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10)

* * *

“별일이네, 네가 수업 시간에 침까지 흘리면서 자다니.”

“시끄러워.”

영상구가 있어야 했는데, 깐족거리는 도라에게 나는 한껏 눈을 부라렸다.

“주말 내내 나가 있더니 피곤했어? 세상모르고 자던데.”

“응……. 죽겠다, 지금. 좀 자야 하는데.”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뻑뻑한 눈을 비비는데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도라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네 선배. 아까부터 손 흔들고 있던데, 넌 보지도 않았지?”

“엥?”

도라가 그쪽을 가리키며 키득거리자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긴 은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노아 선배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밝은 표정을 지은 나는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안녕, 잘 다녀왔어?”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썹을 내려뜨렸다.

“피곤하지는 않아? 어제 내내 눈 와서 걱정했어.”

“흐엉.”

역시 선배밖에 없어. 다들 눈 왔다고 신나 하기만 하던데.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노아 선배를 끌어안았다.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선배가 어린애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로 물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내가 글로리아 혼내 줄까?”

“혼낸다는 뜻이 뭔지 몰라서 좀 무섭네요…….”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걸.

나는 선배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웅얼거렸다. 셔츠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아뇨, 전 괜찮아요.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래요.”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던 도라가 남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며 혼자 걸어가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숨 가득 그리운 향기를 들이마셨다.

“주말에 뭐 했어요?”

쓰읍, 하아.

재스민 향을 만족스러울 만큼 들이마신 내가 물었다. 선배가 머뭇거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없어서 심심했어.”

“으아아.”

왜 이제야 왔냐는 듯 서운한 표정, 거기다 평소보다 아주 약간 나와 있는 입술.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곧장 귀여운 입술을 향해 직진했다.

“잠깐, 여기 복도…….”

선배가 다급하게 무어라 말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입술에 닿자 나는 황홀함에 두 눈을 꼭 감았다. 놀란 듯 몸을 떨던 노아 선배도 가만히 몸을 늘어뜨리는 것이 느껴졌다.

몇 초 후 입술을 떼고 선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여기가 복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가던 학생들 몇몇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뭘 보냐는 표정으로 주위를 슥 둘러보니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아.”

굳은 채 내 앞에 서 있던 노아 선배가 빨개진 얼굴로 도망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안다, 주말 내내 선배를 못 봐서 좀 나답지 않게 굴긴 했다. 그런데 이건 마냥 내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사람이 그렇게 귀엽지를 말았어야지. 키도 덩치도 나보다 한참은 큰 사람이 그렇게 입을 댓 발 내밀고 있으면, 어?

“어디 가요, 도망가지 마세요!”

나는 실실 웃으며 빠르게 따라붙어 뒤에서 선배의 허리를 끌어안으려 손을 뻗었다.

* * *

“야 너, 잘 거면 얼른 자.”

“응, 잘 거야. 조금만 있다가.”

잠이 부족한 나를 배려한 도라가 불을 일찍 꺼 주었지만, 나는 아직 잘 수 없었다.

눈이 감기는 것을 참은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지금 시간이면 아빠는 자고 있을 테니 통신구를 쓰기는 조금 그랬다. 그냥 편지로 써서 보내야지. 가뜩이나 아빠는 자주 까먹으니까.

생각난 김에 혹여 또 지난번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방학 날짜도 제대로 적었다.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이것도 말 안 했네.”

학년 수석을 했던 얘기부터 축제 이야기까지, 막상 시작하니 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펜을 고쳐 잡는데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도라가 성을 냈다.

“야, 얼른 끝내! 불까지 다 껐는데.”

“아, 알았어.”

나는 화들짝 놀라며 본론을 마저 써 내려갔다.

방학에 영지에 갈 때 아는 선배랑 같이 가도 될까?

* * *

비록 예전에 노아 선배와 내 사이를 알렸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답장도 꽤 빨리 왔다.

음,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내려가면 또 엄청 들볶이겠군. 특히 리타는 정말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었다. 벌써부터 리타 목소리로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사귀신 건가요? 어쩌다 사귀신 건가요? 그분이랑 결혼하실 건가요?

생각해 보면 자작저 식구들은 예전부터 내 연애 문제에 민감했다. 내가 첫 번째 남자 친구, 그러니까 그 찌질한 놈이랑 사귄다는 걸 알렸을 때 얼마나 유난이었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우리 선배는 그놈이랑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잘난 사람이란 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뿌듯한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익숙한 편지지에 적힌 글자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상에, 케이트. 수석이라니, 아빠는 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너는 천재라고 누누이 말했잖니. 지금 다들 난리야. 돌아오면 성적표 좀 보자꾸나.

