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10)

* * *

역시 디안은 다정해. 내가 무슨 복으로 이런 애를 만났지?

“흐흐흥.”

여느 때처럼 숲속에서 디안과 만남을 가지고 돌아온 제니퍼는 입가가 씰룩거리는 것을 느끼며 집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엄마? 이 시간에 왜 집에…….”

왠지 가라앉아 있는 집 안의 분위기에 겁을 먹은 제니퍼가 말을 더듬었다.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엄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니퍼.”

제니퍼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엄마는 제니퍼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추궁했다.

“언제부터야? 그 남자애, 언제부터 만났는데? 영주 아들, 언제부터 만났어?”

제니퍼는 어안이 벙벙해 벙어리처럼 서 있다가, 식탁에 녹색 표지를 단 책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니퍼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저걸 읽은 거야?”

“똑바로 대답해. 언제부터 만났어?”

자신을 흔들며 다그치는 엄마의 표정은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더 일그러져 있었다.

엄마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는 몰랐지만, 조금 두려워진 제니퍼는 두 손을 등 뒤로 잡곤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며, 몇 달 전…….”

“……너 이리 와.”

대답이 거슬렸는지 엄마는 제니퍼의 손목을 붙잡고 위층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런 엄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사납고 단호한 엄마는 난생처음 봐서, 제니퍼는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와 제니퍼를 방 안에 몰아넣은 엄마가 말했다.

“이제 걘 만나지 마.”

“뭐……?”

아려 오는 손목에 인상을 찌푸리던 제니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그동안 디안과 만나면서도 약초 캐 오기며 약초학 공부며 무엇 하나 게을리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싫어! 싫어, 내가 왜?”

제니퍼가 인상을 구기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엄마는 고함을 지르듯 그녀에게 소리쳤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이 보였다.

“너 죽는다고!!”

“무슨 소리야, 엄마. 저건 그냥 책이잖아.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제니퍼는 어째 험악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제니퍼, 저건 예언서야.”

“뭐……?”

무슨 서? 엄마 왜 그래?

제니퍼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오만상을 쓰자 엄마는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좀 더 나중에 네게 말해 주려 했건만, 책은 워낙 드물게 나타나는 데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라서…….”

그리고 엄마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꽤나 장황한 이야기였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디안과 계속 만나면 자신은 죽게 된다.

“……싫어.”

자신은 예언서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들어 보았다. 고작 이 책 하나 때문에 그 다정한 목소리, 눈동자며 손길을 포기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다.

제니퍼는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깟 책이 뭐라고 내가 걜 포기해야 하는데?”

“……뭐?”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제니퍼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엄마는 지금까지 뭐든지 한 번도 내 뜻대로 하게 해 준 적 없었잖아!”

“그게 지금 문제야?! 너 죽는다고!!”

“내가 바꿀 수 있어. 예언서로 미래도 바꿀 수 있었다며. 난 안 죽을 거야. 절대로.”

엄마에게 반항해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지만 의외로 말은 술술 잘 나왔다.

제니퍼는 주먹을 꽉 쥐곤 항변했다.

“이 불확실한 운명이 뭐라고 내가 그거에 복종해야 해.”

“……제니퍼.”

“난 안 그럴 거야. 이번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엄마가 듣기에는 미친 소리일 것이 뻔했다. 제 발로 죽을 길로 간다니.

하지만 제니퍼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던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입을 연 김에 제니퍼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쏟아 내었다.

나 사실 약사 하기 싫어. 글 쓰고 싶어. 난 디안이 정말 좋아.

“난 그 애를 정말 많이 좋아해. 엄마, 걔랑 함께 있으면 진짜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제니퍼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뱉은 그 한마디에 방금까지 입을 뻐끔거리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그것도 어느새 6년도 더 된 일이었다.

흔히 말하길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라는 게 찾아온다더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 책의 내용은 제니퍼의 생각보다 아주 잘 들어맞았다. 자신은 지금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침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제니퍼가 누워 있는 방 안의 풍경은 처참했다.

그녀의 남편은 어린 딸아이를 안고 흐느끼고 있었고, 엄마는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를 붙잡고 있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대비하고 있던 자신의 죽음이건만, 역시 막상 이렇게 죽음이 다가오니 받아들이기 다들 힘든가 보다.

