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10)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색한 나머지 나는 걸음을 재촉했고, 그 덕에 글로리아 선배와 나는 할머니 댁에 갔을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 만에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 우리가 저택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파래요, 아가씨. 뭘 하고 오셨길래…….”

“별거 아냐. 이것 좀!”

나는 헐레벌떡 장갑과 모자를 벗어 나를 걱정하는 사용인에게 건네고는 글로리아 선배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이끌었다.

“잠깐, 어디 가는데?”

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나는 계단을 오르며 태평하게 대답했다.

“제 방이요.”

아차, 깜빡했다.

맹렬한 기세로 계단을 달려 올라가던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계단 아래에 대고 소리쳤다.

“에이미, 내 방으로 코코아 두 잔 부탁해.”

내 손에 이끌려 2층에 도착해 내 방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선배는 계속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우리 여기 뭐 하러 왔어?”

“대화요.”

벽난로 근처 소파에 선배를 앉히고 맞은편에 나도 앉자, 왠지 사무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뭐, 뭔 대화?”

선배가 반듯한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 오자, 나는 태연하게 대답하려다가 내 입을 막았다.

“그 이상한, 읍, 아니 그…….”

아뿔싸, 이상한 이야기라고 말이 헛나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멍청하게 팔을 휘저으며 말을 더듬었고, 선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변명을 시작하려는 내 말을 끊었다.

“됐어.”

“네?”

“어차피 너도 날 이상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렇지?”

“아이고, 우리 선배 왜 이러실까. 안 그렇다는 거 알잖아요.”

나는 샐샐 웃으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글로리아 선배의 비위를 맞췄다.

“저 책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우리 둘뿐인데, 그럼 저도 미쳤게요?”

선배는 내 얼굴을 흘깃 바라보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정신 차려, 케이트. 지금 선배 기분 풀어 주려고 온 거잖아.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말씀하신 대로 코코아를 가져왔습니다.”

“어어, 그래! 얼른 들어와.”

때맞춰 시녀가 마시멜로를 동동 띄운 코코아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선배가 엄청나게 저기압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시녀에게 얼른 코코아를 가져오라 눈짓했다.

나는 우아한 손짓으로 잔을 들고 코코아를 홀짝였다. 곧이어 나보다 훨씬 더 능숙한 예법으로 잔을 드는 선배를 보니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므로 얼른 코코아를 마저 들이켰다.

“큼큼. 짜증 내서 미안.”

코코아를 몇 번 마시던 선배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내 고민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너까지 내가 이상하다는 것처럼 말하니까 섭섭했어.”

“그러셨군요. 속상했겠다.”

“계속…… 여태껏 계속 그런 취급 받을까 봐 겁나서 누구한테 말은커녕 생각도 잘 안 하려고 했는데.”

코코아가 선배의 입을 열었다. 역시 기분 나쁠 땐 단것이 최고다.

나는 컵을 기울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 한시름 놨지만, 선배의 표정을 보니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아까보다 아주 조금 나아진 것뿐이지 예쁜 얼굴에 드리운 수심은 여전했다.

“음, 조금 풀리신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전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고개를 수그리고 손톱을 딱딱 깨물고 있던 선배가 슬쩍 고개를 드는 사이 나는 말을 이었다.

“구마 의식도 안 할 거고 정신 병원에 보내지도 않아요.”

생각해 보면 글로리아 선배에게 신세 진 것이 많다.

사교 클럽 사건 때 뒤처리를 해 준 것도 선배였고 내가 노아 선배에게 고백할 수 있게 용기를 준 것도 글로리아 선배였다.

허구한 날 농담 따먹기나 하며 능글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알게 모르게 지난 학기 동안 내게 지대한 도움을 준 그녀였다. 연애 문제든 뭐든 간에.

“……생각해 보니 저한테 필요한 얘기만 듣고 선배 개인에 대한 얘기는 제대로 들은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예언서에 대한 얘기는 매번 조언까지 얻을 정도였으면서, 나머지는 헛소리로 넘겨 버리기까지 했지.

선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그냥 넘기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글로리아 선배는 가벼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버린 바람에 ‘에휴, 또 저런다’ 같은 생각을 하며 흘려들은 게 많았다.

“예언서랑 거기에 대한 고민을 도와주셨으니까, 이번엔 제 차례예요.”

두 눈을 게슴츠레 뜬 글로리아 선배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들려주세요. 전 선배 이야기가 알고 싶어요.”

전생의 선배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는 나름 매끄럽게 말을 마치곤 선배에게 귀를 기울였다.

선배는 아쉬운 표정으로 다 마신 코코아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다음 입을 열었다.

“죽었을 당시 나는 스물세 살 대학생이었어.”

……생각보다 일찍 죽었네.

나는 속으로 애도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한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지. 여기서랑은 다르게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 공부든 뭐든 전부 그럭저럭 중간이었어. 대학도 그냥 점수 맞춰서 갔고.”

글로리아 선배는 답지 않게 다소 초조하고 슬퍼 보였다. 그녀가 두 손가락을 얽은 채로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취미는 로맨스 소설 읽기였는데, 그중에 플로라랑 노아스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었어.”

선배는 잘 이야기하다 말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목이……<장미를 감싼 안개>.”

“……예?”

오, 오글거려.

진지한 분위기는 아주 약간 깨졌고, 나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글로리아 선배도 그 제목을 입 밖으로 내었다는 것에 무척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설마 장미는 플로라 선배, 안개는 노아 선배를 의미하는 것이려나……. 에이, 관두자.

제목의 뜻을 유추하려다 그만둔 내가 다시 귀를 기울이는 기색을 보이자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는 아이스크림 사러 밤에 밖에 나갔었는데 누가 날 찔러 죽였어.”

