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열심히 준비해 간 것이 무색하게도, 진급 시험은 쉬웠다. 내가 열심히 준비해 가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진짜 난이도가 쉬운 건지 구분이 가진 않았지만 막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뿌듯한 기분으로 부담 없이 문제를 전부 푼 다음 남은 몇 분간은 턱을 괴고 딴생각을 했다.
종이 치고, 나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동아리 교실로 달려갔다. 오늘은 동아리가 있는 날이고 노아 선배에게 받아 내야 할 게 엄청 많았기 때문이었다.
동아리 교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선배 교실이 2학년 교실보다 먼 곳에 있다 보니 조금 늦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그게 맞는 것 같다. 나도 노아 선배도 언젠가부터 동아리 시간보다 20분쯤 일찍 오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래서 플로라 선배와 글로리아 선배가 좀 천천히 와도 된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마음 편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으니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열린 문틈으로 노아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와 있었네.”
“네! 선배, 시험 잘 봤어요? 전 엄청 잘 봤는데. 너무 쉬웠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달려간 내가 가슴을 내밀고 으스대자 노아 선배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잘 봤을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절 믿어 주시는군요.”
내가 기쁜 얼굴로 말하자 선배가 뿌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가 가르쳐 줬으니까.”
“본인을 믿는 거였군요.”
나는 납득하듯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다 말고 선배의 입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 노골적인 시선에 노아 선배는 왜 자꾸 그렇게 보냐며 웃었다.
“아 맞다, 그 책! 안 가지고 왔는데!”
끝나면 키스해 준다며!
나는 내 손에 예언서가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아쉬워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노아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이게 웃기세요?”
“괜찮아, 케이트.”
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툴툴거리자 선배가 내 손에 깍지를 껴 오며 속삭였다.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와, 역시 수석…….”
딱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지.
내 감탄 어린 중얼거림은 노아 선배의 입술에 막혀 버렸다.
“……읏.”
처음에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질척한 느낌이 들었다.
선배는 조심스럽고 다정한 동작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등에 벽이 닿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아찔한 감각이 입 안을 휘젓고 지나갔다. 부끄럽고 숨도 가빠져서 조금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리호리한 외관은 다 함정이었다. 선배는 마법학부면서 골격이 탄탄했고 키도 컸고 힘도 센 편이었다. 그 덩치에 깔리다시피 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배의 손을 꼭 잡은 채 미약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노아 선배는 한참 후에서야 묘한 감각을 남긴 채 입술을 뗐다.
“좋았어?”
“……완전.”
나는 두 눈을 열성적으로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선배가 낮게 웃으며 내 눈두덩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 이어서 뺨, 눈가, 이마에 입술이 닿아 왔다.
간지러움에 키득거리며 선배의 목에 팔을 감는 순간, 교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재빨리 노아 선배에게서 몸을 뗀 나는 젖은 입술을 문지르며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 왔다. 너희 또 일찍 와 있었네.”
문을 열고 들어온 글로리아 선배가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와 노아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리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뭐야, 너희 뭐 했어.”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잔뜩 구긴 글로리아 선배의 뒤에서 플로라 선배가 쏙 튀어나왔다. 그녀는 노아 선배의 얼굴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노아. 언제부터 입술에 뭘 발랐어? 좀 번진 것 같은데…….”
아, 내가 바른 게 묻었나.
나는 내 입술을 더듬으며 노아 선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입가에 붉은색이 번져 있었다.
“……아, 아, 아, 나 뭔지 알 것 같아.”
글로리아 선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말하지 마, 아무도 말하지 마.”
“왜? 뭔데?”
플로라 선배가 자기도 알려 달라며 글로리아 선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글로리아 선배는 심란한 표정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얘들아, 교실에서는 자제하자고 했잖아.”
“……아.”
글로리아 선배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플로라 선배가 뭔가 알겠다는 듯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노아 선배는 나보다는 뻔뻔한 표정이었지만 역시 약간의 홍조를 띤 채였다.
