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10)

* * *

마차는 꼬박 하루를 달려 아카데미에 도착했고,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헛구역질을 해 댔다.

이쯤 되면 적응할 법도 한데 계속 이러네.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앞으로 몇 번은 더 이렇게 오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건가.

“우욱……!”

나는 끔찍함에 몸서리치며 입가를 막았다.

“괜찮아?”

마차에서 짐을 내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나는 그에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몰려오는 매스꺼움에 헛구역질을 했다.

“으윽.”

헛구역질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마차를 짚고 겨우 서 있는데 누군가가 달려들어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케이트!”

익숙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꽃잎처럼 살랑였다.

아, 플로라 선배구나.

예상대로 하늘색 눈을 반짝이며 내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여학생은 플로라 선배가 맞았다.

“케헥.”

반갑고 친근하고 다 좋은데, 숨이 조금 막혔다.

선배, 선배, 살려 주세요. 항복할게요.

내가 켁켁거리며 항복하듯 내 목을 휘감은 선배의 팔을 두드리자, 그녀가 아차 하는 얼굴로 팔을 풀었다.

“아, 이런. 미안해. 숨 막혔어?”

“네, 조금…….”

플로라 선배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겉은 꼭 한 떨기 꽃처럼 가련하게 생겼는데, 선배 힘 되게 세네……. 신성력 덕분인가.

“어어, 플로라네.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마차에서 짐을 다 챙긴 글로리아 선배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플로라 선배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마주 인사하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입을 작게 벌렸다.

“어, 리아! 머리 잘랐네?”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백금발을 본 플로라 선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사실 신학교 들어가서도 머리 잘랐었어. 이 정도 길이는 아니었지만.”

“그래? 잘 어울린다. 그런데 갑자기 왜 또 자른 거야? 엄청 길었었잖아. 무슨 일 있었어?”

“음, 일이 있긴 했지.”

글로리아 선배가 개구지게 웃으며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케이트네 기사랑 대련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지 뭐야. 이왕 다듬을 거면 시원하게 확 자르는 게 좋을 것 같았어.”

“아하하, 뭐야 그게. 정말 너답다.”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깔깔 웃던 플로라 선배가 덧붙였다.

“나는 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줄 알았지.”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슬쩍 바라보며 웃었다.

“뭐, 심경의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플로라 선배에게 물었다.

“어, 그런데 혹시 노아 선배 어디 있는지 아세요?”

“응? 이번에는 같이 오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네……. 유리엘 후작가 마차가 있는 걸 보면 도착은 한 것 같은데.”

플로라 선배가 마차들이 모여 있는 정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남자 기숙사로 가 보지 그래? 노아 성격대로라면 아마 짐 정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

“아,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전 노아 선배 보고 올게요.”

나는 플로라 선배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꽤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여기 왜 여자애가 있지?’ 하는 시선을 몇 번 받은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눈에 뵈지도 않았다.

“205호실, 205호실.”

언젠가 와 봤던 노아 선배의 방 호수를 되뇌며 계단을 올랐다.

205호에 도착하자 짐을 옮기느라 열려 있는 문 사이로 긴 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곧장 노아 선배에게 뛰어들었다.

“선배!!”

침대 옆에서 가방을 정리하던 선배는 내가 제 목에 매달리자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후후, 귀여워라.

“진짜 오랜만이다……. 엄청 보고 싶었어요.”

나는 익숙한 재스민 향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선배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노아 선배는 이상하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가 근처에 선배의 룸메이트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굳었다.

“……미안.”

“……난 나갈게.”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룸메이트분은 어색한 동작으로 방을 나섰다.

……죽고 싶었다. 아, 선배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내 눈에 선배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였던 거구나.

“……크흡.”

이상한 소리가 나서 위를 올려다보는데, 노아 선배가 입가를 가리고 웃고 있었다.

나는 불퉁한 표정으로 선배를 째렸다.

“어쭈, 웃겨요?”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노아 선배가 내 볼을 쓸어내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묻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한 소리를. 선배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당연히 나도 엄청 보고 싶었지.”

선배가 고개를 저으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금색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새삼스럽지만 진짜 예쁘다. 방학 동안 여러 번 통신하지 않았다면 또 적응 못 했을 거다.

“와, 선배는 여전히 예뻐요!”

나는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선배의 뺨을 잡고 얼굴을 내 코앞으로 끌어왔다. 그대로 웃으며 입을 맞추자 촉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킥킥 웃으며 감았던 눈을 뜨자 사랑스러워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선배가 보였다. 눈빛이 너무…… 뭐랄까, 어쨌든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게 괜히 부끄러워져 시계를 보았다가 소스라치며 입을 딱 벌렸다.

“어, 큰일 났다. 벌써 11시예요?”

“응, 그러네. 짐은 다 옮겼어?”

“아직요. 이제 챙겨야 해요.”

도착하자마자 선배 보려고 여기로 뛰어왔거든요.

내가 머쓱하게 대답하자 선배가 다정하게 물었다.

“도와줄까?”

“그럼 감사하죠!”

나는 신발을 고쳐 신으며 복도로 나갔다. 노아 선배도 나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룸메이트분은 어떡해요? 얼굴 보기 껄끄러워지는 거 아니에요?”

“괜찮을 거야.”

내 질문에 선배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렇긴 해요, 그 선배도 연애는 하겠죠.”