“…….”

“아팠어, 엄청 아팠는데 난 날 죽인 게 누군지도 몰라. 왜 하필 나야? 난 그냥 아이스크림 하나 사러 나갔을 뿐이란 말이야. 다음 날은 친구랑 만날 예정이었고, 알바해서 모은 돈도 다 못 썼는데…….”

선배는 애써 떨림을 참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뜩이나 늦은 시간이었는데, 다들 많이 걱정했겠지? 내 장례식에 사람은 많이 왔을까? 엄마 아빠가 너무 많이 울었으면 어떡하지?”

선배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손수건을 건넸고, 글로리아 선배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숨죽이고 울었다. 그게 오히려 더 서러워 보여서 나도 덩달아 눈가가 시큰거렸다.

“미안, 너무 뜬금없지……. 내가 왜 이런담.”

“괜찮아요. 선배 마음이 편해지는 게 더 중요하죠.”

나는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긴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러다가 조금만 긴장을 풀면 둘이 끌어안고 엉엉 울게 생겼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는데 네 출생의 비밀, 그러니까 예언자 혈통 이야기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옛날 생각에 잠겼나 봐. 다 소용없는데.”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낸 선배는 코를 훌쩍이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크흥. 고마워, 케이트. 너한테 말하고 나니까 훨씬 괜찮아졌어.”

“들려달라고 한 건 전 걸요.”

코맹맹이 소리 덕분에 울 것 같은 기분은 가셨다.

선배가 여전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이야기를 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몰라.”

다 젖어 눅눅한 손수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난 좀 외로웠어.”

고마워.

선배가 내게 살포시 웃어 보이며 분위기가 훈훈해지려는 찰나였다.

“음, 선배, 그런데요.”

내가 친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선배가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전생이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해지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게 될 수 있잖아요?”

‘전생’이란 단어를 말하는 게 이제 더 이상 창피하거나 오글거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허무맹랑한 미친 소리 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배에게는 현실이었고, 나는 그 얘기를 가볍게 넘길 만한 사항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또 그런 꿈을 꿔서 기분이 이상해진다거나, 옛 고향이 다시 그리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까칠하게 굴던 건 언제고 순한 상태로 돌아온 글로리아 선배는 내 말에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그때마다 절 부르세요. 우린 졸업하고도 얼굴 볼 거잖아요? 돈 좀 써서 포탈을 통과하든, 마력 좀 써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리든 제가 선배한테 갈게요.”

제가 어떻게든 그쪽으로 갈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자 선배는 멍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선배는 하고 싶은 말을 저한테 하면 돼요. 아시잖아요. 전 선배를 미친 취급 하지 않아요.”

무슨 이야기든 상관없다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긴 여기랑은 완전히 다른 세계라면서요. 그럼 뭐 얘기할 게 엄청 많을 거 아니에요? 문화며 환경이며……. 뭐 그런 거요. 아니면 선배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두 푸른 눈을 깜빡이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거창한 걸 할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선배 말 들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중간에 뭐라 안 하고 다 듣겠다고 약속할게요.”

“……응.”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선배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푸스스 웃는 선배의 얼굴에 대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꼭 그…… 환생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말아 주실래요?”

글로리아 선배가 고개를 들자 내 모습을 담은 푸른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케이트……!”

내 일장 연설을 들은 선배는 감동받은 듯한 표정으로 내게 안겨 왔고,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그녀를 토닥였다.

“그래요, 그래요.”

“으허허허헝.”

다소 꼴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이는 선배를 달래며 나는 한숨을 돌렸다.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어느새 선배의 푸른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아왔으며 하얀 얼굴에 드리운 수심은 사라져 있었다.

“아,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 들어 줘서 고마워, 네 덕분이야.”

글로리아 선배가 탁자 위에 올려뒀던 손수건에 대고 코를 풀었다. 팽,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고 나는 머쓱하게 코를 긁었다.

“아, 후련하다. 근데 머리 아파.”

선배는 조금 빨개진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웃었다.

“계속 우니까 머리가 아프죠. 얼굴도 빨개요. 물 좀 드시고, 여기 조금 누워 있으세요.”

나는 침대 시트를 두드리며 물을 마시는 선배에게 손짓했다.

“그래도 괜찮아?”

“그럼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글로리아 선배가 머쓱하게 내 침대에 눕자, 나는 그녀의 새빨개진 눈두덩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아이구, 눈이 퉁퉁 붓겠네요. 아니, 이미 부었잖아요.”

“네 잔소리 우리 엄마 같다.”

저 ‘엄마’가 루피너스 후작 부인은 아닌 것 같네.

선배가 제 눈가를 더듬으며 큭큭 웃자 시트 위에 흩어진 백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까의 우울하고 날 선 분위기는 어디 가고 평소의 풀어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선배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선배, 지금껏 수도랑 아카데미를 벗어나 본 적 없죠?”

“아, 아니야. 신학교도 갔었거든.”

그걸 지금 벗어난 거라고…….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 책에 나오지 않은 곳은 가 본 적 없을 거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이 세계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말이나 하는 거 보면 알죠. 그게 다, 이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꼭 집안 원로들처럼 말하네. 책에 나온 곳이랑 안 나온 곳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다고. 거기가 거기지.”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선배를 무시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선배는 너무 집 안에서만 곱게 자라서 그래요.”

글로리아 선배가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킬 기세로 내게 눈을 부라렸다. 나는 그 불타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뭐 인마?”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무시한 내가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책에 나오는 게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제가 알려 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그게?”

선배가 퉁퉁 부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묻자,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모처럼 방학이고 여기까지 왔는데, 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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