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화-브라질 나비의 날갯짓(1)
3월 2일.
입춘이 이미 지났지만 여전히 봄기운이 무르익지 않은 시기.
나는 상하의가 남색으로 된 교복을 걸치면서 정말로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마 대부분은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새로운 학교와 교실, 친구들을 기대하며 들뜨거나. 혹은 친구를 사귀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거기에서 비롯되는 약간의 두려움.
나는 안타깝게도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제일고등학교.
내가 원하지 않았던 학교.
기왕이면 새로운 출발인 만큼 좋은 마음을 가지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인생 참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구만.
“아들, 버스 타고 가.”
“아냐. 걸어가도 돼.”
나는 엄마가 내민 천원을 마다한 채 집을 나섰다. 그렇게 40분동안 찬바람과 맞서 싸우며 걸어간 끝에 입학식이 열리는 제일고등학교의 실내체육관에 도착했다.
체육관은 이미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내가 배정된 반은 2반.
[잠시 후 입학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줄에 서자 바로 앞에 연보랏빛 머리칼을 지닌 여학생이 서 있었다.
상당히 눈에 띄는 색깔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염색을 해도 상관없다는 교칙이 있었나?
그때 그 애가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그 애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햇볕이 비껴간 듯 잡티 하나 없는 고운 피부에 눈길을 사로잡는 미모 탓에 나는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
“아, 안녕?”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명찰을확인해 보니 ‘심윤희’라는 이름이었다.
심윤희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시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시작된, 뻔하고 지루한 입학식 행사.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단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음으로 1학년 수석대표 답사가 있겠습니다. 입학생 수석대표.]
나는 여기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윽고 사회자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영재.]
나는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어갔고, 그때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입학설명회에서 들었던 거랑 얘기가 좀, 다르지 않나?
하지만 단상까지 올라가야 하니 중간에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이크가 세워진 교탁에 펼쳐져 있는 답사장을 내려다보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사회자가 정숙을 요청해도먹혀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안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마이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린 다음 목소리를 뽑아냈다.
“반갑습니다. 저는 입학생 수석대표, 한영재입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입학생들은 전부 여학생.
오직 나만이, 이곳 제일고등학교의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 * * *
우리 동네에는 고등학교 세 곳이 있다.
한성 고등학교.
동진 고등학교.
마지막으로 내가 이번에 입학한 제일 고등학교이다.
한성 고등학교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사립학교이다. 학업성취고가 워낙에 좋아서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고이기도 하다.
면학 분위기가 잘 조성되어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한성대학교’의 부속 고등학교이기도 하여,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여기에 원서를 넣는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지.
동진 고등학교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처음으로 개교한 곳이다. 역사가 있는 만큼 동문의 파워가 세다고 들었다.
그 점을 제외하면 흔한 공립고교처럼 보이지만, 학생들 성적은한성고 못지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고등학교.
동진 고등학교만큼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참고로 원래는 제일 여자 고등학교였다고 한다. 한때는 동진 고등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지만,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올해 남녀 공학으로 전환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만 남학생인 걸까.
앞으로 3년 내내 여학생들에게 둘러쌓여 있어야 한다는 얘기잖아.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부러운 자식이라고.
진짜로 그러냐고? 천만의 말씀!
혼자 남자이기 때문에 눈치 볼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장장 40분을 걸어서 1학년 2반 교실에 도착했다.
“영재야. 안녕?”
우리 반의 반장인 정도연이 손을 흔들면서 발랄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깻죽지까지 내려오는 밤색 생머리를 지닌 여자애. 훤히 드러낸 이마가 약간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마 옅게 화장을 한 모양이었다.
아직은 서로 어색해서 인사도 안 하고 지내는 중인데.
더구나 나는 성별이 다르다 보니 어색함이 배가 된다.
도연이는 아마 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나에게도 신경을 쓰는 듯했다.
“응. 좋은 아침.”
이유야 어떻든 아침 인사를 받았으니 밝게 화답했다.
나는 맨 뒷줄에 있는 내 자리로 이동했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시간표를 먼저 확인했다.
1교시 수업은 국어였다.
나는 가방에 있는 책을 서랍에 옮겨 담고, 국어책을 펼쳤다. 어제 14쪽까지 진도가 나갔으니 다음 페이지부터 예습해둘 생각이었다.
이번 제일고등학교 입학식 직후 나는 교내에서 주목 받는 학생이 되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입학생 수석대표로 단상에 올랐던 것.
다른 하나는 학교 역사상 최초로 입학한 남학생이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담스러운 관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이 하루 이틀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키 165cm에 멸치마냥 삐쩍 마른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에 촌스런 금테 안경을 착용한 내 외모를 생각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학교 밖으로 나가면 나보다 나은 사람이 널리고 널렸기도 하고.
서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니, 외려 다행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다.
그만큼 공부에 더 집중할 여력이 생기니까.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피곤해지는 법이다.
까만 활자를 따라 읽던 눈길을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시선의 종착지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심윤희였다.
심윤희는 시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입학식 때부터 눈에 띈다고 생각했던 연보랏빛 머리칼.
