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10)

아빠? 우리 아빠 말하는 건가?

하긴 우리 아빠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긴 하지. 주름도 적고 뱃살도 없고. 잘생겼다……는 건 잘 모르겠지만.

눈썹을 꿈틀거리며 옆을 힐끔거리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두 손을 모으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랑 닮으셨어. 역시 소설 남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미소년이 자라서 미중년이 되는 법이지, 암.

무어라 중얼거린 글로리아 선배는 나를 따라 저택 문으로 척척 걸어가더니 고개를 숙여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참 미남이십니다. 케이트가 참 예쁘더니만 다 아버님을 닮은 거였군요.”

“예? 아하하.”

“소개가 늦었습니다. 여기서 신세를 지게 된 글로리아 루피너스라고 합니다.”

“아, 딸애한테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디안 블레어입니다.”

아빠가 무척 어색하게 악수를 나누고 있는 선배의 옆을 낑낑거리며 비집고 나온 내가 힘겹게 말했다.

“아빠, 나도 있어…….”

“오, 우리 딸!”

아빠가 눈을 반짝이며 내 옆구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단숨에 시야가 바뀌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내려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빠, 허리!”

이러다 허리 다쳐.

내가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아빠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놓았다.

“수석 했다면서? 어쩜 너무 잘했어!”

아빠가 내 얼굴을 제 뺨에 비벼 대며 칭찬했다.

아빠가 수염을 안 길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아빠를 밀어내는데, 내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작게 재채기를 했다.

“아, 추우신가 보군요. 제가 이런 실례를. 어서 들어가시죠.”

아빠가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저택 문을 열었다.

“북부만큼은 아니지만 남부의 겨울도 제법 춥지요. 오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역시 마차를 두 대 보낼걸 그랬나요?”

“아, 아닙니다. 그것보다 저는 그냥 케이트의 학교 선배일 뿐이니 부디 말씀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다른 귀족을 존댓말로 대하는 글로리아 선배는 처음 보았다. 아빠를 대하는 몸짓도 말투도, 표정 하나까지도 전부 우아하고 정중해서 꼭 우리 아빠가 황제라도 되는 것 같았다. 교복을 제대로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고, 꼭 오늘만 사는 것처럼 굴던 사람이 이렇게 변하니 조금 어색했다.

“그, 그럴 수는 없지요. 후작가의 자제분이신데…….”

아빠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역시 아직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저랬지. 지금은 뭐…….

아빠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식은땀이 날 정도면, 정말 긴장한 것 같았다.

뭐야, 그 정도까지야?

계단을 오르며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는데 아빠가 계단 끝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추하지만 부디 편하게 있다 가십시오.”

“!”

나는 열을 맞춰 서 있는 사용인들이며 먼지 한 톨 없는 복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지난 방학에 마탑에서 방문했을 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것 같았다.

“거, 거, 겉옷 이쪽으로 주십시오.”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에이미가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선배가 겉옷을 건네주자 받아 들던 에이미는 그걸 놓쳐 버렸다.

원래는 저런 실수는 안 하는 야무진 애인데, 오늘따라 긴장한 모양이네.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주워 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글로리아 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목숨만은…….”

“아니…….”

에이미가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자 글로리아 선배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만 방에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들 왜 저래? 마탑에서 왔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거의 패닉 상태로 떨고 있는 에이미 대신 다른 시녀가 나와 역시 잔뜩 굳은 동작으로 선배를 안내했다.

글로리아 선배는 얼굴 가득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어영부영 시녀를 따라갔다.

선배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머지 사용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아빠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벽에 기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그 기묘한 광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 * *

“어휴, 아가씨. 심장 떨어질 뻔했어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리는 리타를 내가 흘겼다.

“그러게 왜 긴장을 하고 그래.”

“지금 긴장 안 하게 생겼어요? 어휴…….”

리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내 짐을 정리했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그걸 빤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 나랑 선배가 친하다는 걸 알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겠지.

“있잖아, 리타. 나 글로리아 선배랑 엄청 친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가요? 에이, 그래도 성심껏 모셔야죠.”

나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왜 다들 그렇게 긴장해? 마탑에서 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아이, 아가씨. 마탑은 마탑이고 지금 오신 분은 소후작이시잖아요. 그 루피너스 가문이요!”

동부의 지배자니 최고의 문벌 가문이니 온갖 이명들을 늘어놓던 리타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혹시나 실례를 저지르면 주인님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에이, 선배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보장해.”

“음…….”

“어쨌든 긴장하지 말라고 전해.”

찜찜하다는 듯한 리타의 표정을 보아 그냥 말하면 듣지 않을 것 같아 한마디 더 덧붙였다.

“계속 그러면 선배는 더 불편해해.”

“헉.”

마지막 말에 리타가 기겁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의자에 앉은 채 손톱을 만지작거리는데, 리타가 유난히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참. 아가씨. 연인이 생기셨다면서요?”

짐을 다 정리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나는 체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질문 세례가 쏟아질 것이다.

* * *

시간이 워낙 늦었는지라 첫날은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유리엘 영식이면 그때 그 참하게 생기신 분 아니냐, 언제부터 그랬냐,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냐, 누가 먼저 고백했냐.

거의 한 시간 동안 질문을 퍼붓는 리타에게 기를 잔뜩 빨린 탓에 머리를 뉘자마자 잠이 들었다.

“하암…….”

느지막하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나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인사를 건넸다.

“케이트, 일어났어?”

아직 빗지 않았는지 흐트러진 백금색 머리를 하고 실내복에 얇은 겉옷만 걸친 선배의 모습은 조금 어색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인데도 완벽해 보이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나는 괜히 머리카락을 매만지곤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피곤했는지 완전 잘 잤어.”

글로리아 선배가 작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도 깰 겸 산책 좀 하실래요?”

내가 바깥을 가리키며 말하자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나가자.”

겨울 아침은 제법 쌀쌀했지만 참을 만했다. 찬바람에 남아 있던 졸음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아 오히려 좋았다.

작게 하품을 하며 옷깃을 여미는데, 연무장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 훈련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가문의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거기서 뭐 하냐는 눈짓을 보냈지만 제온 경은 그걸 보지 못했다. 그와 기사들의 시선은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있었다.

뭐야, 반했나?

설마 하는 생각에 눈썹을 꿈틀거리는데 제온 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루피너스 영……애님.”

글로리아 선배에게 말을 건 제온 경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대, 대련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아, 그런 거였구나.

글로리아 선배는 유명인이었다. 후작가의 영애라는 호칭보다는 소드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아마 검을 다루는 기사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겠지.

선배의 푸른 눈이 고요하게 깜빡이자 제온 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요, 마침 추운데 잘 됐습니다. 한 달이나 신세지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글로리아 선배는 픽 웃으며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몇 초 후 춥다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다시 가져다 입긴 했지만.

공손한 동작으로 선배에게 목검을 건넨 제온 경이 그녀의 실내복 드레스 차림을 보며 말했다.

“그, 옷은 갈아입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뇨, 괜찮을 것 같은데.”

글로리아 선배는 씩 웃으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자 기사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오오.”

“케이트, 케이트. 나 잘 봐, 알았지?”

저만치서 글로리아 선배가 팔을 붕붕 휘두르자, 나는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간 후 제온 경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여유로운 표정의 글로리아 선배에 인해 그의 목검이 연무장 구석으로 날아갔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아간 목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엄청 어릴 적이었지만 조금이나마 검술을 배워 본 적이 있어서인가,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힘이 실린 동작이었다. 선배는 여자니까 힘보다는 기술로 상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힘이 남자보다 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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