장이 생긴다.
잠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 마트에서 거금 500원을 깨고 캔커피를 사서 원샷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졸음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면 세수부터 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던 중 길가에 굴러다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것은, 몬아미 볼펜이렷다!
거리가 있었지만 샛노란 몸통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이건 분명 500원을 낭비하고 만 나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일 것이다.
때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고.

나는 순식간에 볼펜과 거리를 좁히고는 매의눈으로 외관 상태를 스캔했다.
먼지가 약간묻었지만 이 정도면 합격.
나는 전광석화처럼 볼펜을 낚아챈 다음 새까만 노크를 두세  작동해 보았다. 정상 상태였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보면 된다.
바로여기서 이것이운명의 만남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밀한 속내를 들여다봐야 한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볼펜의 촉 덮개를 풀었다.
아무리 겉이 깔끔해도 잉크가 없으면 말짱 꽝이니까.

긴장되는 순간.
이윽고 덮개를 완전히 풀었다. 잉크 잔량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거다!
이루 말로 다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나는 황홀경마저 느끼면서 볼펜을 다시 조립한  주머니에 곱게 넣었다.
흥분한 덕일까 그새 잠기운도 달아났다. 이러면 오늘 수업도 문제없이 들을 수 있겠구만.

나는 들뜬 발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교사(校舍)에 들어서자 알아들을 수 없는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입학식 직후에는 꽤 조용했는데 그새 많이들 친해졌구나. 하긴 동성끼리니까.

나는 우리 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소란이 뚝 끊겼다. 누군가 잘 나오던 라디오의 전원을 꺼버린 마냥.
그리고 온통 나에게로 쏠리는 시선들.

“뭐, 뭐야?”

다들 갑자기 이러니 당황스러웠다.

“왜, 왜들 그래?”

그 와중에 심윤희는 홀로 별세계에 있는 양 시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쟤도 참 대단하구나.
잠시  애들이 언제 그랬냐는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재빠른 태세 전환은 뭐지?

영문을 모른  나는 일단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내 자리가 가까워질수록 애들이 흘리는 키워드들이 고막을 건드렸다.
심윤희, 한영재, 단둘이, 구름다리, 별관.

“영재야.”

도연이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대체 뭔 일이 난 거야?”

내가 질문을 꺼내자마자 무섭게 교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마치 내가하는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모조리 듣겠다는 듯이.

“궁금한 게 있어서 말야. 네가 어제 별관에서 심윤희한테 고백했다는 거, 사실이야?”
“뭐?”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어제 느낀 불길한 예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출입문 근처에 앉아있는 규원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른손으로 V사인을보냈다.
너 잘한 거 1도 없거든?

“애들이 다 궁금해하고 있어.”

도연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정도는 지금 분위기를 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심윤희를 보았다.
근처에서 자기 이름이 언급되는데도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바로 강철 멘탈이라는 건가.
나는도연이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물었다.

“심윤희 쟤는아무 말도 안 했어?”

도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나에게 관심이 쏠린 거로군.
이해는 한다.
원래 우리 나이 때는 연애 문제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까.
내가 당사자만 아니었어도 은근히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더구나 여기는 작년까지 여학교였던 곳.
올해 남학생은 나 혼자.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

어쨌거나 이런 경우에는 소문 자체를 부정하면 된다. 최초 유포자인 규원이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나중에 조져서(?) 사과를 받아내도록 해야겠군.
나는 일련의 처리 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혀를 움직이려고 했다.

“아, 그게 말야…….”

잠깐만.
입을 열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러면서 어제 있었던 심윤희와의 대면을 되새김질했다.

앞으로 말 걸지 말라던 심윤희의 태도가 얼마나 매몰찼던가.
그렇게 철벽을 세우고 있으면 앞으로의 계획을 진행할 수가없다. 그 철벽을 깨부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있다.
게다가 지금 보여주는, 자신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가 은근히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다.

넌  너무 얕봤어, 심윤희.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내가 집중력 말고도 자부하는 무기가 있는데, 바로 ‘끈질김’이다.

“고백한 거 맞다. 그런데 대답은 다음에 해주겠다고 하더라고.”

반 애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발언을 내뱉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좋은 계획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얘네들이 보이는 관심의 정도를 본다면 질문 공세에 시달릴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심윤희 역시 질문 공세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말을 듣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아예 모든 통로가 막혀 있는 것보다는낫다.

“진짜? 진짜로?”

도연이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때마침 HR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 벌써…….”

도연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영재야. 나중에 또 물어보러 올게.”

도연이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버텨내야 한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1교시 수업인 수학책을 꺼냈다.

문득 옆을 보니 윤희가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역시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수학책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이 정도면 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 *



피크 타임을 넘긴 급식실은 한산했다. 지금의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식판을 내려놓자마자 긴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애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집요했다.
고백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차인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더더욱 여자애들의 흥미를 자극한 것이다. 덕분에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 주위가 시장 바닥이 되었다.