괜히 마음이 아려 와 다들 울지 말라 하려고 했으나 목소리를 낼 만큼의 힘이 제니퍼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제니퍼는 옅은 숨을 내뱉으며 엄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엄마 말 안 들은 건 미안해. 근데 나, 하나도 후회 안 해.

“가지 마, 여보. 제발 날 떠나지 마.”

그 누구보다 서글픈 울음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제니퍼가 평생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끅끅 울고 있었다.

당신을 많이 사랑했어.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해.

속으로 말을 건넨 제니퍼는 마지막으로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의 옷깃을 잡은 어린 딸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울먹이고 있었다. 그동안 미련을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물기 어린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행복하렴.”

점점 숨이 가빠지기 시작해 겨우 마지막 말을 건넨 제니퍼는 서둘러 딸에게서 시선을 뗐다.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다.

제니퍼는 지난 6년간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잘난 연인 덕에 자작 부인도 해 보고, 남편과 자신을 반반씩 닮은 예쁜 딸도 낳고.

비록 소설 속 이야기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결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래서 제니퍼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하아아.”

나는 허공에 퍼지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끌어올려 입가를 가렸다.

할머니의 집이 있는 마을을 나와 숲길을 걷고 있던 참이었다.

엄청난 사실을 들은 참이었지만 딱히 심경에 변화가 일지는 않았다. 내게 출생의 비밀이라는 게 있었다니 조금 놀랐지만 그뿐이다.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듯 이 책에 깃든 예언은 이미 지나간 후였고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편안하고 멀쩡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아무래도 안 멀쩡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 그러니까 케이트 네가 예언자의 후손이고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옆에서 걷고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너무 거창하게 들리네요.”

내 말이 들리기는 하는 건지, 글로리아 선배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이, 이게 무슨…… 그 옛날 소설이 워낙 안 유명했으니 블레어라는 성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이런 설정이 있었을 줄은…….”

“설정이라뇨, 소설도 아니고.”

해석이 불가능한 암호 같은 말들 사이에서 겨우 들린 한마디. 그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트집을 잡았다. 그뿐이었는데.

“소설 맞잖아.”

“?”

아, 그렇지. 선배 입장에서야 그렇긴 하겠지만. 그런 느낌이 아닌데?

그 말에 당황한 내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사이 글로리아 선배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선배의 팔을 잡고 샛길로 이끌었다.

“잠깐 걸을까요?”

“……? 그래.”

선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순순히 내게 끌려와 주었다.

어제 밤새 눈이 내린 탓에 눈이 쌓인 길 위는 아무도 밟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이거 말을 뭐 어떻게 꺼내야 하나.

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냥 질러보기로 결심했다.

“선배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 내가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푸른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게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이, 아까부터 좀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어요? 예언서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뭘 그렇게까지 놀라요. 아니, 그보다 당사자인 저는 멀쩡한데 왜 선배가 그러세요.”

“이익…….”

글로리아 선배가 억울한 듯 침음을 흘렸다.

“너무 태연한 네가 이상한 거야.”

“제가 뭘요. 빨리 말씀이나 해 봐요. 생판 남인 제 가정사에 왜 그렇게 기절초풍을 했어요?”

“와, 우리가 생판 남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서운하다. 그것도 그렇고 말씀이나 해 보라니, 그게 존댓말이야 반말이야?”

“아, 논점 흐리지 말고요!”

또 평소처럼 가벼운 말이나 하면서 빠져나가려고 하고.

내가 빽 소리치곤 숨을 색색 내쉬자 선배는 내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날카롭게 물었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실 건가요, 루피너스 선배님.”

“악! 그렇게 거리 두지 말라니까!”

반사적으로 외친 글로리아 선배가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나는…….”

“네에.”

“나는…… 나는!”

선배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짓씹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누가 뭐래도 여긴 내가 전생에 읽은 소설 속이니까.”

정처 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아니라니까……, 이상해.”

선배가 신발을 눈밭에 문지르자 밑창 모양대로 자국이 생겼다. 이내 덤덤하지만 어쩐지 불안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내 예전의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야.”

“그렇군요.”

알아듣기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대충 알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잠시 망설이던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얼마 전부터 꿈을 꿔. 예전에도 꾸던 꿈인데 요즘 들어서 더 심해진 것 같아.”

“네? 무슨 꿈인데요.”

“그냥…… 별 내용은 없어. 그냥 일상을 보내는 꿈이야.”