“노아스 넌 입가 좀 닦고…….”
적잖은 정신적 타격을 받은 글로리아 선배를 위해 잠시 안정의 시간을 가진 다음 동아리를 시작했다.
“하하, 여전히 사이가 좋네.”
웃으며 상황을 넘긴 플로라 선배가 농담을 던졌다.
“자, 다들 유급한 사람 없지?”
“그럼요.”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거의 확신했다. 사실 이 교실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만큼 내가 올해 선배들과 같은 학년에서 공부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시험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야.”
글로리아 선배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요!”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시험을 통과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고개를 치켜 든 채 어깨를 쫙 펴고 있는 것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플로라 선배가 작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와, 우리 내년이면 졸업이야.”
“졸업 시험 통과했을 때 얘기지.”
노아 선배가 묵묵한 답을 내놓자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노아스 이제 공부해야 되는데, 케이트 너 어떡해. 얘 졸업하면 그때는 또 어떡하고.”
“아, 우울한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울상을 지은 채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글로리아 선배는 나와 노아 선배를 놀리기 위해 장난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나로서는 타격이 컸다. 갑자기 기분이 축 처졌다.
노아 선배의 졸업이 코앞이라니.
아직 학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졸업 걱정부터 하는 게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만 1년은 짧은 시간이다. 분명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있을 거다.
선배가 졸업하면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하지?
* * *
신입생 입학식은 4학년들의 졸업식 다음 날에 행해졌고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시간표도 다시 짜야 하고 교과서도 새로 준비해야 하는 바쁜 한 주를 보내고 나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아직 며칠 남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나는 좋은 성적으로 진급에 성공했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선배들까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진급에 실패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아르한마저 말이다.
“와, 너 용케 유급 안 했네! 대단하다, 자식.”
“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내가 생각보다 높은 점수가 적힌 아르한의 성적표를 보며 탄성을 내지르자 그가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2학년이네, 처음으로 진급한 기분이 어때?”
“뭐, 별 감흥 없는데. 딱히 달라진 것도 없고.
아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자, 나는 배신당한 기분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뭐? 내가 도와줬는데 고맙다는 생각 들지 않아?”
진급 시험이 처음일 너를 위해서 작년에 나온 문제 위주로 정리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떠먹여 줬는데!
나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 상처다.”
“누나, 고마운 건 맞는데 괜히 과장하지 마.”
아르한이 어쩐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티 나?”
“응.”
“어쨌든 진급을 축하한다. 이제부턴 좀 힘들 거야. 1학년 때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누나는 내가 무슨 낙제생인 것처럼……. 나 공부 그렇게 못하는 거 아니거든.”
내가 제 어깨를 두드리며 한쪽 눈을 찡긋하자, 아르한은 피식 웃다가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창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 누나 남자 친구 아니야?”
“어, 그러네. 나 가 볼게.”
교실 창문 밖에 나는 아르한에게 손을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배, 가세요?”
“응, 안녕. 공부 열심히 해.”
내가 교실 문을 향해 걸어가자 지난 학기에 내가 매점에서 과자를 대신 계산해 줬던 아르한의 같은 반 친구가 내게 인사를 했다. 첫인상은 좀 무서웠는데 아르한네 몇 번 드나들면서 친해져 보니 착한 애였다. 아르한과 같은 검술부랬는데, 얘도 진급에 성공했다길래 축하해 줬다.
“선배, 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시고.”
“네 교실에 없으면 항상 여기 있으니까…….”
노아 선배가 어리광을 부리듯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에구, 서운했어요? 아르한이 진급 시험 통과했다길래 자랑 받아 주고 온 거예요. 꼭 걔만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요.”
나는 선배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알아. 축하한다고 전해 줘.”
내 예상과는 달리 노아 선배는 딱히 아르한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나를 못 봐서 서운한 건가. 아, 얼마 전부터 나만 너무 과민 반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졸업반은 어때요? 막 어려운 거 배워요?”