나도 도라도 서로의 장황한 짝사랑 서사를 다 알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애초에 룸메이트에게 연애하는 걸 티 내지 않기는 어려운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선배의 도움을 받아 기숙사까지 짐을 옮겼다.

방에 가 보니 도라가 먼저 와서 짐을 정리하고 있길래 먼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안녕 도라.”

내가 옷가방을 들고 방에 들어서며 인사하자 도라가 고개를 들어 나와 노아 선배에게 인사했다.

“어,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님.”

노아 선배가 내 짐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어, 조금 있으면 교복 입고 모여야 할 시간이에요.”

“나 쫓아내는 거야?”

“아아니요, 그럴 리가!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갈아입으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노아 선배와 사귀면서 도라는 주변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기술을 얻었다.

방구석에서 옷을 착착 개는 도라에게 약간의 미안함이 들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럼 난 갈게. 이따가 보자.”

노아 선배가 내 손을 꼭 잡고 제 입가로 가져갔다. 손등에 부드러운 촉감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러워 피식 웃자 선배도 같이 웃었다.

“조심히 가세요, 이따 봐요!”

선배를 배웅하고 돌아온 방 안에서는 도라가 해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암, 배불러. 너희는 도서관에 바로 간댔지?”

“응, 먼저 방에 가 있어.”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식당 문을 여니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옮기는데, 기숙사로 향하는 학생들 틈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는 반가움에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부르다가 멈칫하며 손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불러 버린 후였다.

“어, 누나 안녕.”

“어, 어, 안녕…….”

고개를 돌리며 여상히 웃어 보이는 그 얼굴이 지난 학기의 고백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엄청 오랜만이다. 이번 방학에는 못 봤네.”

“응, 눈이 엄청 많이 오더라.”

“그렇지. 눈 많이 왔지.”

아르한의 대답을 끝으로 조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고백받고 찬 사이라지만 한 달 못 봤다고 이렇게까지 서먹해질 일이냐고.

“야, 너 내가 편지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어물쩍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르한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기 이렇게 또 구질구질하게 말을 꺼내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르한은 기숙사로 향하고 있던 걸음을 멈추었다.

“……편지?”

아르한이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물어보기로 한 나는 기둥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나한테 편지 보냈어?”

“응, 방학 2주쯤 남기고서였나……. 눈 쌓여서 너희 저택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바른대로 줄줄이 대답하던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아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너 내 편지 못 받았어?”

“나 이번 방학에 아무 데도 안 가고 검만 휘둘렀어.”

“엥, 네가?”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한은 백작가 영식인 만큼 방학마다 여러 사교 행사에 많이 자주 불려 다니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많이 다녀왔으려니 했는데.

“응, 그래서 나한테 온 초대장 같은 건 전부 태우라고 했었는데, 새로 고용한 시종이 누나 편지까지 태워 버렸나 봐.”

아르한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다 내가 누나 편지는 다 본다는 거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아, 하하, 아, 그런 거였어?”

나는 민망함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르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야, 너 엄청 열심이잖아! 소드 마스터 되게?”

“알잖아, 검으로 엄마 못 이기면 나 가주직도 못 물려받는다는 거.”

“아아, 하지만 너 졸업도 아직 한참 남았잖아.”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는 내 질문에 아르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여유 부리다가는 평생 백작 영식으로 남을걸.”

“으음, 하긴. 백작님은 엄청 강하시니까.”

변경백 가문인 히리스 백작가는 영지를 외국과 맞대고 있으므로, 상시 경계하며 전투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다른 왕국들과의 접전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가주의 무력이 중요한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백작님의 남편이 이끄는 기사단은 남부에서도 용맹하고 전투력이 높기로 유명했다. 그들을 이끌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안 되니 백작님께서도 이런 수를 내놓으신 모양이다.

나는 문득 민망해져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또, 네가 내 편지 읽고도 일부러 답장 안 하는 줄 알았네.”

“에이, 내가 그러겠어?”

아르한이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붉은 눈동자가 언뜻 짙은 색을 띠었다.

“내가 누나 편지에 대답하지 않을 리가 없지. 난 누나가 부르면 어디든 갈 텐데.”

“…….”

내가 멈칫하며 곤란한 기색을 내보이자 아르한은 씩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왜, 새삼스럽게. 우리가 남이야? 가족 같은 사이잖아.”

“아……. 가족, 가족. 그렇지. 우린 가족이지. 하하.”

또다시 밀려오는 민망함에 괜히 소리 내어 웃었다.

나한테 차인 당사자인 아르한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과민 반응하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좀 일찍 마주쳤으면 같이 점심 먹는 건데.”

내가 뜨끈뜨끈한 볼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하자, 아르한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누나는 찬 사람이랑 같이 밥을 먹고 싶어?”

“아…….”

괜찮은 것 같다는 말 취소.

내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지자 아르한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키득거렸다.

“장난이야. 누나가 나 하도 매몰차게 차서 포기하기도 완전 쉬웠어.”

“야!”

앙칼지게 소리친 나는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아르한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 진짜. 너 진짜 그럴래? 놀라게 하지 좀 마.”

꽥꽥 소리 지르면서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맥 빠지고 실없는 장난. 그래, 이래야 아르한이지.

“그럼 우리 사이 아무 문제도 없는 거지?”

약간의 안심 그리고 머뭇거림을 동반한 내 질문에, 아르한은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언제나처럼 짓궂은 미소를 내보였다.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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