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한테는 말해 두고 싶었다. 예언서의 내용은 다름 아닌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이게 아무리 가문의 비밀 비슷한 거라지만 우린 나중에 결혼할 거니까!
나는 노아 선배의 반응을 기대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선배의 두 눈이 아주 약간 커져 있었다. 표정 변화가 없는 노아 선배로서는 드문 일이다.
선배는 더 캐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듯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 조금 자세하게 말해 줄래.”
암요. 선배도 사랑하는 연인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챙겨 온 책들 사이에서 예언서를 꺼냈다.
“이게 그 예언서예요.”
“……겉으로는 평범한 책처럼 보이는데.”
“그야 저한테만 보이니까요.”
신기한 듯 붉은색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던 노아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예언서와 예언자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잖아.”
“저도 지금까지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나는 헛기침을 하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방학에 찾아뵌 우리 할머니가 해 주신 말씀인데요, 사실 예언의 힘은 피를 타고 내려온대요. 그리고 예언자들은 그냥 홀연히 사라진 게 아니라 구교와 신교의 싸움에서 신교 세력에게 몰살당한 거래요.”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자 선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사 왜곡이네.”
“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요. 그리고 신전이 그렇게 무구한 단체도 아니잖아요.”
여신을 상징으로 내세우며 평화의 수호자 행세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사를 잘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전쟁들 중에는 신전과 얽힌 것이 많았다.
원래도 그렇게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내 조상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신전에게 묘한 반감까지 생겼다.
“예언자들은 모두 죽었지만 딱 한 명이 살아서 시골 영지로 도망쳐 왔는데, 그게 제 외가 쪽 조상이래요.”
“……그렇구나. 플로라가 알면 정말 신기해하겠다.”
“그렇죠? 플로라 선배는 신학을 공부하니까……. 아니, 이게 아니라요.”
나는 헛기침을 하며 예언서 표지를 한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여튼 이 예언서를 언뜻 봤을 때 소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배경이 아카데미고 등장인물들은 다 여기 학생들인 거예요.”
“나도 있어?”
“그럼요.”
노아 선배는 자신이 예언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용을 알면 더 놀랄 텐데.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소설로 치면 이 예언서에서 글로리아 선배는 악역이에요. 그것도 엄청 극악무도하고 성격 나쁜.”
“응, 걔는…… 왠지 그럴 것 같아.”
“으하하하.”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친구를 까는 소리를 하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실컷 키득거리며 선배의 어깨를 쳤다.
“너무하시네요. 박하다 박해. 글로리아 선배가 들으면 슬퍼하겠는데요.”
“그다지…….”
“푸흡.”
나는 입술을 깨물어가며 웃음을 참았다.
“근데 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한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책을 펼쳐 보였다. 어차피 선배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이거 소설로 치면 장르가 로맨스거든요. 선배랑 플로라 선배가 주인공이에요. 선배도 여기서는 성격이 원래보다 좀…….”
“…….”
“믿겨져요? 선배랑 플로라 선배가 고백하고 키스하고 별짓 다 하는 걸 읽었다고요, 제가.”
선배의 표정이 한순간에 해괴하게 변했다. 분홍색 입술이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웃겨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글로리아 선배는 선배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플로라 선배를 질투하고 괴롭히는 악역이에요.”
“……끔찍해.”
하얗게 질렸던 선배의 얼굴이 거의 파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메스꺼운 듯 입가를 손으로 막은 선배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럼 케이트 너는?”
“저도 글로리아 선배 같은 악역이에요. 선배 좋아해서 플로라 선배 괴롭히다 퇴학당하는. 근데 글로리아 선배보다는 분량도 없고 취급도 하찮아요.”
노아 선배가 멈칫하며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나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퇴학시키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게 선배예요. 선배가 나 다그치는 장면 읽고 울 뻔했잖아요.”
“……미안.”
“에이, 선배가 왜 사과하세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라며 내가 두 손을 휘젓자,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며 노아 선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선배가 내 반응을 의식하며 다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나는 맹세코, 플로라에게 그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어.”
“알아요, 알아요. 아주 잘 알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선배와 눈을 맞추었다.
