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10)

* * *

“아, 심심하다. 대련하러 가야지.”

내 방에서 엉엉 운 이후로 선배는 내 방을 제 방처럼 드나들었다.

여느 때처럼 내 방 의자에 앉아 있던 선배가 기지개를 켜더니 몸을 홱 일으켰다.

“또요? 부지런도 하셔라.”

마냥 아름답고 고와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 기사들을 제압해 버리는 선배의 모습은 제법 좋은 볼거리였기 때문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선배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 야외 연무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긴 머리를 묶은 선배가 인사와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서자 기사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제 선배는 우리 저택의 모든 기사들과 서슴없이 대련을 청하고 검을 맞대는 사이가 되었다.

기사들도 처음에는 사용인들만큼은 아니라도 선배를 어려워했었는데, 검 몇 번 부딪혀 보더니 금세 친해진 것 같았다. 역시 검사들끼리는 그런 게 있나 보다.

훈련을 하던 기사들끼리 의논을 하더니 무슨 최종 보스 상대하듯 선배에게 도전해 왔다.

선배 나른한 몸짓으로 검을 꺼내드는 것과 동시에 대련이 시작되었다.

글로리아 선배의 제안으로 얼마 전부터 목검 대신 진검을 쓰기 시작한 기사가 제법 공격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글로리아 선배 또한 그걸 막느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로 묶은 백금색 말총머리가 바람처럼 나부꼈다.

저거 저러다 잘리는 거 아니냐.

가만히 대련을 관전하던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두 검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데, 어째 그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예리한 검날에 싹둑 하고 베일 것 같았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대련은 순조롭게 그리고 치열하게 이어졌다. 아직은 머리카락도 잘리지 않았다.

기사는 헉헉거리며 힘들어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선배도 평소에 까불거리는 표정으로 지운 채 진지하게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기사가 남은 힘을 쥐어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기사가 검을 휘두른 곳에 선배의 머리채가 있었다.

다음 순간 서걱,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백금빛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바닥에 떨어졌다.

어……?

백금색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연무장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

진짜 잘렸네.

내가 내 예지력 비슷한 것에 감탄하며 입가를 가리고 있는데, 좌중이 정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오러를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작 당사자인 선배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말이다. 상대인 기사가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선배는 능숙하게 검날을 비틀어 상대 기사의 검을 저 멀리 떨어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검이 챙 하고 날아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기사가 선배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마, 망했다.”

제온 경이 내 옆에서 그렇게 말을 더듬었다. 나도 덩달아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표정을 보니 소후작의 머리카락을 자른 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 영지가 제국 지도에서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온 경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가는 것 같길래 나는 황급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선배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 아니에요. 너무 겁먹지 말아요, 경.”

그렇게 다독이긴 했지만, 나도 다른 의미로 마음이 불편했다. 저렇게 곱고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이 잘리다니 저 기사가 무슨 대단한 범죄라도 저지른 것 같다. 와, 본인은 얼마나 쫄릴까.

침을 꿀꺽 삼키며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고 있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경. 숨도 쉬시고요.”

“예, 예……?”

“공격에 더 힘이 실렸던데요, 막기 힘들었어요.”

글로리아 선배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매끄럽게 웃었다.

선배의 도움을 받아 두 발로 똑바로 선 그 기사가 선망의 눈빛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선배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후우, 목말라. 나 물 좀.”

“아, 아, 네.”

나는 선배에게 물을 건네며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일단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긴 한데…….

때맞춰 선배가 하나로 묶여 있던 긴 머리채를 풀자 엉망이 된 백금발이 드러났다.

원래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의 끄트머리가 삐뚤빼뚤하게 잘려 있었는데, 그것조차 잘 어울리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그냥 머리카락 잘못 잘린 건데 왜 야성적이고 자유로운 스타일로 보이는 거지. 역시 얼굴이 되니까 뭐든 잘 어울리는 거다.

아,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닌데.

“어, 어떡하지.”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선배가 물컵을 내려놓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 뭐가?”

“신경 써서 기르신 거 같은데, 엉망이 됐잖아요.”

