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온 경 말고도 다른 기사들이 하나씩 달려들었지만, 신들린 듯 목검을 휘두르는 선배 앞에 우리 가문의 기사들은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졌다.
아직 졸릴 텐데 어떻게 저러지.
옷 안으로 팔을 벅벅 긁으며 신기한 눈으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수십 번의 대련 후에도 멀쩡한 모습의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돌아보며 두 눈을 빛냈다.
“어때, 어때?”
그에 나는 고민하듯 턱을 쥐고 우물우물 대답했다.
“멋있긴 한데요……. 약간, 음. 저희 기사단을 싹 갈아치워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아가씨!”
바닥에 쓰러져 있던 기사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우성을 치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농담, 농담.”
기사들의 원망 어린 눈빛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는데, 가장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던 제온 경이 고개를 힘겹게 들고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글로리아 선배는 목검을 내려놓고 겉옷을 여미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야 뭐 한가하니까.”
한가한 게 아닐 텐데.
그런 그녀를 힐끗거리던 내가 물었다.
“선배, 숙제는요?”
“헉, 같이 할래? 나 좀 보여 주라.”
“선배, 저 2학년이에요.”
우리 숙제가 같을 리 없잖아요.
내 한심하다는 눈길을 받은 선배가 머쓱한 침음을 흘렸다.
“아.”
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내가 슬쩍 선배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속 대련해 줘도 괜찮은 거예요?”
이렇게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솔직히 글로리아 선배가 우리 기사들이랑 대련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닐 텐데.
“응, 그럼. 공짜로 먹고 자고 하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게다가 할머님께 여쭤 볼 것도 있고.
글로리아 선배가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아, 영지 전력 유출이라 신경 쓰이려나?”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럼 뭐, 대련해 줘도 되지?”
“흠.”
나는 연무장에 널브러진 채 은근히 내 눈치를 보는 기사들을 흘겼다. 사실 그냥 자기 맘대로 해도 되는데 굳이 내게 물어보는 걸 보니 글로리아 선배도 내 눈치를 조금 보는 것 같은데.
선배는 누구나 아는 이름난 실력자이니 같이 대련해 주면 우리 기사들도 실력 늘고 좋은 거지, 뭐. 그리고 당사자들이 저렇게 원하는데 여기서 거절하면 내가 어떻게 보이겠어.
내가 허락의 의미로 엄지를 들어 보이자, 연무장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 * *
그렇게 우리 저택에 머문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비로소 사용인들은 글로리아 선배를 다소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녀를 보면 추파를 던지듯 두 눈을 찡긋하며 대신 들어 주기도 했고, 대련을 하던 기사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다. 아빠도 말을 더듬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선배와 친밀해졌다. 참 대단한 친화력이다.
글로리아 선배 본인이 말하기를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고 했다. 사용인들이고 아빠고 안 하던 짓 하는 모습을 그만 보니 나도 좋은데, 이러다 개학하고 선배가 여기를 떠나면 다들 눈물이라도 줄줄 흘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좀 되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사용인 분들한테 뭐라 할 자격 없어, 알아?”
네가 나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라며 글로리아 선배가 혀를 쯧쯧 찼다.
나는 슬그머니 선배의 눈을 피했다.
하긴 내가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 아빠나 사용인들보다 더하긴 했지. 그 책에 나오는 게 전부 진짜라고 믿고 있던 때라, 그녀도 극악무도한 악당인 줄 알았었다.
“그래도 그땐 나름 이유가 있었다고요…….”
“응응, 그래그래.”
내 툴툴거림에 건성으로 대답한 선배가 투덜대며 펜을 빙빙 돌렸다.
“방학은 쉬라고 있는 건데, 왜 또 숙제를 내 주는 거야? 이해가 안 가.”
나와 같이 벽난로 앞에 앉아 숙제를 하던 선배가 인상을 팍 쓰고 펜을 내려놓자, 그 옆에서 얌전히 작문 숙제를 하고 있던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푸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너 너무 매정해.”
선배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팔짱을 꼈다. 저건 조금 많이 삐졌다는 표시이기에 나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정 하기 싫으시면 간식이라도 내오라고 할게요.”
“응응, 여기 커스터드 진짜 맛있어!”
선배가 그걸 먹으면 숙제 따위는 한 시간 만에 다 해치울 수 있다며 눈을 빛냈다.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기에, 나는 시녀를 불러 간단한 다과를 내오라 명령했다.
“코코아?”
“코코아!”
내가 넌지시 물은 말에 글로리아 선배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글로리아 선배가 온 첫날과는 다르게 편안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에이미에게 말했다.
“들었지? 코코아도 마시멜로 띄워서 두 잔 가져다줘.”
* * *
한편 엄마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늘 집을 비우신 채 이 영지 저 영지 옮겨 다니시다가 이맘때만 되면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글로리아 선배와 함께 엄마에 대해 물어보러 할머니를 찾아간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는 조금 어색한 사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거랑 이거도 챙기자.”
옷을 챙겨 입던 글로리아 선배가 내게 엄마의 소설책과 빨간색의 예언서를 던져 주었다. 날아오는 그것들을 받아 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가방에 그걸 넣었다.
“어디 나가려고?”