“뭐, 딱히.”
달라진 건 없다며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요? 3학년 됐다고 갑자기 모든 게 확 어려워져서 저는 죽을 것 같은데.”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노아 선배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그 순간 종이 울렸다.
“아아.”
“이런, 얼른 가 봐.”
노아 선배가 절망 어린 신음을 흘리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도 엄청 좋아해.”
나는 선배의 등을 마주 끌어안고 생글생글 웃었다.
“나도요.”
선배 덕분에 다음 수업에 들어갈 힘이 났다.
확실히 아르한의 말대로 학년이 바뀌었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졸업을 가까이 두고 있어서인가, 3학년의 시간은 유독 빠르게 흘렀다. 두 학기와 두 방학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생각해 보면 2학년의 시간도 1학년의 시간보다 좀 빠르게 흘렀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방학이 정신없이 몰아치고 나자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다. 안다, 나도 믿을 수가 없다. 그 모든 사건들이 전부 작년 일이라니 말이다.
물론 이번 해라고 크고 작은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작년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지난 두 학기가 워낙 별일 없이 평탄해서.
그렇다고 해서 지루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1년 동안 노아 선배와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엄청 행복했다.
쏜살같은 시간 끝에, 어느새 나는 4학년으로의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노아 선배와 나, 우린 아직도 연인이었다.
“흐으으.”
한참 동안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펜을 내려놓으며 찌뿌둥한 팔을 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둘이 동아리 교실에서 진급 시험을 준비했는데.
올해가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배는 이제 진급 시험이 아니라 졸업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졸업 시험은 아카데미에서 배운 모든 내용이 들어가는 만큼 워낙 범위가 넓고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요즘 노아 선배를 보기가 부쩍 어려워졌다. 그나마 이렇게 같이 공부할 때나 얼굴을 좀 볼 수 있는 거지.
나는 눈알을 도륵 굴려 옆자리에 앉아 공부에 열중하는 노아 선배를 바라보았다.
1년 사이에 많이 길어진 은색 머리카락이 선배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나만 남겨 두고 졸업하지 말아요, 선배.
이건 언뜻 보면 애절하고 로맨틱한 말이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원한 서린 저주나 다름없는 소리다.
“졸업하기 싫다.”
노아 선배가 대뜸 엄청난 소리를 하길래, 나는 혹시 내가 졸업하지 말란 말을 입 밖으로 냈는지 의심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미치셨……. 아무리 그래도 졸업 직전에 꿇는 건 좀 그렇죠. 4년을 땅바닥에 내버릴 생각이에요? 그럼 다시는 선배 얼굴 안 볼 거예요, 알겠어요?”
헛소리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내 독한 한마디에 노아 선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만약 내가 시험 통과 못 하면 계속 다니는 건데.”
“뭐,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같은 학년인 거네요. 안 그래, 노아?”
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선배가 작게 숨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내 이름이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날렸다.
“뭘 새삼스럽게. 선배는 이름도 얼굴도 다 예뻐요.”
“한 번만 더 불러 주면 안 돼?”
“싫어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선배가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별빛 같은 금색 눈동자가 창밖의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비에 젖은 고양이 눈빛. 선배의 그 어느 마법보다도 파괴적이고 효과가 강하다. 적어도 나한테는.
“……안 돼?”
“이익.”
나는 아마 조금 붉어졌을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노아 선배는 1년 사이 내가 무척 뻔뻔하고 능글맞아졌다며 놀라곤 하는데, 내 생각에는 본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노, 아.”
어쩐지 창피해진 기분이 된 내가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한 번 더.”
“노아! 됐죠? 이제 공부나 하세요!”
나는 선배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나에게 맞는 그 순간까지도 선배는 좋다고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공부해요, 공부.”
내 구박을 들은 선배가 아쉬운 표정으로 어영부영 펜을 집어 들고 책을 펼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