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10)

* * *

책방에 들러 산처럼 쌓인 책 더미 속에 책을 돌려놓은 제니퍼는 어김없이 약초를 캐러 숲으로 향했다. 모처럼 찾은 재미있는 책인데,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약초학 책이 아닌 소설을 몰래 가져왔다는 걸 엄마에게 들키면 크게 혼이 날 것이다.

“하아암.”

어제 책을 읽느라 밤을 샜더니 해가 중천에 뜬 지금도 졸려서 죽을 것 같았다.

흙이 묻으면 안 되니 치맛자락을 걷고 쪼그려 앉으려고 하는데, 수풀 쪽에서 노란색 털을 가진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악!”

설마 산짐승? 그럴 리가, 여긴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들도 잘 오지 않는다고 엄마가 가르쳐 줬는데.

우렁찬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선 제니퍼는 바구니를 든 손에 힘을 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여차하면 그걸 무기로 쓰려는 생각으로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순간,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제가 놀라게 해 드렸나요?”

수풀 너머로 열여섯쯤 되었을까 싶은 앳된 외모의 소년이 보였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제니퍼는 입을 딱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년은 활을 든 손을 내리고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일행과 떨어졌다가 그만 길을 잃어서…….”

“아…….”

어라, 이거 어디서 한번 본 것 같은 상황 아닌가?

아. 두 눈을 껌뻑거리던 제니퍼는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어제 그 책. 그 책에서 나온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첫 만남과 똑같다. 약사의 딸인 여주인공이 약초를 캐러 갔다가 영주의 아들인 남주인공을 만나서…….

제니퍼가 땅에 못 박힌 듯 서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아까부터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소년이 잔뜩 붉어진 귀를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실례합니다. 사냥을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제니퍼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소년의 옷차림을 훑었다.

꽃물이 든 것처럼 노란색을 띤 머리카락, 헤이즐넛 색의 눈동자,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하얀 피부.

어제 읽었던 그 책 속 남주인공의 인상착의와 완전히 똑같았다. 게다가 외모부터 옷차림까지 귀티가 좔좔 흐르는 것이 예사 신분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 책. 그 책의 내용과 완전히 똑같잖아.

“이, 이게 뭐야!!!”

제니퍼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그렇게 소리치자 소년은 깜짝 놀라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런 소년을 일으켜 세워 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는 들고 있던 약초 바구니를 땅에 떨어뜨리곤 그대로 집으로 도망쳐 왔다.

집 문을 열어젖히곤 2층을 향해 나무로 된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침대에 몸을 뉘인 제니퍼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 소년을 마주친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사고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아, 이거 혹시 꿈인가. 그런 건가.

제니퍼는 멍한 표정으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뒤척였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켰다.

“……어?”

분명 책방에 돌려놓았던 책이 침실 협탁 위에 돌아와 있었다.

* * *

“……꿈이 아니구나.”

얼떨떨한 기분이 된 제니퍼는 멍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분명 서점에 되돌려 놓았는데 다시 자신의 협탁 위에 있는 걸 보아 일단 이 책이 보통 책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아, 모르겠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이상한 책 생각까지 하려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시 침대에 엎어진 제니퍼는 베개를 끌어안고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 남자애, 잘생겼었지.

……거기 다시 가 볼까?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오늘 약초를 하나도 캐지 못했으니, 엄마가 약초가 필요하다고 찾기 전에 내일 다시 가서 캐 와야 한다.

제니퍼는 몇 시간 전 봤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가 보자.’

* * *

다음 날 제니퍼는 어김없이 서점에 들러 다시 책을 되돌려 놓았다. 이번에도 다시 되돌아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봐야지. 일단 지금은 잘생긴 사람을 보러 간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제니퍼는 힘찬 걸음으로 숲을 향해 걸어갔다.

“!”

수풀 옆에는 정말로 어제의 그 소년이 꽃을 들고 서 있었다. 노란 머리카락이 들고 있는 꽃 색깔과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본 제니퍼는 반가우면서도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제니퍼를 본 소년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오셨군요. 어제보다 늦었네요? 안 오시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자신이 어제 떨궈 놓고 갔던 바구니를 내밀며 소년이 웃었다.

제니퍼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걸 받아 들며 물었다.

“……왜 또 여기에 계세요?”

“제가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해서요. 또 겸사겸사 바구니도 돌려드릴 겸.”

소년은 그렇게 말하곤 순하게 웃었다.

역시 잘생겼다. 제니퍼는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어젠 미안했어요. 길은 잘 찾아갔어요?”

