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10)

마차 여행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오전에 펑펑 오던 눈은 가는 길에 멈췄고, 글로리아 선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마차에 타서는 실없는 말장난을 치고, 중간에 멈춰 내게 비싸 보이는 점심을 먹이고 서글서글 웃으며 내게 간식을 건네고.

마차에서 엄청나게 멀미를 해 대는 나인데, 오늘만큼은 신기하게 멀미를 하지 않았다. 역시 비싼 마차라서 그런가?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뒤인 데다 마차 좌석은 정말 푹신해서 잠이 솔솔 왔다. 안 졸려고 갖은 애를 써 봤지만 어느 순간 픽 하고 의식을 잃었다.

“케이트, 케이트. 일어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글로리아 선배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으어…….”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너 5시간 잤어, 알아?”

“흐읍.”

그렇게나 많이?

나는 게슴츠레 떴던 눈을 부릅떴다. 맞은편에 앉은 선배가 내 표정이 웃기다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우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신성국의 국경선을 통과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서 한 시간쯤 더 마차를 달려 도착한 신전은 새하얗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근처에서 적당히 요기를 한 다음 신전으로 향할 때까지 나는 주위를 힐끗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너 오기 싫어했던 것치고는 굉장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는 글로리아 선배의 말을 무시한 채.

“와아.”

신성국이 처음인지라 가로수 한 그루도 그저 신기해 고개를 이리저리 휙휙 돌렸다. 광장에 있는 커다란 여신상이 내 시선을 휘어잡았다.

“이리 와, 여기야.”

신전 입구에 선 글로리아 선배가 내게 손짓했다, 고개를 쭉 내밀고 거리의 풍경을 구경하던 내가 허겁지겁 그쪽으로 달려갔다.

늦은 시간이라 텅텅 비어 있는 중앙 신전은 종종 가던 지방의 신전과는 달랐다. 훨씬 크고 웅장했으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 그런데 예언서가 어디 있지?”

“어, 글쎄요.”

나는 글로리아 선배를 따라 텅 비어 어쩐지 음산해 보이는 신전의 복도를 둘러보았다.

신전에 예언서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고 듣긴 했다. 근데 옛날 옛적에 이미 그 쓸모를 다한 것들이니 역사적 가치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겠지만, 그래도 엄연히 성물인데 일반인이 들어가도 되려나?

“그런데 예언서를 보관하는 곳에 일반인이 들어가도 돼요……?”

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글로리아 선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그녀가 거만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케이트. 넌 내가 일반인으로 보여?”

“관계자는 아니잖아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내 대답을 들은 선배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머리를 긁적였다.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래도 좀 무서운데…….”

“에이, 걱정 말래도.”

글쎄, 어떻게 될까.

글로리아 선배를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기던 내 눈에 복도를 지나는 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반가움까지 느끼며 그 신관이 서 있는 쪽을 가리켰다.

“어, 저기 신관이에요. 얼른 예언서 어디 있는지 물어봐요.”

“응,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곤 신관에게 다가간 글로리아 선배가 서글서글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칼리아 제국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추우실 텐데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우리의 옷차림을 한번 슥 훑어본 신관이 답하듯 웃어 보이며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신관복의 재질이나 당당한 자세를 보아하니 제법 고위 신관 같았다.

글로리아 선배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전에 예언서를 모아 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잠깐만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신관의 이마가 형편없이 콱 찌푸려지자 나는 작게 히익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선배 뒤에 숨었다.

“안 됩니다. 예언서는 외부인에게 노출할 수 없습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신관이 엄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글로리아 선배는 하나도 기가 죽지 않은 동작으로 신관에게 보이도록 옷소매를 들어올렸다. 소매에 달린 단추에는 루피너스 후작가의 상징인 루피너스 꽃과 사자의 인장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실 저는 이런 사람인데…….”

선배가 느물느물 웃으며 말을 잇자 신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글로리아 선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돈이 들어 있는지 안에서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신관이 무력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짤랑.

“외부인을…….”

짤랑.

“신성한 곳에 들일 수는…….”

짤랑.

그녀는 신관이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웃는 얼굴로 금화가 가득 든 돈주머니를 꺼내 놓았다.

와, 저게 다 얼마야.

나는 태연한 척 표정을 갈무리하면서도 속으로 식겁했다.