전체적으로 웨이브가 들어가 있었고 끄트머리가 봉긋한 가슴 언저리에서 치렁거리고 있었다.
햇볕이 모조리 비껴간 것만 같은 희고 고운 피부.
나는 입학식 날 아주 잠깐 심윤희와 마주했던 순간을 상기했다.
지금은 시집의 페이지를 훑고 있는 저 눈동자는 분명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미모로만 따져본다면 우리 반에서 1등은 따 놓은 당상.
심윤희가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그 동작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내려갔다.
“뭐야?”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더니 심윤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딘가 날 선 느낌을 주는 시선이었다.
“계속 쳐다보니까 물어봤어.”
“아, 아…….”
잘못하면 이대로 오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오해를 받는 상황이겠지?
“지우개가, 어디로 갔더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그 눈을 회피했다.
“그런 소리 안 들렸는데.”
덤덤하면서도 어딘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어조.
어설픈 변명 따위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 됐어. 다음에 안 그러면 되니까.”
심윤희가 다시 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이런 애랑 내가 말을 섞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망상은망상일 뿐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수업종이 울리자 국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교탁에 소리가 나게 책을 내려놓았다.
책상에 엎드려 자던 애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재잘재잘 떠들던 애들은 부리나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오늘도 꽤나 춥구나. 너희는 괜찮니?”
선생님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아니요, 하는 목소리가 꼬리처럼 따라왔다.
“출석 부르고 시작할게.”
나는 필통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인 몬아미 볼펜을 꺼내 들었다.
자고로 전쟁터에 나가려면 무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무기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집중력. 내가 유일하게 자부하는 가장 강력한 특기.
“출석 이상 없네. 그럼 15쪽부터 보자.”
나는 청각과 시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 * * *
4교시를 지나서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간 직후 애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갔다. 번개와 같은 속도였다.
아침부터 공복이었던 내 위장도 공허한 울음을 내질렀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노트를 펼쳐서 필기한 내용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 자리 잡은 나만의 공부 습관.
공부를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복습이다.
배운 내용이 머릿속에 항상 남아있으면 그만큼 공부를 하기 쉬워진다.
특히 수업이 끝난 직후에 하면 머리에 더 빨리, 더 많이 남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한다.
“영재 너는 급식실 안 가?”
“응?”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도연이가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거 공책이야?”
도연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흥미를 드러냈다.
“맞아. 필기한 것 좀 살펴보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너 입학식 때 수석대표로 단상에 올라갔었지?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구나.”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지만 사실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칭찬은 누구든 춤추게 만드는 법이니까.
그때 출입문에서 누군가가 도연이를 불렀다.
“아, 이제야 나왔네. 영재야, 그럼 먼저 갈게.”
도연이가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출입문으로 향했다.
교실을 둘러보니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와 심윤희를 제외하고.
심윤희는 이어폰을 낀 채 시집을 읽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든 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
필기한 내용을 서너 번 반복해서 읽은 뒤 급식실로 향했다. 기다리는 줄이 없어서 곧바로 배식을 받을 수 있었다.
다들 밥을 빠르게 먹었는지 자리가 반 이상 비어있었다.
여자는 천천히, 그리고 조신하게 식사한다?
적어도 이 학교에 그런 학생은 없었다.
이틀 간 겪었으니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구석 진 자리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식판을 반쯤 비웠을 때 심윤희가 급식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남아있는 반찬이 거의 없을 텐데.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식판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도연이가 급식실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누군가를 찾는지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영재야!”
도연이가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 담임선생님이 널 찾아. 빨리 교무실로 가 봐.”
말을 마친 도연이가 호흡을 정리했다.
“갑자기? 무슨 일로?”
놀라서 되묻자 도연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때 스피커에서 짤막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1학년 2반 한영재 학생. 지금 즉시 교무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봐봐.”
도연이가 천장에 있는 스피커를 가리켰다.
“알았어. 빨리 갈게.”
식판을 정리하고 나서 교무실을 향해 뜀박질을 했다.
1학년 교무실은 2층 복도 끝에 위치해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방송으로까지 사람을 찾는 거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호출 받을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는데.
꼬리의 꼬리를 무는 의문을 뒤로 한 채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교무실에는 담임선생님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선생님이 손을 흔들며 만류했다.
“거기 있어 봐.”
선생님이 의자에서 아예 일어났다.
“선생님이 부르신 거 아녜요?”
“일단 그렇긴 한데, 널 찾는 사람은 따로 있어.”
선생님이 정장 재킷을 걸쳤다. 아예 교무실 밖으로 나가려는 모양새였다.
일개 학생을 호출할 만한 곳이 교무실 말고 또 있었던가.
이쯤 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선생님. 막, 이상한 데 가거나 하는 건… 아니죠?”
“넌 날 뭘로 보는 거냐?”
“아, 아뇨. 그냥…….”
“따라 와. 백문이 불여일견이랬잖아.”
선생님이 턱짓을 하고 나서 앞장을 섰고 우리는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자, 여기다.”
선생님이 어느 문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나는 문패를 확인해 보았다.
다름 아닌, 이사장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