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10)

* * *

어제 그렇게 큰소리쳐 놨으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서 눈이라도 뭉치고 놀아야 하겠지만 오늘 오전은 안 된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진중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고쳤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검은 드레스에 대비되어 무척 창백하게 보였다.

나는 요란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밝은색의 옷을 좋아했고, 고로 까마귀처럼 새까만 드레스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내 취향을 고집할 만한 날이 아니었다.

그랬다. 검은 옷을 입은 오늘은 엄마의 기일이었고, 내가 가진 옷들 중에서 가장 차분한 디자인의 검은 드레스는 엄마의 무덤에 찾아가기 위해 골라 입은 것이었다.

곧이어 곱슬거리는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내가 방을 나섰다.

복도에서는 글로리아 선배가 역시나 사뭇 차분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로리아 선배는 며칠 전부터 정말 같이 가도 되는 거냐고 불안한 얼굴로 연신 묻더니, 오늘도 역시 어색한 표정이었다.

나는 선배와 함께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날이 날인 만큼 저택 안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훨씬 침체되어 있었다. 주인인 아빠의 기분이 침울한 탓도 있고, 오래 일한 나이 든 고용인들 중에서는 엄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 다 했니? 자, 가자꾸나.”

“저어, 가족끼리의 일에 끼어드는 것 같아서 좀 죄송하네요.”

“괜찮습니다. 케이트의 친구분이 오면 제니퍼도 좋아할 겁니다.”

미안하다는 듯한 글로리아 선배의 말에 아빠는 답지 않게 기운 없이 웃더니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어색한 동작으로 묶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매년 있는 일이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 침울한 분위기는 정말 싫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이 느낌.

다행히 블레어가의 가족 묘지는 근처에 있었기에 멀리 가야 할 필요는 없었고, 몇 분이 지나서 마차는 멈췄다.

마차에서 내리니 역대 블레어 일족들의 묘 중에서도 전대 자작부부의 무덤 앞에 홀로 외로이 있는 무덤 하나가 보였다.

글로리아 선배는 무척이나 어색한 동작으로 멀찍이 나무 옆에 서 있었고, 아빠는 묘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글로리아 선배보다 조금 앞에 서서 아빠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뒤 아빠가 내게 고갯짓을 하며 뒤로 물러나자 나는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 오랜만이야.”

엄마의 이름이 적혀 있는 묘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는 그냥 아빠 옆에서 조용히 추모만 했었는데,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할머니한테 다 들었어. 나 낳아 줘서 고마워. 많이 힘들었을 텐데.”

품에서 초록색 표지를 달고 있는 책, 얼마 전 할머니가 저택으로 보낸 엄마의 예언서를 꺼낸 나는 그걸 묘비 앞에 가져다 놓으려다 말고 다시 옆구리 사이에 끼웠다.

“……이건 내가 잘 보관할게, 엄마.”

눈이 덮인 묘비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잘 있어, 엄마. 내년에…… 아니, 생각나면 또 올게.”

묘비를 향해 조금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 내가 살짝 웃어 보였다.

“안녕, 엄마.”

* * *

“아, 맞다.”

나는 밖에 나가기 위해 겉옷을 챙겨 입다 말고 무언가가 퍼뜩 생각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책상에 놓여 있던 초록색 책을 들고 복도를 가로지른 내가 아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존 자네인가? 들어오게.”

“아빠, 나야.”

“응? 케이트?”

엄마 무덤에 갈 때 가져갔었는데, 한번 읽어 본 뒤 아빠한테 주기로 결심만 하고 그걸 그만 까먹어 버렸다. 바보 같으니.

나는 책상에 앉아 있는 아빠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책상에 책을 올려놓았다. 책은 조금 낡아서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쨍한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얼마 전에 할머니가 나한테 보내 주신 건데…… 엄마가 옛날에 쓰던 거래. 아빠가 엄마 책들 보관하고 있으니 이것도 아빠한테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어차피 아빠에게는 내용이 보이지 않을 테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좀 그러니 뒷말을 덧붙이지 않고 책을 건넸다.

“장모님이……? 갑자기 네게? 별일이구나.”

“으음……. 그러게.”

서류 처리를 할 때 쓰는 안경을 벗은 아빠가 책을 집어 들고 그걸 펼쳤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제니퍼가 가지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네. 책이 아니라 공책이었구나.”

뭘 쓰려고 했던 걸까.

아빠는 아련하게 웃으며 책을 받아 들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케이트.”

“으응, 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썼다.

“나 선배랑 놀러갈게.”

“나가려고? 추운데 옷 단단히 입고 가렴.”

“이미 더울 정도로 껴입었거든.”

아빠의 잔소리에 새침하게 답한 나는 두꺼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집무실을 나왔다.

“선배, 준비 끝났어요?”

“응, 더워 죽겠다.”

나만큼이나 두껍게 차려입은 글로리아 선배가 복도로 걸어 나왔다.

“자, 갑시다.”

