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10)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

책장에서 예언서 한 권을 뽑아 든 글로리아 선배가 표지에 낀 먼지를 슥슥 닦아 내고 깨끗해진 예언서를 내게 건넸다.

“자, 한번 봐 봐. 뭐가 보여?”

“……네, 보이기는 하는데요.”

낡아서 누렇고 너덜너덜한 종이 위에 깨알같이 적힌 검은 글씨가 보였다.

빨간 책도 그렇더니만 예언서가 평생 신성력으로 보호되는 건 아닌가 보다. 효력을 다하면 망가지기도 하는 평범한 책으로 변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모두에게 보이도록 바뀌진 않은 모양인데.

그러면 예언서 관리하기가 정말 어렵기는 하겠다. 예언서인지 아닌지 구분하기도 까다로울 테니.

“오오, 정말?”

새삼스럽게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재촉했다.

“읽어 봐, 읽어 봐. 무슨 내용인지 알려 줘.”

“잠깐만요, 음…… 아덴이 벨의 입술을 머금었다. 기다렸다는 듯 꼬물거리는……? 조그만 혀, 엑.”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리다 혀를 씹어 버린 나는 얼얼함에 인상을 찌푸리며 예언서를 이리저리 훑었다. 어째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 이거.

“……뭐예요 이거?”

“크큭, 계속해 봐.”

글로리아 선배가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깨물고 내게 손짓했다.

“아니, 대체 왜…….”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책을 탁 덮었다. 대충 편 페이지가 저런 내용으로 가득했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하긴 그 작가 주력이 19금이었지.”

무어라 중얼거린 글로리아 선배가 책장에서 예언서를 전부 꺼냈다. 열 권이 넘는 책을 용케 떨어뜨리지도 않고 균형 있게 들고 있었다.

“전부 읽고 나한테 내용을 말해 줘.”

“……이걸 다요?”

진심이야?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렇게 되묻는 내게 글로리아 선배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그래 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응! 그렇게 자세히 읽을 필요는 없고, 대충 전체적인 내용만 요약해서 말해 줘.”

미치셨어요, 혹시?

그 말이 육성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억누른 내가 거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글로리아 선배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케이트, 제발……. 응? 예언서는 너밖에 못 보잖아.”

“……그 얼굴 그렇게 쓰실 거면 저 주세요.”

“응? 그럼 노아스가 슬퍼할 텐데.”

“하…….”

나는 근처에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피곤함에 눈두덩을 문지르며 쌓여 있는 책을 가져다 펼치자 글로리아 선배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귀족가의 시녀로 들어간 여주인공은 망나니로 유명한 도련님에게 배정됩니다. 당돌하고 용감한 여주인공은 점차 도련님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바람둥이였던 남주인공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둘은 신분 차를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합니다.”

나는 한숨 섞인 소리로 내용을 술술 말했다.

문학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만 이걸 한다고 점수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대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재미가 없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굳이 읽으라면 천천히 읽고 싶었다. 이렇게 시험 보듯 급하게 휙휙 넘기는 게 아니라.

으으, 글로리아 선배는 나 같은 후배가 있다는 게 얼마나 복 받은 일인지 알아야 해.

나머지 예언서들도 전부 첫 번째로 읽었던 책과 같이 두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거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소설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첫 번째 책 같은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차가운 북부의 공작님에게 시집을 가게 된 여주인공은 첫 만남에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지만 결국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공작님의 마음을 녹이고, 우여곡절 끝에 악역을 물리치고 잘생기고 몸 좋은 공작님과 백년해로합니다.”

“오, 역시 다 같은 작가였어. 기억나는 것 같아.”

“예, 잘 됐네요. 이건 또…… 하아암.”

다음 책을 집어 든 나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작게 하품을 했다.

시험 기간에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요약해 본 적이 없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니까, 역사책 뒤져 보면 대충 나올걸? 그 파란 책 남주인공의 가문 가계도라든가. 현실……에도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간혹 있잖아.”

뭐야, 재미있게 쓴 역사책 같은 건가? 이걸로 공부하면 재미있겠네.

다음 책을 펼치며 코를 긁던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아까의 신관처럼 신관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엄숙하게 이런 내용을 해석하는 상상을 하니 조금 우스워졌다.

고개를 흔들어 웃음기를 지운 나는 마지막 예언서의 목차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진짜 뭐죠, 어째 내용이 다 조금.”

그 빨간 표지의 예언서도 그렇지만 예언서보다는 로맨스 소설 같았다. 글로리아 선배가 소설 속이니 뭐니 말했던 것처럼.

“여기 있는 예언서들은 비교적 최근 것들 같아. 뭐, 옛날이랑 비교하면 시대가 평화로워졌으니 이런 내용들밖에 없을 법도 해.”

글로리아 선배가 가져온 공책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어머니가 쓰신 책은 여기 없네.”

“글쎄, 그건 예언서가 아니라니깐요.”