‘어제 방과 후에 한 거냐.’

이렇게 사실관계를 따지는 질문에서부터,

‘사실 여기 오기 전부터 심윤희를 알았던 거냐.’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느냐.’
‘예뻐서 좋아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면 어디가 좋은 거냐.’
‘고백할  뭐라고 말했느냐.’

등등…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질문 공세가 몰아쳤다.
물론 애들이 윤희를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윤희의 대응 솜씨가상당했다. 들어오는 질문 공격마다 차분하면서도 아주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게다가 모든 배턴을 계속 나에게로 떠넘기기까지 했다.
나도  배턴을 넘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윤희는 거기서부터 완전히 철벽을 쳤다.
윤희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되자 애들의 발길이 자연히 내게로 향했다.

덕분에 내가 받게 되는 질문이 그만큼 더 늘어나고 만 것이다.
10시간을 내리 공부해도 이렇게까지 정신이 피로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힘없이 수저를 들었다.

“오! 우리 반의 로맨티스트.”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았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최초 유포자인 규원이였다.

“아니라고 부정하더니만, 결국 사실이었군?”
“그만하자. 나 진짜 지치거든.”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엄청 놀랐다니까. 나도 애들이 그 정도로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

하지만 규원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눈치라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왜 아침 댓바람부터 그런 소문을 퍼뜨려?”
“아침이니까!”

이렇게나 당당할 수가.

“이런 화제는 말야, 아침부터 얘기가 돌아야 재밌는 거라구. 신문이 괜히 새벽에 배달되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라고 순간 납득해버릴 뻔했다.

“아니, 아무튼 너 때문에…….”
“근데 거기서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할 줄은 나도 몰랐지이.”

입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졌다. 와전된 소문에 기름을 부은 것은 결국 나였으니까.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거지만 이렇게까지 고생할 줄 알았으면 그냥 하지 말 것을 그랬다.

더구나 그 목적마저도실패했고.
자승자박. 이보다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아침을 굶고 나왔는데도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규원이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힘내게나. 자네라면 할 수 있어. 너무 멸치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 뼈를 때리냐?

“그냥 가라. 진짜 힘드니까.”
“아무튼. 잘 되길 바라!”

진심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응원의 한 마디를 남긴 채 규원이가 급식실을 나갔다.
저 꼴을 보니 사과를 받아내기는 글렀구만.

“하아.”

한숨이  올라왔다.



* * * *

오늘자 정규 수업이 모두 종료되었다.
드디어 질문 공세로부터 해방이다!
하지만 기쁨의 세리머니를 할 여력이 없었다.

나는 가방을 챙길생각도 못한 채 파김치마냥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머릿속이 말 그대로 백지장이었다.
몇몇 애들이 나에게 잘되길 바란다는 식의 응원 메시지를 들려주고 갔다. 그러지 마…….
애들이  빠져나간 교실에는 나를 비롯하여 윤희와 도연이만 남아 있었다.
가방을 멘 도연이가 다가와서 내 안색을 살폈다.

“엄청 피곤해 보인다, 너…….”

조심스러운 어조.

“이렇게 주목받을 줄은…….”

나는 이제는 실성해서 헛웃음마저 나왔다.

“아무래도 남학생은 너 혼자다 보니까.”
“그러게…….”

힘없이 답하고 나서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어, 음. 힘내. 여러 가지 의미로.”
“고마워…….”

도연이의 응원은 그래도 진심이 담긴 것 같았다.
도연이가 교실을 나서자 남은 사람은 나와심윤희뿐.
나는 느릿한 동작으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인기남이  소감은 어때?”

청아한 음성이 놀림조를 띠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윤희가 눈썹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화가 났다거나 언짢았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힘들어.”

진솔한 감상을 내비쳤다.

“말 걸지 말라고 해서 그랬던 거지?”

이 정도면 거의 도사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수긍했다.

“너에게 스터디부가 그렇게 중요해? 왜?”
“지금은 대답하기 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납득하겠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윤희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어설퍼.”

나직하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말.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사람 마음을 움직일 줄은 모르는구나.”
“너는 알고 있어?”
“아니.”

윤희가 시원스레 인정했다.

“그래도 네가 아침에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만은 알아.”

내 시선이 절로 바닥으로내려갔다.
윤희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상황 자체는 내가 목표했던 게 맞다.
하지만 원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챗바퀴만 열심히 돌린 꼴이었다.

“그래도 예쁘다고 거는 듣기 좋았어.”

그러고 보니 예뻐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것도 있다고 답했지.
가방을 먼저 다 챙긴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무엇이  속을 뒤흔들었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윌리엄 브렌더.”
“그게 뭐냐니까?”
“글쎄?”

그것을 끝으로 윤희가 교실을 나섰다. 나는 방금 윤희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뭐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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