1층으로 내려가 저택의 문을 열자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이 펼쳐졌다.

“우와, 우와.”

“역시 나오길 잘했죠? 모처럼 눈이 이렇게 쌓였다고요.”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것도 잠시, 선배가 궁금하다는 어투로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뭐 하려고, 케이트? 눈사람 만들게?”

하하, 눈사람? 설마요. 그런 시시한 걸 하려고 여기서 놀다 가자 한 줄 알아요?

나는 악랄하게 미소 지으며 선배의 눈에 띄지 않게 한 손 가득 눈덩이를 뭉쳤다.

“케이트, 왜 대답을 안…….”

적당한 크기로 뭉쳐진 눈덩이가 퍽 소리를 내며 백금색 뒤통수에 꽂히자, 선배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악!”

“하하하하!”

내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사이 선배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눈밭 위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눈을 뭉쳤다. 성인 주먹만큼 커다래진 눈덩이가 푸르게 빛나며 얼음으로 뒤덮이자, 그제야 깔깔 웃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 맞다. 선배 오러 얼음이었지.

“야, 너 거기 서.”

거대한 눈덩이를 감싸고 있는 얼음 막이 오전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저거에 맞으면 최소 머리가 깨진다.

나는 그 생각 하나로 필사적으로 마력을 꺼내 방어막을 만들었고, 방어막에 맞은 눈덩이는 파삭 소리와 함께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하하하.”

방어막을 끄며 나는 악랄하게 웃었다. 역시 마법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야, 마법은 반칙이지!”

“선배가 먼저 오러 썼잖아요!”

선배가 새로운 눈덩이를 뭉치며 소리쳤지만, 나는 지지 않고 반박하며 새로운 눈덩이를 만들었다.

“으악!”

하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더 빨랐다. 차갑고 단단한 눈덩이가 내 얼굴에 날아와 꽂혔다.

“풉.”

나는 얼굴을 흔들어 묻은 눈을 털어 내곤 입에 들어간 눈을 뱉어 냈다. 글로리아 선배는 나무를 짚고 좋다고 웃어 젖히고 있었다.

부아가 치밀어 한 손에 들고 있던 눈덩이를 기세 좋게 던졌지만, 선배는 얄미운 표정으로 그걸 쓱 하고 피했다.

그 후에도 나는 선배를 향해 눈덩이를 몇 번이나 던졌지만 족족 빗나가고 말았다.

나는 힘이 다 빠진 채 눈밭에 누워 팔다리만 힘없이 휘적거리며 천사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흐아, 아, 허억. 히, 힘들어, 짜, 짜증 나…….”

젠장, 괜히 먼저 눈덩이를 던져서는.

나는 겨우 고개를 살짝 들어 나와는 달리 팔팔해 보이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말했다.

“……우리 눈사람이나 만들래요?”

“오호라, 너 자신 없지? 응? 그런 거지?”

“아니……. 솔직히 제가 선배를 힘으로 어떻게 이겨요. 팔 아파 죽겠네…….”

내가 선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변명하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네가 먼저 던져 놓고서는!”

“아 몰라요, 눈사람이나 만들어요.”

나는 힘이 다 빠진 몸을 겨우 일으켜 주섬주섬 눈을 모았다. 그런 나를 다소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도 이내 쌓인 눈을 모아 하나로 굴렸다.

정신없이 몰입하다 보니 사람 크기 정도의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눈을 파헤쳐 찾아낸 조약돌을 눈 부분에 박아 마무리한 나는 만족스럽게 턱을 쥐었다. 두 눈의 모양이 조금 다른 데다 입 모양이 이상해서 조금 멍청하게 생기긴 했지만 나름대로 귀여웠다.

“완성이다!”

유치한 짓이지만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글로리아 선배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미성년자라고.

“어으, 춥다. 이제 갈 거지, 케이트?”

글로리아 선배가 코를 훌쩍이며 내게 손짓했다. 얼음 속성 오러 쓰는 사람도 추위는 타는구나, 신기하다.

“……잠깐만요. 우리 이거 얼리지 않을래요?”

눈사람을 바라보며 턱을 쥐고 있던 내가 진지한 투로 제안하자, 선배가 두 눈을 껌뻑거리며 눈사람을 가리켰다.

“이걸? 얼리자고?”

“네, 선배는 쉽게 할 수 있잖아요.”

“하, 케이트. 넌 내가 얼마나 고급 인력인지 모르는구나. 백 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사람한테 눈사람을 얼리라고?”

글로리아 선배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여름에는 덥다고 오러를 냉방에 쓰시던 분이. 왜 눈사람은 안 되는데요?”

“그거랑은 다르지, 인마.”

선배는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아주 꼼꼼하게 눈사람을 얼려 주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얼음으로 뒤덮인 눈사람을 쓰다듬었다.

그 후 선배의 오러 사용에 대해 아웅다웅 말싸움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지난 며칠 동안 펑펑 온 걸로도 모자란 건지 하늘에서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콧잔등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털어 내며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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