선배? 어떤 선배? 네가 사귀는 선배 말이니? 아무리 그래도 상견례는 조금 이른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편지를 읽다 말고 미간을 문질렀다.

고르지 못한 필체를 보아하니 아빠가 많이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내 수석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그보다 상견례라니,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단 말이야?

들고 있던 편지지를 내려놓으며 작게 웃음을 흘린 내가 새로운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어쨌든 노아 선배 아니라고 다시 답장해 줘야 했다.

* * *

“큰일이네…….”

나는 복도를 지나며 미간을 좁혔다.

정말 큰일이었다. 방학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겨울 방학. 보통 학생들은 쌍수를 들며 좋아할 사안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딱히 내가 학구열이 엄청나서 그런 건 아니고, 그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노아 선배를 못 본다는 것 때문에 그랬다.

나는 인상을 쓰고 코끝을 문지르며 선배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몇 분 정도 걸으니 창가 근처에서 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노아 선배는 털실로 된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 위로 살짝 보이는 코끝이 추위로 붉어져 있었다.

“왔어?”

털실로 된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있던 선배가 나를 보더니 얼굴 가득 화색을 띠며 목도리를 내렸다. 나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배!”

“저기, 나는 안 보여?”

내가 노아 선배만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내자 몇 발자국 옆에 서 있던 글로리아 선배가 내 눈앞에 대고 손바닥을 흔들었다. 나는 방금 전에 보였던 것보다 다소 건조한 반응을 했다.

“어, 선배도 계셨군요.”

“너무하네!”

글로리아 선배가 꽥 소리치며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든 말든 노아 선배를 빤히 올려다보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뇨……. 선배 목도리가 너무 귀여워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선배를 빼꼼 내다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보송보송한 털실 목도리와 수려한 미인의 조합은 너무나 귀여웠다. 목도리 따윈 절대 안 할 것처럼 생겨서는 털실로 된 목도리라니. 겨울에는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니, 앞으로 계속, 계속 추웠으면 좋겠다.

“귀여워요. 너무 귀여운데……, 그래도 역시 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너 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가락을 꼬물거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차게 식은 눈으로 노아 선배를 쳐다보았다.

“귀엽고 말랑했던 우리 애가 너랑 사귀고 변태 아저씨가 됐어.”

“겨울은 연인의 계절이라고요.”

글로리아 선배에게 샐쭉 눈을 흘긴 나는 눈을 감은 채 노아 선배의 품에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렸다. 겨울이라 옷이 두꺼운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천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은 충분히 따뜻했다. 선배의 긴 머리카락이 등을 간지럽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노아 선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뭉개지는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선배, 저 추워요……. 안아 주세요.”

“저기, 겉옷이라고 알아?”

글로리아 선배가 허망한 표정으로 내가 내팽개쳐 놓은 겉옷을 흔들었다.

“잠깐만.”

제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감은 선배가 푸스스 웃으며 손짓했다.

“이리 와, 춥겠다.”

“어, 이러면 선배 신발을 밟잖아요.”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 같던데, 어떡해.

노아 선배의 손에 이끌려 그 품에 안기게 된 나는 선배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주저했다.

“괜찮아.”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선배가 웃어 보이자, 나는 조심스레 선배의 신발을 딛고 균형을 잡았다. 동시에 노아 선배가 겉옷 안으로 나를 집어넣었다.

나는 몸을 뒤로 기대며 신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완전 따뜻하고 편해요!”

“펭귄이냐?”

노아 선배의 신발 위에 서 있는 나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새끼…… 내가 새 신발은 밟아 줘야 한다고 발 들이밀었을 때는 나 벽에 박아 버렸으면서.”

“시끄러워.”

불만 가득한 투로 꿍얼거리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까칠하게 쏘아붙인 노아 선배가 내 정수리에 턱을 올려놓았다.

맞잡은 손의 온도가 따뜻하고 목을 감은 목도리도, 몸을 감싸는 선배의 겉옷도 포근했다.

노아 선배가 장난기가 일었는지 나를 제 신발 위에 올려놓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위태로운 감각에 하지 말라며 깔깔 웃었다.

“그래, 오래가라. 천년만년 오래가서 평생 내 앞에서 그렇게 염장 질러 줘.”

글로리아 선배가 주머니에 양손을 구겨 넣은 채 중얼거렸다. 그에 킥킥 웃던 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정말 좋은데,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참 씁쓸했다.

“……하아.”

그런 우울한 기분 속에서 겨울 방학은 빠르게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