내가 차게 식은 얼굴로 말하자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맙소사, 이 소설들이 다 같은 세계관이었다니. 케이트, 그래도 여기서 우리가 제일 젊다, 좋지?”

“아, 그런가요.”

나는 대충 대답하곤 책장을 넘기다 말고 글로리아 선배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선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엄청 열심이네.

“선배, 그런데 뭐가 그렇게 간절하게 궁금하신 건가요?”

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묻자 선배가 활짝 웃으며 얼버무렸다.

“으음……. 그런 게 있어!”

내가 신성국까지 끌려와서 이렇게 해 주고 있는데 그것도 대답을 안 해 주나?

내 싸늘한 시선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꼈는지, 글로리아 선배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 하하, 하하.”

흐르는 정적 속에서 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봤던 그 신관이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저기, 이제 슬슬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마침 볼일도 다 끝났고.”

순순히 몸을 일으키는 글로리아 선배를 따라 예언서를 책장에 정리한 나는 신관을 힐긋 노려보며 문을 나섰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노려보자 내 기백에 눌린 신관은 슬며시 눈을 피했다.

“흥.”

그에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나를 놀렸다.

“에구구, 그렇게 화가 났어요?”

“혀 짧은 소리 그만 내세요.”

“넵.”

한껏 약이 오른 내가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자 글로리아 선배는 금세 꼬리를 말았다.

그런 선배를 힐끗거리던 내가 아직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 저희 엄마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방법이 있긴 해요.”

“응?”

“저는 엄마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할머니라면 아시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곤 놀란 듯이 커진 선배의 파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방학에 저희에 영지에 오실래요? 곧 엄마 기일이라 할머니가 돌아오시거든요.”

“정말? 그래도 돼?”

내 말을 들은 선배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오더니 감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정말 고마워, 케이트!”

“아빠한테 허락도 받아야 할 테고……. 올 수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는데요.”

나는 쑥스러움에 그렇게 웅얼거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

“그래그래, 졸리겠다. 얼른 이리 타.”

글로리아 선배가 마차 옆에 서서 나를 에스코트했다. 장시간의 이동과 열댓 권의 예언서 속독 때문에 실제로 몸도 정신도 피곤했던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마차에 올랐다.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닦고 있는 사이 글로리아 선배가 마차에 올라탔다.

“하암.”

“자, 이리 와.”

선배가 피곤함에 연신 하품을 하는 내게 손짓해 제 무릎을 베고 눕게 했다.

“저 괜찮, 은데요.”

“됐어, 아까부터 피곤해 보이던데. 얼른 자.”

“으음.”

더 말을 했다가는 졸려서 말이 꼬일 것 같았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이 점점 감겼다.

글로리아 선배가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수고했어.”

온통 졸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려 눈을 떴다.

“어, 미안. 깼어? 더 안 잘래?”

“우음……. 괜찮아요.”

슬쩍 걷었던 커튼을 다시 치는 글로리아 선배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킨 내가 작게 하품을 했다. 어두컴컴했던 바깥이 밝아질 때까지 잔 거면,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거지.

“우와아.”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감탄을 발했다. 하늘에서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아주 펑펑 내리는 걸 보아 당분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쁘긴 한데 이렇게 되면…….”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말끝을 어물쩍 흐렸다. 글로리아 선배가 옆에서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아카데미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겠네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나를 달래려는 듯 글로리아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내일 아침에는 도착한다니까.”

“내일 아치임?!”

내일 아침이면 월요일 아침이잖아, 세상에, 너무 빠듯해.

내가 경악하며 소리를 지르자 선배가 진정하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여기서 좀 자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몰라요, 선배 미워!”

“그건 말이 너무 심하잖아…….”

글로리아 선배가 가냘프게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새하얀 풍경으로 가득한 바깥을 내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큰일인데.

“……트, 케이트!”

“으, 도라……. 나 5분만 더.”

분명 방금 전까지는 조용했는데, 언젠가부터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웅얼거렸다. 그사이 목소리는 점점 형태를 갖춰 갔다.

“케이트, 수업 시간에 뭐 하니?”

“허업.”

교수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책상 위에 퍼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을 깨려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니 학생들이 이쪽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책상 앞까지 와 계신 교수님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꾸중을 하셨다.

“왜 그러니, 너답지 않게.”

“죄삼…… 죄송합니다.”

서둘러 입가를 닦은 나는 꼬인 혀로 더듬더듬 사과를 한 다음 눈을 비비며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교수님이 혀를 쯧쯧 차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

“주의하렴.”

“네,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를 한 나는 정신을 차리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아, 젠장. 수업 시간에 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게 다 글로리아 선배 때문이야.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밤새 달린 마차는 오늘 오전 6시가 되어서야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밤새 눈이 왔나 보다며 하얀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을 나는 죽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놈의 눈 때문에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체되었는데. 결국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결국 수업 시간에 졸아 버렸다. 진작 시험이 끝나고 지금 나가는 진도는 많이 없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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