문득 어제 소년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쳐 버린 일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네, 조금 걷다 보니 일행을 만났답니다.”

소년은 웃는 얼굴로 제니퍼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고, 그게 왠지 부담스러웠던 그녀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말 놔도 돼요. 그쪽, 귀족이잖아요?”

“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소년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더듬었다.

너무나도 순진한 반응에 제니퍼는 웃음을 픽 흘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책 속의 남주인공은 영주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냥 한번 질러 본 건데 정말 맞았다.

책에서 읽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제니퍼는 소년의 옷차림을 가리켰다.

“평민은 그런 옷 안 입어요.”

“아…….”

소년은 무안한 표정으로 고급스러운 원단의 승마복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고개를 홱 들어 간절한 표정으로 제니퍼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저기, 부디 비밀로 해 주시겠어요? 몰래 나온 거라 들키면 아버지께 엄청 혼나거든요.”

“그쪽 이름 알려 주면요.”

제니퍼가 짤막하게 말하자 소년은 수줍은 얼굴로 노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 전…… 디안 블레어라고 해요.”

외전 - 제니퍼 이엔 (2)

“편하게 대해 주세요. 격식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렇구나.”

디안이 쑥스럽게 덧붙인 말에 제니퍼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침착함을 가장했다.

맙소사, 그 소설 남주인공과 똑같아. 진짜 영주 아들이었어.

그럼 그 책은 대체 뭐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는 제니퍼에게 디안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아가씨의 이름은요?”

세상에, 아가씨래.

제니퍼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니퍼 이엔이요.”

“그렇군요. 예쁜 이름이네요.”

디안이 두 눈을 깜빡거리며 웃자, 제니퍼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러운 거지만 정말 잘생겼다.

남자라고는 시내에 갈 때마다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리던 남자애들이나 농부 아저씨들밖에 본 적 없었다. 고로 이렇게 잘생긴 남자애는 생전 처음 보았다.

“바구니도 돌려주셨으니 이제 가실 건가요?”

제니퍼가 짐짓 무뚝뚝한 투로 묻자 디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갔으면 좋겠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역시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제니퍼는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쪼그려 앉아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그걸 신기하게 바라보던 디안이 제니퍼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약초를 캐는 거예요?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날 거예요.”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제니퍼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더듬거렸지만, 디안은 이미 팔을 걷어붙인 후였다.

……왜 이래? 영주 아들이라면서 할 일이 그렇게 없나?

그녀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약초를 정리하는 사이, 디안이 신이 난 표정으로 저 구석에서 뜯어 온 풀을 내밀었다.

“이거, 이거 맞죠?”

흙이 조금 묻은 하얀 손에 들린 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제니퍼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잡초.”

시무룩한 표정의 디안이 손을 내리고 잡초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약초는 아닌 것 같지만 잘생긴 사람이 뽑은 거라서 효험은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캘 건 이렇게 생겼어요. 잎 모양이 삼각형이고 줄기는 가늘어요.”

제니퍼는 약초를 쥐고 웃음을 참으며 설명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디안이 다시 풀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디안은 몇 번이나 잡초나 다른 풀을 가지고 와서 이게 맞느냐고 내밀었다.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아무리 상대가 잘생겼다고 해도 제니퍼로서는 살짝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디안이 다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제니퍼는 약간의 짜증이 어린 동작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 그거 아니라니까…….”

뜻밖에도 그런 제니퍼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약초와 닮은 잡초가 아닌 만발한 데이지 꽃이었다.

“예쁘죠?”

줄게요.

디안이 활짝 웃으며 제니퍼의 갈색 머리에 꽃을 꽂아 주었다.

“!”

제니퍼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세상에, 사람 마음 술렁거리게 왜 저런데.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무시한 제니퍼가 화제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쪽은 몇 살이에요?”

질문을 해도 꼭 이런 질문을 하냐. 뻔해서 도리어 이상해.

민망해진 제니퍼가 자책하고 있는 사이, 디안이 흔쾌히 대답했다.

“열일곱 살이요.”

“아, 난 열여덟.”

제니퍼가 얼떨결에 알려 주자 디안이 미소 띤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제니퍼가 저보다 누나네요. 그럼 말 놔도 괜찮아요.”

평민이 귀족에게 반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디안이 그렇게 말하니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그래, 내가 언제 영주 아드님께 반말을 해 보겠어.

제니퍼는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디, 디안.”

제길, 헛기침을 했는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망함에 입술을 꾹 깨무는데 디안이 자신을 향해 아주 활짝 웃었다. 등 뒤에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제니퍼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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