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 연결됐다!”
이상하게 통신이 잘 되지 않는 통신구를 가지고 씨름을 하길 몇 분, 나는 드디어 통신구 표면에 비친 노아 선배의 모습에 대고 손을 마구 흔들었다.
“선배, 선배! 저예요, 케이트! 저 보여요?”
-응, 잘 보여. 안녕, 잘 지냈어?
긴 은발을 느슨하게 묶은 노아 선배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책으로 가득한 배경은 아마도 선배의 방인 것 같았다.
크윽, 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가슴께를 쥐었다.
고작 2주 정도 못 봤다고 면역력이 약해지다니 정말 대단한 미모다.
-보고 싶었어.
선배는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속삭였다.
오랜만에 듣는,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여전히 꿀처럼 달콤하고 봄날처럼 따뜻한 울림에 기분이 조금 나른해졌다.
“으응, 나도요.”
나도 턱을 괸 채 덩달아 헤실헤실 웃으며 괜히 통신구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이내 노아 선배가 한 떨기 꽃처럼 가련한 모습으로 속눈썹을 떨며 물었다.
-많이 바빴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나 통신 엄청 많이 걸었는데.
“아, 진짜요? 제 통신구가 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수신도 불안정한 모양이에요.”
나는 눈썹을 내려뜨리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거긴 어때요? 여긴 눈이 엄청…….”
눈사람을 만들고 난 날 오후부터 눈이 심상치 않게 많이 오더니, 이내 종아리가 푹 잠길 정도의 높이로 쌓였다. 신기한 풍경이다만 그것 때문에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저택 앞의 눈을 치우느라 고생이었다.
온통 하얀색으로 물든 창밖을 선배에게 보여 주려 통신구를 집어 드는데,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통신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노아스야? 둘이 통화해?”
그녀가 자신도 있다며 노아 선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노아 선배가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 둘이 같이 있었어?
“그럼. 야, 수도는 눈 많이 왔냐? 여긴 엄청 쌓였어!”
글로리아 선배가 통신구에 얼굴을 들이대며 소리치듯 말하자 통신구에서 쾅 하는 큰 소리가 났다.
나도 글로리아 선배도 깜짝 놀라 통신구를 내려다보았다. 노아 선배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손에 남은 마력을 갈무리했다.
-얼굴 들이대지 마, 케이트 안 보여.
“그래그래, 나도 많이 보고 싶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온화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통신구를 쓰다듬었고, 노아 선배는 그대로 굳었다.
“나…… 이렇게 여기서 태어나서 너를 만나고 같이 놀아서 참 좋았다. 넌 가끔, 아니 대부분 짜증 나고 재수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넌 꽤 괜찮은 놈이야.”
뭐…… 뭐야. 아, 아. 그, 그거구나.
전에 내가 환생 운운하며 했던 말이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인지, 글로리아 선배가 그렇게 말하다 말고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물었다.
“고백하세요? 제 앞에서? 노아 선배한테? 근데 왜 갑자기 멈추세요?”
“아니, 쟤 표정을 좀 봐.”
글로리아 선배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통신구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통신구에 비친 노아 선배의 하얀 미간에 골이 하도 깊게 패 있어서 내가 다 상처받을 것 같았다. 하긴 사정을 아는 나도 놀랐는데 선배는 얼마나 기겁했겠는가.
무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노아 선배는 뭐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미쳤군.
“할 말이 그것뿐이냐?”
글로리아 선배가 퉁명스레 묻자 노아 선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툭 던지듯 대답했다.
-……죽지는 마.
“야!”
그에 글로리아 선배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통신구를 쥐고 흔들었다.
“흔들지 마요, 깨져요!”
“미안…….”
선배는 내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머쓱하게 통신구를 내려놓았고, 나는 다시 통신구 속 노아 선배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정상적으로 대화를 이어 가려 했다.
“그래서 거긴 눈 많이 왔어요?”
-아니, 마차도 잘 다녀.
다시 따스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노아 선배가 대답했다. 글로리아 선배는 내 옆에서 저 자식 이중인격자 아니냐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그걸 못 들은 체하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플로라 선배는 잘 있죠?”
-본 지는 꽤 됐는데 사교 행사에는 꼬박꼬박 나가는 것 같더라.
“선배는 사교 행사 안 나가요?”
-어……. 나는 별로.
노아 선배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쟤가 어디 연회나 파티 나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황궁 행사야 수도 귀족이라면 의무니까 참석해도 다른 귀족가 사교 행사에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니까?”
“어머…… 저돈데.”
황궁이야 가 본 적도 없었지만 사교 행사를 좋아하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줍게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잘 맞겠네요.”
-응.
우리 사이에 공간을 초월한 핑크빛 기류가 흘렀다. 그걸 아니꼽게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중얼거렸다.
“으…… 꼴값.”
“방학이 2주나 남았네요. 얼른 개학하기를 바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달력을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연락 자주 하다 보면 금방 지나갈 거야.