“몰라요, 할머니 말씀으론 원래 운명이란 그런 거라네요.”
글로리아 선배의 뜻대로 자잘한 이야기들은 쏙 빼놓고 그럴듯한 말을 했다. 하고 보니 진짜로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어찌 됐든 예언서는 옛날부터 닥쳐 올 재앙을 막는 용도로 쓰였으니까.
“예언서가 저에게 온 것조차도 운명이라면, 음, 아마 선배랑 제가 연인이 되길 바랐던 거 아닐까요, 운명도?”
사실 운명이 비틀린 것은 글로리아 선배 덕이 큰 것 같지만, 내 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그 책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걸.
“아, 알겠다. 제가 지지난 학기에 선배한테 고백해서가 아닐까요?”
만약 내가 예언서를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사실 운명이고 자시고 지금 노아 선배 옆에 있는 건 나다. 나도 선배를 좋아하고 선배도 나를 좋아한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 효력 없는 활자들의 나열에 신경 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거다.
굳이 예언서를 불태우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뭐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말이다.
“아, 맞다.”
선배의 얼굴을 보며 생글생글 웃다 말고 펼쳐 든 책을 흘끔 내려다본 내가 입을 열었다.
“음, 혀를 얽으며 키스해 주세요.”
선배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익었다.
“그, 그런 묘사까지 있어?”
“네에, 이거 은근 야하거든요. 선배 상대가 제가 아니라 플로라 선배라는 게 좀 그렇지만요.”
“난 플로라에게는 절대…….”
“알아요, 알아요.”
나는 다시 펼쳐 든 예언서로 시선을 내리곤 마저 낭독했다.
“그리고 입술을 혀로 쓸면서…….”
“그만.”
선배가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이, 이런 거 하려고 간직해 둔 거야?”
“음,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책을 소중히 끌어안으며 수줍게 웃었다.
“나중에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그 애도 자기가 어떤 혈통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이걸 보여 주면서 말해 줄 거예요.
속으로 내가 너무 앞서간 건가 하는 걱정이 되어 노아 선배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우선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선배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구나……. 나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
“전 당연히 선배랑 결혼까지 생각하죠.”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쯤은 상관없죠. 어차피 나중에는 더한 것도 할 텐데요.”
“…….”
“왜요, 내 말이 틀려요?”
나는 할 말을 잃은 노아 선배에게 두 눈을 부라리며 전투적으로 내 입술을 들이댔다.
망설이던 선배가 다가와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입술에 보드라운 것이 닿아 왔고, 나는 그 다음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선배가 잠잠했다.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입술에 얌전하게 닿아 있는 온기만이 유일한 접촉이었다. 그것마저도 선배가 곧 입술을 떼면서 사라져 버렸지만.
내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기도 전에, 노아 선배가 쌓여 있는 책들 중 하나를 폈다.
“……이제 공부하자.”
“아아아, 왜요!”
이러다가는 오늘 하루 종일 공부는 시작도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지.
내가 입술을 샐쭉 내민 채 온몸을 비틀며 징징거리자 노아 선배가 내 어깨를 다독였다.
“……진급 시험 끝나면 해 줄게.”
“아니, 이건 진짜…….”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 가득 억울하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선배는 한 손으로 내 뺨을 쓸며 달래듯 말했다.
“유급하면 안 되잖아. 도와줄 테니까 책 펴 보자.”
“아하.”
나는 납득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공부 좀 안 했다고 제가 유급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유급할 것 같아서 그래.”
“……거짓말.”
선배가 공부 하루 안 한다고 유급을 할 리가 없잖은가. 노아 선배라면 일주일 전부터 공부해도 무리 없이 통과할 텐데.
“그래요, 뭐,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나는 고개를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 손에 펜을 쥐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책에 펜만 사각거리자, 내 눈치를 보던 노아 선배가 조심스레 물었다.
“삐졌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에? 아뇨.”
“공부……하는 거야?”
“아뇨. 시험 끝나고 선배한테 시킬 거 밑줄 쳐 놓고 있어요. 분명 해 준다고 했죠? 지금 한 세 페이지쯤 친 것 같으니까 각오하세요.”
“……공부나 해.”
내 발랄한 대답에 선배는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