장갑에 코트, 목도리까지 챙겨 입은 나를 본 아빠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아빠, 지금쯤이면 할머니가 오셨겠지?”
“아, 그러고 보니 곧 네 엄마 기일이구나. 왜, 할머니 뵈러 가려고?”
아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이번 방학 땐 한번 뵐까 하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놀러 나가는 거야!”
나는 털 부츠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지금 아빠 없이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옆에서 미적거리며 옷에 팔을 꿰고 있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손짓했다.
“선배, 나가요!”
“으응. 다녀오겠습니다.”
글로리아 선배는 손에 장갑을 끼며 나를 따라 나섰다.
저택 문을 나온 나와 선배는 저택 뒤쪽으로 향했다. 깨끗한 눈밭을 자박자박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와, 눈이다.”
뽀드득 소리를 내가며 눈이 내린 곳을 밟던 선배에게 내가 장난삼아 물었다.
“뭐예요, 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카데미의 눈은 눈도 아닌가?”
“그거랑 이거랑 다르잖아. 아카데미랑 수도에서는 통행 때문에 눈이 내리자마자 치워 버리니까.”
하긴 선배, 시골은 처음이랬지. 동부에 있는 루피너스 영지는 항구도 많고 여러모로 발전한 곳이라 여기처럼 자연 그대로인 곳은 아닐 테니까.
하얀 눈밭을 향해 두 눈을 빛내던 선배가 말했다.
“어렸을 때는……, 그러니까 음, 엄청 옛날에는 눈이 오면 그 위에서 엄청 뛰어놀았는데. 눈싸움도 하고. 지금은 잘 기억 안 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전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눈이 있는데 지체 높은 후작 영애가 겅중겅중 눈밭에서 뛰어놀 수는 없는 일이니까. 뭐, 글로리아 선배라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으, 전생이라니, 생각만 했는데 막 오글거리고 어색하고 그러네. 선배는 어떻게 항상 말하고 다니는 거지?
“하실래요? 눈싸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던 내가 눈이 쌓인 평지를 가리키며 눈짓하자, 선배는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에 무슨 눈싸움이야.”
“저는 작년까지도 했는데요. 시녀들이랑.”
“내 정신 연령 말이야.”
스물이 넘어서 죽었으니 보기보다 많다며 글로리아 선배가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럼 선배는 거의 마흔인 건가? 우와, 되게 묘하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기에는 지금까지도 충분히 나잇값 못 하는 행동을 많이 하셨는데요.”
“와, 너무하네.”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던 글로리아 선배를 보며 쿡쿡 웃던 나는 다시 정색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눈밭을 따라 걷다 보니 얼음이 낀 호수가 나왔다.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와, 저기 호수가 얼었네. 스케이트도 탈 수 있나?”
“글쎄요, 수심이 깊어서 저기서 놀다가는 빠져 죽을걸요.”
“히익.”
글로리아 선배가 질색하며 호수에서 떨어져 걸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얼음이 워낙 두껍게 꽝꽝 얼어서 그럴 일은 없는데.
“이야, 진짜 풍경 예쁘다. 사진 찍고 싶다.”
선배가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 팔을 쫙 벌렸다. 나는 그 밑에 물이 투명하게 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저러다 우당탕 미끄러진다.
“선배, 거기 얼음 얼어 있어서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헉.”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작은 숲을 지나자 집 몇 개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여기야? 엄청 외진 곳이네.”
외딴 곳이라 낯설다고 느꼈는지 글로리아 선배가 내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네, 사람이 별로 없긴 해요.”
작은 농촌 마을이 여러 개 모여 있는 우리 영지에서도 여긴 유독 작은 마을이었다.
눈이 내려 온통 새하얀 주위를 몇 번 둘러본 나는 붉은 지붕이 얹힌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지난 1년간 비어 있던 내 외갓집이었다.
문가에 선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곤 장갑 낀 손으로 나무로 된 문을 두드렸다. 몇 초 후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너, 너는…….”
그녀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떠오르자,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오랜만에 뵈어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엄마는 늘 쾌활하고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있어서 자작저는 늘 웃음이 넘쳤고 행복했다.
나이가 조금 있는 저택의 사용인들은 누구나 엄마를 기억했고, 아빠는 책꽂이 하나를 전부 다 엄마의 책으로 다 채울 정도로 사랑했다. 전대 자작이었던 할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이었던 엄마와 결혼을 강행했으니 오죽할까.
나는 엄마를 저택 초상화 속 개구지게 웃는 얼굴로밖에 본 적 없지만, 가끔 그녀가 살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했다.
제니퍼 블레어, 우리 엄마는 약국집 딸이었다. 평민이었던 엄마는 귀족인 아빠를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졌고,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다.
하지만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행복은 내가 태어나고 엄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낳은 후 하루하루 병들어 갔지만 그 어떤 신관도 의사도 치료할 수 없었다. 아빠는 슬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정원 벤치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슬프고 맥 빠지는 이야기.
그게 전부였다. 내 부모님의 사연은. 그리고 아마 글로리아 선배가 전생에 봤다던 ‘예언서’도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소설과 글로리아 선배가 읽었을 책의 결말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엄마는 마지막 부분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했다.
결국, 실현된 엔딩은 조금 씁쓸하고 현실적인 예언서의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