저 정도는 루피너스 후작가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사룟값도 안 될 거라는 걸 알지만, 비교적 소박한 경제관념을 가진 나로서는 아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꼭 주머니째로 건네야 하는 걸까? 그냥 한 닢 한 닢 줘도 될 것 같은데…….

눈앞에 돈주머니가 가득 쌓이자 신관의 강직했던 표정이 무너졌다.

“아, 계속 말씀하시죠.”

글로리아 선배가 사람 좋게 웃자 마침내 신관이 항복을 했다.

“……얼마나 오래 있으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아직 모르겠네요.”

“절대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불안한 얼굴로 돈이 든 주머니들을 품에 욱여넣은 신관이 우리에게 고갯짓을 했다.

“감사합니다.”

미소 띤 얼굴로 신관을 향해 고개를 까딱인 글로리아 선배가 내게 가자며 손짓했다.

아니, 신관이 저래도 되는 거야?

나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뻐끔거렸다.

물론 요즘 시대에 부패하지 않은 집단을 찾기는 무척 어려울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을 모시는 신관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관과 선배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하하, 어때? 돈으로는 안 되는 게 없어.”

“멋져요, 선배. 근데 그거 다 얼마예요?”

“너는 몰라도 돼요.”

“아야.”

선배가 웃음기 띤 얼굴로 내 볼을 살짝 꼬집고 걸음을 옮겼다. 신관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건조하게 변했다.

나는 얼얼한 볼을 문지르며 그녀를 따라갔다.

가끔 선배가 저렇게 표정을 휙휙 바꿀 때면 조금 위화감이 든다. 고위 귀족이라 그런 걸까?

“그런데 신관이 저래도 되는 거예요?”

나는 우리를 앞서 가는 신관을 힐끗대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선배에게 속삭였다.

글로리아 선배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에이, 원래는 돈 줘도 저렇게는 안 하지.”

“그러면요?”

“내가 돈을 엄청 많이 줬잖아.”

“아하.”

곧바로 납득한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마저 걸음을 옮겼다.

기도실 여럿을 지나 하얀 문 앞에 도착한 신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너무 오래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정도 드렸으면 두 시간 정도는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

글로리아 선배의 대꾸에 신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 앞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보안이 좀 허술하네. 굳이 뇌물 안 주고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몰래 들어갔다가 들키면 어떡하니. 내 미래의 직장인데 잘 보여야지.”

텅 빈 문가를 힐끗거리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글로리아 선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만큼의 돈은 조금 아까웠어.

“양이 그렇게 많지가 않네요?”

생각보다 좁은 방과 작은 책장, 그리고 그 작은 책장에 꽂혀 있는 열댓 권의 예언서들을 바라보던 내가 묻자 신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예언서가 사라진 지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그사이에 유실된 게 많아서요.”

“흐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것들도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데.

낡아서 너덜너덜하고 먼지까지 낀 책등을 슬쩍 훑어본 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신관은 문가에서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제2시대의 유물이니 낡은 건 이해가 가지만 유실이라니, 아무래도 신전이 관리를 제대로 못 하나 봐. 쯧, 쓸모를 다했다고 해도 엄연히 성물이고 귀중한 자료인데 그러면 안 되지. 헌금으로 뭐 하냐?

오늘 여러모로 신전에게 실망했다.

나는 뱁새눈을 뜨고 글로리아 선배의 귀에 속삭였다.

“선배, 꼭 신전에 들어가셔야 해요? 저 여기 영 못 미더운데요.”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인 글로리아 선배가 내 눈을 피했다.

아까부터 문가에 어색하게 서 있던 신관이 헛기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시녀분께서 굉장히 야무지네요. 좋으시겠습니다.”

“뭐요?!”

누가 시녀야!

나는 신관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내가 글로리아 선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수수하게 생겼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녀라니……. 봉급이라도 받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케이트, 한 번만 봐주자, 한 번만.”

신관을 매섭게 째려보며 씩씩거리는 내 옆구리에 팔을 감고 나를 뜯어말리던 선배가 신관에게 말했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예언서는 깨끗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글로리아 선배의 부탁을 빙자한 명령에 신관은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방을 빠져나갔다. 하얀 신관복 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가를 노려보던 내가 분을 삭이며 이를 갈았다.

“플로라 선배는 절대 저렇게 되면 안 돼요.”

저 악덕 비리 신관 같으니.

내가 이를 빠득빠득 갈자 글로리아 선배가 옆에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저 사람한테 뇌물 준 나는 뭐가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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