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10)

* * *

제니퍼는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디안과 내일도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불을 발로 뻥뻥 차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던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돌아누웠다.

엄청 잘생긴 남자애랑 만나서 말까지 텄다는 사실부터 그 책과 엮인 신비로운 이야기까지, 자신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제니퍼는 애석하게도 친구가 없었다. 집은 시내에서 아주 멀리 있었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사실 제니퍼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를 조금 무서워했다. 엄마는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했다. 그러다 보니 제니퍼는 자연히 엄마 앞에서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빠가 살아 있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몇 년 전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더 우울하고 예민해진 엄마는 제니퍼가 책에 대해 말해도 안 믿을 게 뻔했다. 그리고 안 그래도 일로 바쁜 엄마에게 어쩌면 하나뿐인 딸이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거리를 더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날마다 숲에서 외간 남자애를 만난다는 걸 알면 엄마는 말 그대로 불을 뿜을 것이고, 그럼 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더 이상 이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조금 아쉬웠다.

엄마한테 이걸 말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제니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은 엄마한테 비밀로 하자.

* * *

그날 이후로도 둘은 자주 만났다. 거의 매일 만난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결혼 적령기를 앞둔 남녀가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만 둘 중 그 누구도 이 관계를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쩐지 애매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이게 뭐예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디안이 약초 바구니 옆에 놓여 있는 종이 뭉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악!”

망할, 약초학 책들 사이에 저게 끼어 있었을 줄은!

제니퍼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종이 뭉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종이들을 회수하기엔 이미 늦어 버린 데다 디안은 곱상하게 생긴 주제에 키가 컸다.

“잠깐만요, 아주 조금만 볼게요.”

“돌려줘!”

그렇게 소리쳐 봤지만 디안은 종이 뭉치에 쓰인 글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고, 결국 제니퍼는 종이 뭉치를 돌려받는 것을 포기하고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 이거 소설이었어요?”

“그래, 난 글 쓰는 걸 좋아해. 그건 내가 써 본 소설이고, 자, 계속 놀릴 거야?”

“아니요.”

종이 뭉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디안이 조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말 재미있어요. 괜찮다면 조금만 더 읽어 봐도 될까요?”

“……정말? 재미있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디안이 다시 소설에 열중하는 사이, 제니퍼는 괜히 부끄러워져 헛기침을 하며 그의 곁에 기웃거렸다.

“제니퍼.”

“으, 응?”

되게 빨리 읽네.

제니퍼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디안을 바라보았다.

“이게 끝인가요? 다음은 없어요?”

디안은 제니퍼를 추궁하듯 성난 듯 종이 뭉치를 들고 흔들었다.

“으, 응……. 아직 못 썼어.”

“말도 안 돼. 작가가 되어 보는 건 어때요?”

제니퍼는 신이 나서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겨우 제지하며 치맛자락을 정리하곤 바닥에 털썩 쪼그려 앉았다.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엄마가 기절할걸.”

순식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디안은 금방 두 손을 내리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엄마는 존경받는 약사야. 하지만 나는 약사가 되고 싶지 않아.”

약초학은 재미없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약초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

제니퍼는 턱을 괸 채 우울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눈 염증에 좋은 약초가 있거든? 그걸 달일 때 나는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알아?”

“잘…… 모르겠네요.”

“그렇겠지. 어쨌든 난 약사가 되기 싫어. ……네가 말했던 것처럼 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한테 이렇게 말하면 뒷목을 잡고 넘어가겠지.

짧게 상상을 한 제니퍼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디안 너는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다른 하고 싶은 거 없고? 넌 가주직을 물려받고 싶은 거야?”

“나는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가주직을 물려받아야죠.”

디안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버님은 워낙 엄격한 분이라 혼날 때면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전부 저를 위한 말씀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영주가 엄격한 사람인가 보구나. 귀족의 삶이란 것도 마냥 편한 건 아닌가 보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제니퍼에게 디안이 말을 이었다.

“제니퍼의 어머니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요? 자식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당연한 거니까요.”

모든 부모님들이 하고 계시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디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바람에 헝클어진 제 금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귀족이라 그런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맞는 말만 하는데 좀 재수 없네.

제니퍼가 턱을 괴고 입술을 삐죽거리는데, 디안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니퍼의 글은 정말 좋아해요.”

디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읽어 본 책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어요. 제니퍼는 약사보다는 작가가 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도련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다.”

아마 자신보다 배로 많은 책을 읽어 왔을 텐데.

기분 좋게 키득거리던 제니퍼는 아까부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외전 - 제니퍼 이엔 (3)

“왜, 왜 그렇게 봐. 민망하게.”

디안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줄을 모르자, 제니퍼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괜히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번에 돌아온 것은 언제나처럼 유순한 대답이 아니었다.

“제니퍼는…… 모르나요? 왜 내가 매일매일 여기로 나와서 제니퍼와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손을 잡는지.”

갈색 눈동자는 드물게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제니퍼는 디안과 자신의 관계가 더 이상 단순한 친구가 아니게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제니퍼는 부끄러움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조금 위로 드니 금발 머리에 녹음이 드리워 얼룩덜룩해진 것이 보였다.

“좋아해요.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제니퍼는 시선을 내려 디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게 큰 것을 증명하듯 하얗던 얼굴이 지금은 마치 딸기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덕분에 방금 그가 한 고백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딸꾹.

제니퍼는 딸꾹질을 하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자신도 디안 못지않게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대답을 듣고 싶어요.”

디안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니퍼는요?”

네가 싫을 리 없잖아. 넌 끝내주게 잘생긴 데다 다정하고, 또 처음으로 내 꿈을 응원해 준 사람인걸.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제니퍼가 고함을 지르듯 대답했다.

“나,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무로 가득한 숲에 제니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안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왔다.

양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제니퍼는 얼굴이 터져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 계단을 올라 침대에 눕기까지, 제니퍼는 연신 몽롱한 기분이었다.

아까 전부터 현실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디안이랑 사귀기로 했다. 그 잘생긴 애랑 자신이 연인이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니퍼는 행복에 젖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를 굴렀다.

“흐으으으으.”

디안은 영주의 아들이니 결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너무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 같아 민망해하던 제니퍼는 헛기침을 하며 합리화를 시작했다.

으음, 그 책에서는 내가 디안과 결혼을 하게 된다고 되어 있던데. 아, 그러고 보니 완전히 그 책의 내용대로 되어 가고 있네.

제니퍼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근처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색과 디자인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며 설렁설렁 읽어 내리던 제니퍼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결말까지 가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죽나? 여주인공의 결말대로?

“으윽.”

제니퍼는 순간 소름이 쫙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그 책의 내용과 달라진 것도 많아.

처음 몇 번의 만남만 책의 내용과 비슷할 뿐 그 후의 일들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크게 아파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녀였다. 갑자기 병에 걸리긴 왜 걸리겠는가? 그 책에 나온 것처럼 병에 걸려 죽지 않기 위해 건강 관리도 하려고 엄마 몰래 약초 몇 개를 훔쳐 먹기도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디안과 결…… 결혼하게 된다고 해도 꼭 죽는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이 왜 이깟 불길한 책 하나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결혼이라니.’

어느새 미래에 대한 걱정은 치워 두고 들뜬 마음으로 현실성 없는 망상이나 하고 있는데, 문득 협탁에 놓인 녹색 표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죽는다고 쓰여 있는 불길한 책이다. 마음 같아서는 확 갖다 버리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늘 침대 옆 협탁으로 되돌아오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역시 이상하고 불길한 책답다.

제니퍼는 짜증이 어린 손길로 책을 방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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