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여긴……, 여긴 어쩐 일로 왔니.”
선배와 나를 집 안에 들인 할머니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나는 그에 대답하려 입을 열며 할머니께 다가갔다. 그러자 할머니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셨다.
“……미안하다. 아직은 너를 보는 게 조금 힘들구나. 네 눈이…… 네 엄마를 너무 닮아서.”
“…….”
보다시피 내가 할머니와 사이가 그다지 살갑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엄마 때문이었다.
눈을 빼면 전부 아빠를 더 많이 닮았는데, 오직 눈 하나만으로도 할머니는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장갑을 낀 손에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돌아가신 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그럴 리가 없잖니.”
할머니는 놀란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하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할머니가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차라도 한잔 내오마.”
그렇게 주방으로 걸음을 돌리시던 할머니가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글로리아 선배에게 손짓했다.
“아가씨도 여기 앉으세요.”
“아, 네, 네.”
선배는 무척이나 어색한 동작으로 걸어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우리 집 가정사 나오는 걸 듣고 모른 척하려고 노력 중이던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슬쩍 웃어 보였고 선배는 안심한 표정으로 잔뜩 긴장해 있던 몸에 힘을 풀었다.
곧 할머니가 따뜻한 차 세 잔을 가지고 오셨고 테이블에는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엄마의 책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려면 예언서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야 했다.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적어도 미쳤냐는 소리는 안 하시지 않을까. 설령 미친 취급을 하시더라도 말도 별로 안 섞는 지금과 딱히 달라질 것도 없어 보였다.
잠시 속으로 생각하던 나는 글로리아 선배와 눈짓을 주고받은 후 가방에서 붉은색 표지의 책과 엄마의 소설을 꺼냈다.
“할머니, 사실 오늘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 엄마가 쓴 소설에 대해 물어보려고요.”
나는 할머니께 예언서를 건네드리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뭐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제가 지난 학기에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는데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 책이 미래를 알려 주는 것 같아요.”
내가 겨우 말을 꺼내자 글로리아 선배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케이트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증드려요.”
할머니는 책을 펼치고 내용을 훑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무척이나 태연하고 평안한 동작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렇군……. 네 엄마에 이어서 너에게도 책이 나타났구나. 두 세대 연속으로 책이 나오다니 별일이야.”
“……네?”
“아차, 넌 아직 모르는구나. 이제는…… 너도 알 때가 되었지.”
할머니는 책의 찢어진 부분을 보더니 흠칫하며 책을 덮으셨다.
“……귀퉁이가 찢어진 걸 보니 이미 지나간 예언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두 눈을 좁힌 채 중얼거리셨다.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데?”
그게 꼭 내가 불행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려 조금 울컥했지만 나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는 책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두 눈을 깜빡이셨다.
“아, 그래. 이건 예언서가 맞아.”
“네? 그게 보이세요?”
내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할머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뭐라 말을 꺼내시려다 말고 글로리아 선배를 힐끗거리셨다.
“케이틀린은 그렇다 쳐도 아가씨는…….”
“선배는 괜찮아요, 할머니. 제가 보증해요.”
“그렇다면야……. 조금만 피우마.”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힘드신 것 같았다. 주머니를 뒤져 궐련을 꺼내 입에 무시는 걸 보니 말이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할 겸 서둘러 운을 띄웠다.
“역시 예언서에 대해 알고 계시는 거죠? 예언서는 오래전에 다 사라진 것 아닌가요?”
“예언서는 사라지지 않았어. 예언서를 볼 수 있는 자들이 사라진 것뿐이지.”
할머니는 입에 물고 있던 궐련에 불을 붙이셨다.
우리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인 걸 보니 다른 영지에 가셨을 때 사 오신 것 같았다.
“오래전 예언자라고 불리는 일족들이 있었지. 예언서를 볼 수 있는 힘은 피를 타고 내려와. 그래서 너도, 나도 이걸 볼 수 있는 거고.”
어두운 집 안에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음울한 표정의 할머니가 보였다.
“신전에서 구교와 신교와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예언자 일족은 구교 편에 섰고, 승리한 신교 세력에게 몰살당했지. 그리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다.”
“……그런데요?”
“그중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어린 예언자가 하나 있었어. 그 사람이 내 외가 쪽 조상이야.”
우, 우와.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데 할머니가 말을 이으셨다.
“예언서는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의 최악의 미래를 알려 준다는 걸 아느냐?”
내 최악의 미래가 고작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이는 거였다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참.
머쓱하게 머리를 긁던 나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몸을 굳혔다.
“잠깐, 그럼…….”
분명 두 세대에서 예언서가 나왔다고 했지. 그렇다고 하면 엄마에게도 예언서가 있었다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난 너희 엄마를 말렸어. 그 책에는 제니퍼가 결혼 후…… 병으로 죽는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할머니는 괴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이으셨다.
“하지만 그 애는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고작 책 따위에 내 평생의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다면서. 바보 같으니……. 결국 결혼은 막지 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니, 그때 어떻게든 말려야 했던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시는 할머니의 한숨에 궐련 연기가 섞여 나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내게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을 보내던 할머니는 이내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네가 태어나기 전 자기 예언서의 결말만 바꿔서 쓴 게 네가 들고 있는 그 소설이란다.”
