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나는 펜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얘들아, 진급 시험 자신 있어?”
“…….”
“알았어, 말 안 할게.”
세 개의 시선, 도합 여섯 개의 눈알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길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거, 한마디 했기로서니 너무 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에코가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넌 입 다물어, 지난 시험 1등.”
“아하하.”
나는 맑게 웃으며 펜을 슥슥 놀렸다. 여기저기서 재수 없다는 평이 날아왔다.
진급 시험이 3주 남았다. 봄 방학이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것도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기 위한 진급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진급 시험을 이번에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진급 시험에 떨어지면 꼼짝없이 유급을 해야 했으므로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참고로 유급은 본인에게도 가문에게도, 통상적인 시선으로도 굉장히 창피한 일이었다. 유급을 하게 되면 여기저기서 ‘너 1년 동안 뭐 했니?’ 하는 한심함을 동반한 질문을 받기 일쑤다. 그러니까 다들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지.
다만 진급 시험은 전부 1년 동안 배웠던 것들 중에서 나오기 때문에 올해 성적이 제법 괜찮은 나는 상대적으로 덜 긴장할 수 있었다.
“실실 웃을 여유 있으면 나 좀 도와줘.”
도라가 내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미안, 나 슬슬 누구 보러 가기로 해서.”
나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도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어디 가. 너도 여기서 같이 고통받아!”
“저게 자기 혼자 놀러 가려고!”
나를 붙드는 손길들을 겨우 떨쳐 내고 도서관을 나섰다.
“선배, 여기예요!”
“오, 케이트.”
나를 본 글로리아 선배가 복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공부 열심히 했어?”
“네, 겨우 빠져나왔어요.”
나는 어깨를 주무르며 책들을 고쳐 들었다.
들고 있는 공책들 사이에 끼어 있는 붉은 표지의 책이 보였다. 방을 나오면서 무심코 같이 챙겨 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조금 무겁더라니.
할머니 말대로 효력이 지나서인지 책은 그새 부쩍 낡아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구석도 있고 구겨진 페이지도 있었다.
“선배, 선배.”
“응?”
나는 글로리아 선배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겨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거요, 그거. 노아 선배랑 플로라 선배한테 말할 거예요?”
목적어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글로리아 선배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내 질문을 받은 선배가 고민하는 듯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엥? 정말요?”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들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걔들이 아는 글로리아는 나 하나니까.”
글로리아 선배는 세상 태평한 몸짓으로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백금색 단발머리와 교복 치맛자락이 허공에 붕 뜬 채로 원을 그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원래 글로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밖에 모르잖아. 엄밀히 말하면 너한테도 ‘글로리아 루피너스’는 나일 테니까. 그냥, 그 책이랑 다른 글로리아일 뿐이지. 결국 나만 생각 안 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야.”
내 손에 들린 책을 한 손으로 가리킨 선배가 으스대듯 어깨를 씰룩거렸다.
선배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 그게 무슨 소린가 한참을 생각하던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예 잊어버리시려는 거예요?”
“아니, 잊지는 않을 거야.”
글로리아 선배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잊으려고 하면 결국 그것도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
“…….”
“그냥 이렇게 지내다 가끔 생각나면 너한테 이야기할게. 그럼 들어 줘.”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선배가 내 쪽을 보고선 발랄하게 윙크했다.
“내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세상에 너밖에 없으니까, 알겠지?”
계속 선배와 걷다 보니 동아리 교실에 도착했다.
여긴 선배의 비밀을 처음으로 알았던 곳이다.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책상과 의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괜히 책임감이 느껴지네요. 부담스러워요.”
“부담을 좀 가지라고 한 말이야.”
장난스레 대답한 글로리아 선배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곤 물었다.
“매점 가는 거지? 뭐 사 줄까?”
“네? 아니요. 진급 시험 팁 알려 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내가 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선배는 기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뭐. 난 또……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줄 알았는데 또 이용당했네. 방금 내 말 들어 준 것도 다 이거 때문이지?”
나는 그녀의 상처받은 표정을 무시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얼른 노트 보여 주세요.”
“……그래.”
“으으, 추워.”
글로리아 선배가 코를 훌쩍이며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다.