내가 추궁하자 글로리아 선배는 뜸을 들이듯 침묵하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원래의 내 집, 내 방에서 시끄러운 스마트폰 알람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옷을 꿰입은 다음 비척비척 집을 나서는, 평범했던 원래의 일상을.”

거기까지 말한 선배가 눈치를 보듯 나를 힐끔거리자 나는 작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계속 말씀하세요.”

“꿈꾸는 도중에는 이게 꿈이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데 잠에서 깨서 다시 눈을 뜨고 나면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내가 정말 꿈을 꾼 건가 싶기도 하고.”

글로리아 선배는 어색한 손길로 털모자 사이로 흘러나온 백금발을 정리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그런 꿈이 이어지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느 쪽이 꿈이지?

선배는 덤덤하게 말을 마쳤고, 나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생각보다 조금 심각한 일이었다. 이걸 전부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선배가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그맣게 앓는 소리를 냈다.

“선배가 뜬금없이 이상한 말 하던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뭘, 내가 미쳤다는 걸?”

“예에? 아니요, 선배 왜 이렇게 꼬이셨어요.”

글로리아 선배가 툭 던진 한마디에 나는 질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가 불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로리아 선배가 조금 토라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요컨대 예전의 삶이 그리우시다, 이거예요?”

꿈까지 꿨을 정도면 확실히 미련이 있다는 거겠지. 예전에 들었던 바로는 피살당했다 했으니 더욱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몸을 돌리곤 말했다.

“포기하세요, 선배. 어차피 선배는 여길 못 벗어나요.”

다시 죽지 않는 이상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차원 마법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어서 알고 있는데, 영혼 형태가 아닌 이상 차원을 넘나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조차 금기 마법인 데다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 선배는 죽어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리고 나는 선배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와, 집착 남주 같은 대사.”

나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거 봐, 또 자기만 알아듣는 소리. 이제 이런 것도 그냥 넘기면 안 되겠어.

나는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아까부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걸 보니 나한테 조금 삐진 것 같은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정신 연령이 내 두 배라니 뭐니 하더니만 하는 행동은 그냥 애네, 애.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눈썹을 한껏 내려뜨린 다음 목소리까지 깐 채 입을 열었다.

“선배,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그렇죠?”

글로리아 선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가라앉아 있던 푸른 눈동자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나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이거구나.

나는 속으로 무릎을 탁 치곤 말을 이었다.

“이런 걸 말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글로리아 선배는 입가를 가렸던 목도리를 아래로 내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플로라가 들었으면 울면서 날 정신 병원에 보낼 테고 노아스는 옳다구나 하면서 정신 병원에 보내겠지.”

8년 소꿉친구의 신뢰도가 고작 이건가. 선배들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내 온 거예요.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차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아닌가? 먼저 종교 재판에 회부되려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글로리아 선배를 무시하려 애쓰며 나는 나대로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나처럼 예언서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같은 환생자가 아니라면 선배의 이야기는 헛소리 취급당할 게 뻔했다.

그런데 이런……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으윽, 아카데미 2년 다닌 거 다 쓸모없다. 친한 선배가 전생과 지금의 삶에 대해 고민할 때 도와주지도 못하고.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상담을 받아 보는 게 맞는 일인 것 같은데, 문제는 글로리아 선배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허무맹랑해서 미친 사람 취급받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리고 선배의 신분이며 지위에 해가 갈 수도 있고. 듣자 하니 루피너스 후작은 굉장히 무자비하고 냉철한 사람이라던데.

“……!”

아윽,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마음을 다잡았다.

자, 진정하고 내가 지금 선배한테 해 줄 수 있는 걸 찾아보자.

우선 입장을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자. 상담 수업에서도 입장 전환이 가장 먼저라고 했어.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죽은 다음 기억을 간직한 채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래서 가치관이고 상식이고 배경이고 전부 다른 곳에서 낯선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턱을 쥐었던 손을 내리고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그럼 선배 지금 엄청나게 불안정한 거 아냐? 크, 큰일 났다. 이거 어쩐담.

“케이트, 뭐 해.”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내 원맨쇼를 지켜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내 눈앞에 대고 손바닥을 휘적대고 있었다.

그에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내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선배, 저희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여기 춥잖아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나는 모자를 고쳐 쓰며 장갑 낀 손으로 선배의 차가운 손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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