손에 들고 있던 초록 표지의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할머니의 떨리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가 더 좋은 약사였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정해진 운명을 이기기에는 내 힘이 너무나 미미했던 탓이지.”
할머니는 우울한 표정으로 궐련을 입도 대지 않은 당신 앞 찻잔 안으로 던지셨다.
“운명을 바꿀 만큼 큰 개입이 없다면 예언은 틀리지 않아. 하지만 그런 일은 무척이나 드물지. 넌 여러모로…… 제니퍼보다 운이 좋았나 보구나.”
할머니는 씁쓸한 표정으로 마저 말씀하셨다.
개입.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글로리아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내 시선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의 가정사를 지나치게 깊게 알게 되어 불편한 표정이 아닌, 충격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선배의 눈앞에 손을 대고 흔들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어?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래도 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 나는 다 비운 찻잔을 식탁 한가운데로 밀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불편한 사람 앞에서, 그리고 낯선 장소에서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선배가 피곤한 것 같아서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차 잘 마셨어요, 할머니.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할머니께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주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또 올게요.”
집 안에 가득했던 궐련 연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으로 찻잔을 치우던 할머니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 흐리게 웃으셨다.
“……그래라.”
외전 - 제니퍼 이엔 (1)
수풀을 헤치고 나온 제니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구니를 고쳐 쥐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약초를 캐러 오는 이곳은 사람의 걸음이 거의 닿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올 때마다 아무도 없어서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저, 저기…….”
사슴 같은 갈색 눈망울의 소년이 넘어져 있었다. 제니퍼를 무슨 야생 동물 같은 걸로 착각했는지, 그는 활을 든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소년이 밟고 있는 곳에 그녀가 캐야 할 약초들이 뭉개져 있었다.
두 눈을 깜빡이던 제니퍼는 그렇게 물었다.
“누구야 너?”
* * *
제니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기껏 엄마 몰래 약초학 책들 사이에 껴 온 소설은 괜히 읽었다 싶을 만큼 이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작가의 이름도 제목도 없는 것만 빼면 분명 평범해 보이는 로맨스 소설인데, 책 속 배경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완전히 똑같았으며 여자 주인공의 이름과 외양은 자신과 전부 똑같았다. 그뿐인가? 성격, 가정 환경, 일과와 관심사까지 실제의 제니퍼 그대로였다.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 옮긴 것만 같은 생생함에 소름이 끼쳐 결국 아마도 남자 주인공일 사람과 만나는 대목에서 소설을 덮어 버렸다.
“……뭐 저런 책이 다 있어.”
꼭 자신에 대해 전부 아는 것처럼 서술하던 문장들을 떠올리니 소름 돋는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누가 날 스토킹하는 건가?
“……!”
제니퍼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대체 왜? 나는 그냥 시골 영지 평민 약사의 딸일 뿐인데. 특별히 아름답거나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시 가져다 두자.”
기껏 찾은 소설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저 책은 분명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저거 말고 다른 소설책이 들어온 거 있나 봐야겠다.
제니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돌리려는 그때였다.
그래서 그 잘생긴 남자애랑은 뭐 어떻게 된 거야. ……조, 조금만 더 읽어 볼까?
침을 꿀꺽 삼킨 제니퍼는 슬쩍 몸을 일으켜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분명 기분 나쁜 책인데 자꾸 손이 갔다. 꼭 책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 * *
결국 제니퍼는 밤을 새워 제법 두꺼운 그 책을 다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책을 완독한 것은 꽤 잘한 선택이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런 글을 써 보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여주인공은 자신과 너무나 똑같았지만, 남주인공을 만난 후부터의 전개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처음 읽었을 때처럼 소름이 돋거나 하지는 않았다. 숲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이 사실은 영주의 아들이었고 평민인 여주인공이 그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은 정말 로맨스 소설답게 비현실적이라 우습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남주인공이 실제로 존재하는 영주님의 아들이라니,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간 한번 크다.
피식 웃음을 흘린 제니퍼는 침대 위로 엎어져 이불을 팡팡 두드렸다.
“아니,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결말에서 여주인공이 죽느냐고!! 로맨스 소설에서 주인공이 죽는 게 말이나 돼?
그랬다.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결혼해 자작 부인이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얼마 후 병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남은 시간 동안 하루하루를 남편과의 추억을 쌓으려 노력하다 병이 악화되어 예정보다 일찍 죽고 마는 게 결말이었다.
새벽 감성에 취했는지, 이 어이없고 촌스러운 전개에 눈물까지 흘렸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창피함이 몰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랑 이름도 같은 여주인공이 죽는다니 조금 기분 나빴다. 누가 쓴 건지는 몰라도 음습한 놈. 글 잘 쓰는 음습한 놈.
제니퍼는 조금 빨개진 눈으로 협탁 위에 올려진 책을 노려보았다.
역시 저 책은 얼른 책방에 다시 돌려놓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