아카데미 건물 뒤 공터에 도착한 나는 자리를 잡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선배가 옷깃을 여미며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추워. 그 책 불태우는데 나는 왜 불렀어?”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이 예언서를 불태우기로 한 날이었다. 이제 이 예언서의 효력이 사라진 거라면 아예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얼마 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그렇게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니 치워 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른 아침이라 졸린 기색이 역력한 선배가 하품을 했다. 나는 한 손에 예언서를 들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이걸 혼자 하기는 좀…….”
“왜, 무서워?”
“딱히 이 책이 무서운 건 아닌데 학교에서 불장난하는 건 무서워요.”
들키면 벌점이잖아요.
내가 한 손에 책을 든 채 진지하게 대답하자 글로리아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겨울이라 큰불로 번질 수도 있고요.”
그에 짧게 변명한 나는 잔뜩 긴장해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화염 마법진을 그렸다.
마력을 담은 익숙한 문양이 허공에서 녹색으로 빛났다.
그걸 잠자코 바라보던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예언서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생각해 보면 이걸 이렇게 버릴 필요가 있을까?
이 책이 노아 선배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싫었다. 지금 나와 노아 선배는 사귀는 사이이고 평탄한 연애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언서의 기한은 이미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
나는 마법으로 만든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도 이 예언서가 엄청 신경 쓰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예언서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책으로 보였다.
게다가 이거…… 간직해야 하는 중요한 유물 아니야? 신전에서도 관리를 개판으로 할지언정 간직은 하더만.
맙소사, 내가 이렇게 생각이 없었다니.
갑자기 싸한 기분을 느낀 나는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 이거 안 태울래요.”
“엥, 진짜?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진 선배는 황급히 겉옷을 벗어 내가 피운 불을 껐다.
“야, 학교에서 불 피우는 게 그렇게 잘못……이기는 하지만 큰 잘못은 아니야. 실수로 피웠다고 하면 되지. 내가 얼른 꺼 줄게.”
글로리아 선배는 내가 뒷일이 겁나서 그랬다고 생각했는지, 설득하며 손에서 푸른빛을 내보였다.
“나 1학년 때 시험 끝나고 여기서 교과서 불태우는 사람들도 본 적 있어.”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나는 신발로 남은 불씨를 밟아 없애 버린 다음 비장하게 두 눈을 빛내며 손에 든 예언서를 흔들어 보였다.
“이걸로 할 게 좀 있어요.”
그럼 이 추운 아침에 나는 왜 불렀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글로리아 선배는 애써 무시했다.
* * *
“선배는 이거 먹을 거죠?”
나는 노아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박하사탕과 맛없어서 인기가 없는 과자를 골라 담았다.
선배는 두 손 가득 내가 고른 과자들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는 잘 돼 가?”
“음, 올해 성적이 전반적으로 좋아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기억이 잘 안 나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던 내가 노아 선배를 향해 생글생글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부터 선배가 도와줄 거니까! 부동의 수석, 믿어요.”
“기대에 부응해 볼게.”
선배에게 마주 미소 지으며 나는 품 가득 골라 담은 과자를 들고 말했다.
“근데 우리 이러니까 장 보는 부부 같아요.”
그러자 노아 선배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여보.”
“우와악! 뭐야! 뭐야!”
이번에도 얼굴 빨개지면서 엄청 당황해할 줄 알았는데? 원래 저런 말은 내 담당 아니었나?
내 고함에 매점 직원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나는 얼굴 가득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다시피 했다.
“누, 누, 누가 이런 거 알려 줬어요! 방학 동안 뭘 한 거야!”
“좋은가 보네.”
“네! 엄청 좋아요!”
씩씩하게 대답한 나는 잔뜩 흥분한 채 계산을 마친 후 매점을 나섰다.
“와, 여보래. 여보.”
동아리 교실로 향하는 길에 내가 계속 중얼거리자 노아 선배는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좀 많이 사 버렸네요.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동아리 교실에 도착한 내가 제법 많이 쌓인 간식들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서관에서는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했기에 부장인 플로라 선배에게 동아리 교실에서 공부해도 되냐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남으면 가져가. 난 이것만 먹을게.”
간식 더미 속에서 맛없는 과자와 박하사탕만을 가져간 선배가 말했다. 그에 비하면 내 몫의 간식들은 굉장히 많아 보였다. 아니, 많았다.
나는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달콤한 쿠키를 우적우적 씹으며 내 옆에 앉은 노아 선배를 힐끗 바라보았다.