내가 선배의 잘린 머리카락을 힐끗거리며 말하자 선배는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이거? 괜찮아, 괜찮아. 신경 안 써.”

그녀가 덧붙인 다음 말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이참에 자르지 뭐!”

* * *

“……진짜 잘라요? 진짜 진짜?”

결국 머리를 자르기로 하고 시녀에게 가위를 들고 오라 시켰다.

내 머리도 다듬어 줄 만큼 실력 있는 사람인데, 가위를 든 시녀는 발발 떨고 있었다. 하긴 내 곱슬거리는 노란 머리와 백금을 녹인 것 같은 선배의 머리카락은 다르게 느껴지겠지.

“어차피 신학교에서 자른 이후로 한 번도 안 다듬었어. 조만간 자를 생각이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 케이트.”

선배가 호기롭게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소심하게 물었다.

“……정말 잘라요?”

“응. 어깨까지.”

나는 아직 허리께에서 찰랑이는 비단 같은 백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머리 자르는 거야 자기 자유지만, 선배의 머리카락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걸 잘라 버린다는 게 아깝기까지 했다. 그리고 잘린 머리카락은 그냥 버려질 텐데.

“엄청 긴데. 아깝지 않아요, 선배?”

“아냐. 난 이미 결단을 내렸어.”

그러니 잘라!

선배가 은빛으로 번뜩이는 가위 날에 제 머리카락을 가져다 대며 결연하게 말했다.

시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가위를 움직이자, 백금색 머리카락들이 싹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 완전 가벼워! 자르길 잘했다.”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며 선배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되게 털털하시네요.”

“내가 한 털털 하지.”

내게 대답하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애들이 보면 깜짝 놀라겠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백금색 머리카락을 힐끗거리다 태평하게 대답했다.

“뭐 상관없죠. 잘 어울리세요.”

나는 남은 방학을 숙제를 하고 노아 선배와 연락을 하는 것으로 보냈다. 결국 방학이 끝날 때까지 아르한의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각오를 하고 있던 터라 많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히도 이례적으로 많이 쌓였던 눈은 개학 1주 전부터 녹기 시작해, 개학 하루 전인 지금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갈까…….”

아빠가 내 얼굴을 쓸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아쉬움을 띤 미소를 지었다. 진급 시험 준비를 위해 봄 방학엔 아카데미에 머물기 때문이었다.

진급 시험을 본 다음 3월에 진급을 하고 신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다음에 집에 오는 건 여름 방학이 된 후일 것이다.

“여름 방학도 금방 오겠지. 편지할게.”

마차에 짐을 다 실은 글로리아 선배가 아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자작님.”

“아닙니다. 언제든지 다시 오시죠. 환영입니다.”

감사 인사를 받은 아빠는 손사래를 치며 허허 웃었다.

정문 앞에는 아빠뿐만 아니라 기사들과 사용인들도 가득 서 있었다.

허, 나 혼자 학교로 갔을 때는 이 정도 아니었는데.

“기, 기사님. 이, 이거 받아 주세요…….”

어이없어서 혀를 차고 있는데 사람들 틈에서 한 시녀가 나와 글로리아 선배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뭔가 하고 자세히 보니 곱게 수를 놓은 손수건이었다.

어이구, 이게 뭐람. 하긴 선배가 우리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긴 했지.

손수건을 받아 든 글로리아 선배가 그 시녀를 향해 씨익 웃었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아아……!”

글로리아 선배의 미소를 정면에서 바라본 그 시녀는 머리를 짚으며 휘청였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긴 선배가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긴 하지. 하여간 이 선배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만 가 볼게요.”

나는 동료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시녀를 뒤로한 채 마차에 올랐다. 글로리아 선배도 나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뒤를 돌아보자 리타를 비롯해 처음엔 선배를 무서워하던 사용인들과 기사들 전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우리 저택이 조그만 점이 될 때까지 배웅 소리는 우렁차게 들려왔다.

창밖으로 손수건을 흔드는 선배를 보니, 선배도 그새 정이 많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와, 봤지, 봤지, 케이트? 나 이런 사람이다? 하, 이놈의 인기란.”

그리고 다음 순간, 하녀에게서 받은 손수건을 흔들며 느끼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선배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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