노아 선배는 자신도 아쉽다는 듯 눈썹을 한껏 내려뜨리고 나를 위로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어, 좀 있으면 식사 시간인데? 아버님이 기다리시겠다. 이만 끊어야겠는걸.”
시계를 힐끗 본 글로리아 선배가 얄미운 표정으로 통신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녀를 힐끗 째려보고선 노아 선배를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네요. 이만 끊을게요. 나중에 다시 연락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점심 맛있게 먹어.
글로리아 선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통신구에 대고 혀를 내밀었다.
“흥, 두고 봐. 네 케이트를 데리고 매일매일 놀러 다녀서 연락할 시간도 없게 할 거야. 어디 한번 케이트 결핍으로 고생 좀 해 봐라.”
노아 선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눈을 접어 웃었다.
-또 연락할게.
“하지 마!”
글로리아 선배가 꽥 소리 질렀지만 노아 선배는 신경 쓰지 않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통신이 꺼지고 통신구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을 때까지.
“여전히 재수 없는 자식.”
“하아, 여전히 너무 예뻐…….”
우리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점심을 먹으러 방을 나섰다.
“오늘은 엄청 춥대요.”
나는 서리가 껴 하얗게 변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고드름을 응시하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또 눈싸움하게? 도전을 받아 주지.”
“아니, 너무 추워서 못 나간다니까요.”
오늘 날씨에는 아무도 밖에 안 나갈걸요.
글로리아 선배가 뻐기듯 말하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뭐야, 그럼 우리 오늘은 뭐 해?”
“집에 있어야죠, 뭐…….”
우린 집 안에 갇힌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내 말 하나로 갑자기 분위기가 축 처지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선배에게 제안했다.
“점심 먹고 저희 저택이나 마저 둘러보실래요? 유서 깊은 걸로는 루피너스 저택한테도 안 질걸요.”
점심을 배불리 먹은 선배와 나는 든든해진 기분으로 2층 복도를 걸었다.
우리 방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선배가 나무로 된 벽을 짚으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는 벽에 아무것도 안 걸어 놔?”
“딱히 걸 게 없는데요. 엄마 초상화라면 아빠 방에 있고요.”
“부럽다. 우리 집은 복도에 역대 가주들 초상화를 걸어 놓는데, 기분이…… 진짜 이상해. 별로야.”
꼭 조상들한테 감시당하는 것 같다며, 선배는 루피너스 저택을 연상하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음, 별로다.”
“그렇지.”
선배와 부담스러운 인테리어에 대해 토론하며 긴 복도를 걷다 보니 서재가 나왔다.
“아, 여기예요.”
나는 우리 저택의 자랑, 서재의 문을 열며 우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볼 거 엄청 많아요. 수도에서는 안 파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노아 선배도 우리 영지 방문했을 때 여기 살다시피 했어요.”
“오오, 진짜네. 책은 우리 저택보다 많다.”
“엄마도 책을 좋아했고 아빠도 책을 좋아하니까요.”
산처럼 쌓인 책들을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파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나도 덩달아 읽을 만한 책을 꺼내곤 의자에 앉아 책을 폈다.
막상 읽다 보니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눈가를 비비며 창밖에 쌓인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아.”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서재 책상에 구비되어 있는 편지지와 펜, 잉크에 손을 뻗었다.
서걱서걱 소리와 함께 편지를 써 내려가는 나를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물었다.
“편지 쓰는 거야? 누구한테 써?”
“옆 영지 아르한이요. 평소에는 방학이면 서로 저택에 놀러 가고 그랬는데 지금은 마차가 못 다닐 정도로 눈이 쌓여서요.”
안부를 묻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밀랍으로 봉한 내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선배는 볼을 긁으며 물었다.
“아, 그…… 네가 찼다는 애?”
“……소꿉친구예요.”
그랬지. 지난 학기에 아르한과는 그…… 많은 일이 있었다. 내가 걜 차고, 잠깐 어색해졌다 어떻게 또 화해하고.
확실히 우리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피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우정이 몇 년인데.
“그럼 좀 어색하겠네. 너도 걔도 많이 힘들겠다.”
“……아무래도 좀 그렇죠.”
글로리아 선배의 한마디에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소꿉친구가 사실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아르한의 고백을 듣고 사건이 일단락된 지가 몇 달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잘 안 믿겼다.
“하아.”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예전과 똑같은 사이로 돌아가겠다는 건 내 욕심이지. 내 입장에서야 몇 개월이나 지난 거지만 아르한 입장에서는 마음을 정리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늘 이맘때쯤 편지를 했었는데 지금은 편지 하나 안 보내는 아르한에 대한 섭섭함은 조금 사라졌다.
나는 우울한 얼굴로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다 복도로 나가 사용인에게 편지를 건넸다.
“히리스 백작저로 보내는 편지야. 잘 부탁해.”
어쩌면 답장은 기대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