선배는 과자를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눈에 띄는 연한 분홍색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걸 한입 달라는 신호로 오해했는지 노아 선배가 내게 한입 베어 문 과자를 내밀었다.
“먹을래?”
“우아, 선배가 먹던 거.”
나는 기분 좋게 한입 가득 과자를 베어 물었다. 선배의 취향대로 단맛이 하나도 없어서 맛은 영 별로였다.
내가 베어 문 모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선배가 입을 열었다.
“너 요정이야?”
“네?”
“……엄청 작아.”
노아 선배는 먹기 아깝다는 듯 내 입 모양이 난 과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놀리시나요. 가뜩이나 입 작아서 뭐 먹을 때 크게 벌리지도 못하는데.”
내가 투덜거리자 선배는 단아하게 웃으며 과자를 마저 먹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어. 귀여운 걸 어떡해.”
“흐음.”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는데, 노아 선배의 입술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묻었어요.”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헉.”
와, 선배 남자 아닌가? 관리하나 봐.
과자 부스러기는 이미 다 닦았는데도 입술의 촉감이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쓸어 보게 되었다.
내 손가락이 입술을 쓸자 그 움직임에 맞춰 선배가 작게 몸을 떨었다.
눈살을 작게 찌푸리며 움찔 떠는 것을 보니 간지러운 모양이다. 그런데 그 표정이 음, 조금…….
나도 몰래 침이 꿀꺽 넘어갔다. 콧김까지 나올 것 같아 호흡을 안정시켰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순수한 표정의 노아 선배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도 묻어 있어? 손수건은 뒷주머니에 있어.”
“아, 아. 그래요?”
나는 지레 찔려서 더듬거리며 선배의 입술을 쓸던 손을 내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선배가 몸을 일으키곤 뒤로 돌아섰다.
“손에 부스러기가 묻어서 그런데 좀 꺼내 줄래?”
“네, 네?”
교복 바지는 엉덩이 부분에 주머니가 있었다.
지금 나보고 선배 엉덩이를 더듬으라고? 아, 아니,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라고?
두 손을 가냘프게 떨던 나는 결국 엉덩이…… 아니,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손수건이 없었다. 아, 아니, 이럴 리가. 당황한 나는 선배의 엉덩이를 더듬…… 아니,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도 손수건은 나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 가득 물음표가 찰 무렵, 선배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며 돌아섰다.
“아, 뒷주머니가 아니었나 봐.”
“아, 아, 그래요?”
언뜻 고개를 들어 보니 금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조금 가늘어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이랬구나. 자기 엉덩이 만지게 하려고.
“이제 알았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향해 선배가 두 눈을 접으며 산뜻하게 웃었다.
언뜻 맑아 보이기까지 하는 그 웃음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내가 꽥 소리를 내지르며 두 손을 뒤로 뺐다.
“변, 변태! 사람이 이, 이렇게 정숙하지 못해서야…….”
“그렇게 따지면 너도 똑같은데.”
예전부터 내 엉덩이를 계속 보는 것 같길래.
선배는 천진무구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내…….”
“와악!”
그만, 그만!
나는 다시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그런 내 꼴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아 선배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지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은 내가 입을 열었다.
“……선배, 솔직히 말해 봐요. 방학 동안 뭐 했어요?”
“별거 안 했어.”
그렇게 말하는 노아 선배는 말갛게 웃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선배를 노려보았다.
거짓말쟁이. 어쨌든 오늘은 내 패배다.
“여우 같은 곰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여우였네.”
작게 툴툴거린 내가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이제 공부할까?”
선배는 웃는 얼굴로 책들을 꺼냈다. 네에, 하고 대답하며 공책을 펼치던 내가 일순 동작을 멈추었다.
아, 잠깐만. 오늘의 목적은 이게 아닌데.
“그, 있잖아요.”
나는 진지한 표정을 띤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 나를 놀리던 노아 선배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선배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응?”
“이거 우리 가문의 비밀이거든요? 이거 들으면 정말 결혼해야 해요. 못 물러요.”
살림 합치고 가정을 꾸려야 해요.
내가 덧붙이자 선배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믿겠다고 하면 말할게요.”
“난 네 말이면 다 믿어.”
“음, 좋은 대답이에요.”
나는 괜히 근처에 누가 없는지 두리번거리고선 노아 선배의 귀에 속삭였다.
“사실 저한테 예언서가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